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앉지.”
데반의 집무실에 들어온 나는 멀뚱히 서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데반은 정말 눈이 안 보이는 게 맞는 걸까?
일부러 숨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는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며 앉으라 말했다.
“안 앉나?”
이번에도.
집무실 의자에서 티 테이블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동한 것도 모자라, 그는 날 정면으로 바라봤다.
분명 내가 알기로 원작에서 그는 이러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딪히는 것에 신물이 나 있었고 한껏 예민한 상태였다.
“이봐.”
데반이 한 번 더 부르자, 결국 난 생각을 포기하고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소파가 꺼지자 그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여기에 앉지?”
“치료를 하려면 가까이 있어야 할 것 아녜요.”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중간에 강아지 때문에 신력을 썼던 일을 제외하면, 8년 만에 처음 쓰는 신력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신력이 그의 저주를 풀기에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몸 가장 안쪽에서 막대한 신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상태로 데반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가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다.
“치료를 하기 전, 전하의 몸에 신력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오늘은 제 신력을 전하에게 흘려보낼 거예요. 신력이 흐를 수 있는 공간을 미리 뚫어 놓는 거죠.”
“공간을 뚫어 둔다고?”
“말하자면 전하의 몸을 타고 흐르는 혈액을 신력으로 채우는 거라고 할까요.”
“혈액을 채운다는 게 도대체…….”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뭐,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약간 거북하겠지만 참아 봐요.”
“……그러지.”
안쪽에서 울렁거렸던 신력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붙잡힌 손을 통해, 그걸 데반 쪽으로 보냈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꼭 먹은 걸 토해 내는 기분이었다. 원래의 방향을 거슬러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윽.”
그건 데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신력에 대한 적응력은 사람마다 달랐다. 신력을 타고난 사람은 그만큼 적응력도 높았고, 전혀 없는 사람은 그저 치료를 위해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데반은 아마도 후자인 것 같았다.
움찔거리는 데반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오늘 안에 적어도 그의 팔 끝까지는 도달해야 했다.
데반의 커다란 손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내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떨어지고 있었다.
“흐으…….”
이번에 신음을 뱉은 건 내 쪽이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상했다. 처음엔, 오랜만에 신력을 발동해서 그런 거라고 지레짐작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난 막대한 신력을 타고났으니 그만큼 적응도도 높았다. 이렇게까지 거북할 리가 없었다.
“……이봐.”
데반이 의아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이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10년 전 일이었지만 기억이 생생했다. 수백 번의 치료를 했지만, 그땐 이런 기분이 든 적이 없었는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놓을 순 없었다. 아직 그의 팔꿈치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오늘 팔 전체에 도달하지 못하면…….
“괜찮은 게 맞나?”
그가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게 느껴져, 서둘러 붙잡았다.
난 하루빨리 당신을 치료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여유가 없단 말이야.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침내 신력이 그의 어깨에 도달했다. 이제 한계였다.
“후.”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불에 덴 것처럼 파드득 그의 손을 털어 냈다. 그러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겨우 심호흡했다.
“괜찮나?”
가물가물 눈을 뜨자 그가 날 멀뚱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핑 돌았다. 어쩐지 눈앞이 일그러졌다.
“아니……. 안 괜찮은 것 같네요.”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
<안녕?>
무언가가 킬킬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누구지? 분명 이곳에 존재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시공간이 흔들리는 느낌? 그러니까…….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어.>
그게 불쑥 말했다. 내 마음을 읽는 건가?
<마음뿐이겠어?>
그럼?
무언가가 킬킬 웃었다. 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누구야, 넌?
<난…….>
번쩍, 눈을 떴다. 세 번째로 보는 사자가 날 반기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꿈인가? 등 뒤가 식은땀으로 척척했다.
기억이 빠르게 지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고.
대체 뭐였지? 그러니까, 그 웃음소리가…….
“아가씨! 괘, 괜찮으세요?”
힐다였다.
그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옆을 밤새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긴 한데, 아니.”
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무슨 꿈을 꿨더라?
간신히 떠올려내려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소용돌이에 빨려 가듯 의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분명, 처음으로 치료를 시작하고 거북함을 느껴서…….
