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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9화 (9/123)

9화

“사지를 자르고 싶다면 내가 고통 없이 해 주지.”

데반이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돌리더니, 바닥에 푹― 내리꽂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동작인데, 군더더기 하나 없이 우아했다.

검 손잡이 위에, 그는 두 손을 포개듯 올리고 날 빤히 바라봤다.

물론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졌다.

“치료를 인질로 나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잘못 짚었단 이야기야.”

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스스로 손을 그은 내 행위를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어제 치료를 하다 쓰러진 일에 대해 그가 캐물을까 봐, 미리 선수 쳐 자해했다고.

“뭘 오해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게 아니라, 신력을 시험할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시험?”

난 데반의 가슴팍을 슬쩍 밀었다. 그러곤 그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신력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몇 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손바닥에 났던 상처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몸도 멀쩡했다.

데반을 치료했을 때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프지도, 식은땀이 나지도 않았다. 약간의 거북함은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도대체 어젠 왜 쓰러졌던 거지?

혹시나 그의 저주를 푸는 데 문제가 생긴다면 곤란했다.

내가 버틴 10년의 세월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독하군.”

어느새 검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그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피 냄새가 거북한 모양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너무 충동적으로 움직이긴 한 것 같았다.

나가서 하거나, 욕실에서 할걸. 바닥엔 이미 피가 스며들고 있었고, 내 옷도 엉망이었다.

*

“신전에서 절 찾는다고 들었어요.”

식사 테이블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데반은 제 앞에 놓인 수프를 한입 뜨려다, 인상을 구겼다.

“누가 그랬지?”

“그게 중요한가요?”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보내 줄 순 없다. 내 저주를 풀기 전까진.”

“네? 보내 주다뇨?”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신전에서 널 찾고 있으니, 이제 그만 보내 달란 소리가 아니었나?”

“그럴 리가요. 절대, 절대 보내면 안 돼요. 설마 신전이 벌써 여길 의심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것 같진 않지만.”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난 싱싱해 보이는 샐러드도 옆에 내팽개친 채 곰곰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신전에게서 완벽히 숨을 수 있을까.

아니, 완벽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데반의 저주를 풀 때까지만 숨어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 후에는 이 제국을 뜰 거니까.

대체 신전이 무슨 일로 날 찾는지는 몰라도, 설마 다른 제국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저기요.”

건방진 내 말투에 데반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조심 좀 해 주세요.”

“뭐?”

“제 하녀를 뽑기 위해 영지에 공고를 쫙 돌리셨다고 들었어요. 그 탓에 영지에 무슨 소문이 난 줄 아세요?”

“무슨 소문?”

그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내 입으로 혼인 운운하는 건 부끄러웠다.

“……그건 몰라도 되고요. 아무튼 이 성에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만약 신전이 그 소문을 듣기라도 해 봐요.”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걱정할 일이죠, 제 일인데!”

데반이 숟가락까지 내려놓곤, 식탁에 턱을 괬다.

“이제 슬슬 진짜 궁금한데. 돈이 필요하다면 신전에 요구하는 편이 빠르지 않나?”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신전이 돈을 줄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제국 내에서 신전의 대외적 이미지는 완벽했다.

그들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잠잘 곳을, 밥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다친 사람들에게는 치료를 해 줬다.

그러니 내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신전이 조금이라도 신력이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노동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끝내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신전의 이면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희생양인 우리를 제외하곤.

“……그건 안 돼요. 시작이 어떻든 우린 거래를 했어요. 전 전하의 저주를 풀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까, 전하께서도 제가 이 제국을 떠나게 해 줘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절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요. 누구한테도.”

“디에고 백작에게도?”

난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는 꼭 뭔가를 아는 것처럼 정곡을 찔렀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했다시피 난 저주만 풀어 준다면 뭐든 상관없어. 다만 그러지 못할 경우엔…….”

“그건 걱정 말아요.”

금방이라도 살벌한 소리를 할 것 같은 데반의 입을 서둘러 막았다.

“어제 쓰러지는 꼴을 보아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던데.”

“……그건, 그건 제가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래요. 아까 봤잖아요.”

난 보란 듯이 그의 앞에다 상처가 말끔히 나은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 앞을 보지 못하지, 참.

다시 슬쩍 손을 내렸다.

“그 피 냄새를 말하는 거군.”

“맞아요. 지금은 안 나잖아요.”

“상처에 익숙한가?”

“……그럴 리가요.”

여기서 굳이, 내가 백작에게 맞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할 필욘 없었다.

그 앞에서 난 어디까지나 완전무결한 예언 속 여신이고 싶었으니까.

“앞으로 그런 무식한 짓은 삼가지. 집에서까지 피 냄새를 맡고 싶진 않거든. 정 원하면 내게 맡기고.”

그가 언짢은 표정을 했다.

“다음엔 욕실에서 할게요.”

“하지 말라고.”

난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알았어요.”

내가 욕실에서 혼자 뭔 짓을 하든 그가 알 리도 없으니,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네 하녀가 네 목욕 시중을 들 거다, 당연한 소리지만.”

데반이 빠져나갈 곳은 없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피 냄새를 얼마나 싫어하면 이러는 거지?

난 그를 노려보다가, 그의 옆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집사를 흘깃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이 큰 성에 사용인이 한 명도 없는 건가요?”

“여기 있잖아. 새로 구해 주기도 했고.”

“말고요.”

“……사람이 많은 건 질색이다.”

그가 무심하게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요? 하지만, 불편하잖아요. ……여러모로.”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더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참았다.

“사람이 많으면 발소리를 외우기가 힘들거든.”

“아…….”

난 멍청한 소리를 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딘가 어색한 침묵이 홀을 감쌌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삶은 어떤 걸까. 새삼스럽게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가,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안쓰럽다니.

그는 최소한 협박과 고문을 당하다 죽는 운명은 아니었다.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건지.

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내가 누굴 동정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래서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전이 저를 왜 찾는 건데요?”

“글쎄. 난 네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요?”

데반이 느리게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네가 꼭 필요하다더군. 전 제국에 대대적으로 공표한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고.”

제국에 대대적으로?

그건 꽤 의외였다.

이미 그들은 나를 디에고 백작에게 팔아넘긴 지 오래였다. 온 제국이 그걸 알고 있었다.

비록 나처럼 부정적인 의미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신전이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게 참견하지 않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뭐죠? 그쪽에서 날 그렇게 찾을 이유가…….”

“신력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8년간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신전에서도 알고 있을 텐데.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신전에서는 내 신력이 바닥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신력을 가지고 있다가 바닥난 아이는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포크를 입에 물고 깊게 인상 썼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이유가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난 신전에서 이미 버린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그들과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사실은 나도 궁금했거든.”

“뭐가요?”

“디에고 백작도 가만히 있는데, 왜 갑자기 신전에서 널 찾을까 하고.”

“그래서요? 뭔가 알아냈어요?”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깨끗하게 비워진 데반의 접시에는 고기에서 나온 핏물만이 가득했다.

“웬 여자아이 하나가 아프다더군. 신전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이라곤 그게 다야.”

“……여자아이?”

그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처럼 막대한 신력을 가졌다던데. 신전에서 지금껏 꽁꽁 숨겨 둔 것 같더군. 이름이, 코델리아라고 했나.”

……뭐?

나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졌다. 쨍그랑― 식기가 듣기 싫은 파열음을 내며 떨어졌다.

데반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은 생각보다 파급력이 상당했다.

“무슨 소리지?”

“아, 제가…… 제가 실수를.”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노집사가 서둘러 달려와 접시를 치워 줬다. 차마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아 난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집사가 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아요.”

데반이 인상을 구겼다.

“혹시 아는 이름인가? 그 여자아이와 신전에서 널 찾는 게 무슨 관련이 있나?”

흠칫, 난 잘게 몸을 떨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저, 저 이만 방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치료는 저녁에 해요.”

“이봐.”

데반의 말허리를 뚝 끊고 난 그대로 홀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코델리아.

그녀였다,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

나와 달리 거짓이라곤 없을 예언의 주인공.

……코델리아. 그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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