퍼뜩 생각나 물었다.
“전하는?”
“글쎄요. 주, 주무시지 않을까요?”
“어떻게 된 건데? 치료 말이야.”
“어……. 저, 저는 치료가 끝나고 아가씨가 쓰러지셨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그 말은 데반은 괜찮단 소리인가?
대체 왜 쓰러진 걸까. 역시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건가.
몇 년 만에 신력을 사용했다는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몰랐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최소한 어깨까지 신력을 이동시킨 건 확실했다. 그러니 아마 늦어도 며칠 후면 눈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였다.
“그, 그보다 아가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힐다가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봤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저기 그게, 그러니까…… 신, 신전에서 아가씨를 찾고 있대요.”
“뭐?”
“신전이요, 아가씨! 대, 대, 대신관님이 직접 나섰대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나는 힐다가, 내가 쓰러진 사이에 여러 정보를 얻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내가 디에고 백작에 입양된 엄청난 신력을 가진 고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데반과 내가 거래를 한 것까지 어렴풋이 아는 것 같았다.
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어보니, 다 아는 수가 있다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 정도면 호기심도 재능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신전에서 왜 날 찾는지 이유까진 모르겠다고 하기에, 난 힐다에게 길을 물어 직접 데반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였으니, 말 그대로 아침 댓바람부터였다.
그는 치료를 했던 그 방에 있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저예요.”
“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흔적이나 책상 배치로 보아 이 방은 그의 집무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일을 하는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치료에 관한 일인가?”
“네? 그건 아니지만.”
“그럼 식사할 때 하지.”
대체 뭘 하길래 그러지?
난 소파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봤다. 책상 위에는 그 흔한 종이 한 장도 없었다.
대신 동그란 구체가 있었는데, 데반은 거기에 한쪽 손을 대고 있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혹시 마도구인가?
슬쩍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봤다.
내가 가진 건 신력이었지만, 마력과 신력은 한 끗 차이라서 직접 시전할 수 없어도 느끼는 건 가능했다.
역시, 동그란 구체에서 그의 몸으로 뭔가가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직접 볼 수 없으니, 마도구로 소식을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바라봐도 그는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어제의 일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걸까. 아무래도 식사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 진심 같았다.
지금은 일곱 시였으니 식사까진 약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무얼 하며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다 소파에서 일어나 슬쩍 방을 둘러봤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지만 참 황량한 방이었다. 데반과 짜 맞춘 듯 잘 어울리는 방이기도 했고.
저건 뭐지?
유독 눈에 띄게 화려한 무늬를 가진 검이 벽에 걸려 있었다.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집과 검신이 따로 진열돼 있었는데, 검날마저 어두운 검은색인 게 특이했다.
그럼에도 화려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손잡이에 박혀 있는 보석들 때문이었다.
새까만 흑진주부터 검붉은 루비, 흑요석까지.
분명 모두 어두운 톤이었지만 번쩍거렸다.
“이거 만져 봐도 돼요?”
데반을 바라보며 묻자, 그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내가 뭘 가리키는지 알고 그러는 건지, 그게 아니면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건지.
어쨌든 허락도 받았으니. 검날에 슬쩍 손을 댔다.
얼마나 잘 벼린 칼인지 슬쩍 대자마자 피가 송송 났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생각이 났다.
난 그대로 손바닥 전체를 검날에 대고 세게 그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
손바닥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뚝뚝,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데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뭘 하는 거지?”
그가 내 쪽을 두리번거렸다.
“피 냄새가 나는군.”
내가 부여잡고 있는 손바닥을 그가 홱 가로채 갔다. 더 아프게 할 셈인지 꾹꾹, 상처를 누르기까지 했다.
“검에 흥미가 있나?”
데반이 돌연 벽에 걸려 있는 검을 능숙하게 잡아 들었다.
그제야 그가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기사보다 검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검을 한 손에 가볍게 쥔 채 데반이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바닥을 더럽힐 생각은 아니었어요.”
난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데반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다음부턴 내게 말해.”
“……뭘요?”
“사지를 자르고 싶다면 내가 고통 없이 해 주지.”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