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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화 (7/123)

7화

“흠…….”

나는 거울에 비친 멍 자국을 바라봤다.

데뷔탕트를 앞두고 몇 달을 잘 버티다가, 하필이면 납치당했던 날 아침에 지하실로 끌려가야 했다.

보나 마나 또 귀족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밤에는 방으로 돌려보내 줘서 다행이었지. 지금껏 해 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멍 자국을 보니 족히 일주일은 갈 것 같았다. 그 전에 데반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

가운을 최대한 꼭꼭 여몄다. 조금 웃긴 모양새였지만, 들키는 것보단 나았다.

노집사가 알려 준 길을 따라 서둘러 방을 찾아갔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그대로 직진하다가 계단 반 층을 오른 후, 다시 오른쪽으로 가서 복도 가장 끝에 있는 방.

천천히 곱씹었다. 그나마 욕실이 홀보단 방과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납치당하고 눈을 떴던 방이 계속해서 내 방이 될 모양이었다.

꽤 고층이라 창가 풍경도 좋았고, 무엇보다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훔쳐 갈 만한 금붙이가 없는 것과 이리저리 미로처럼 꼬인 복도는 아쉬웠지만.

그나저나 시녀도, 하녀도 없으면 어떡한담.

씻는 건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혼자 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지만 옷을 입는 건 달랐다.

이 세계의 옷은 애초에 혼자 입는 게 불가능했다.

순서가 복잡한 건 둘째 치더라도, 등에 있는 그 수많은 끈들을 하나하나 묶으려면 도와주는 사람은 필수였다.

그 노집사가 하려나.

그가 쩔쩔매며 끈을 묶는 모습을 상상하자 헛웃음이 터졌다.

이참에 그런 끈 따윈 필요 없는 옷으로 바꾸는 것도 좋을 테다. 어차피 이 나라를 떠나면 평민으로 조용히 살아갈 거니까.

굳이 귀족들이 입는 복잡한 드레스를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가운을 단단히 여미고, 한 박자 쉬었다가 대답했다.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의외로 노집사가 아닌 앳된 여자였다.

“응?”

“저…… 힐다입니다, 아가씨. 오, 오,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됐어요.”

그녀는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곁눈질로 날 바라보는 앳된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했다.

“분명 하녀가 없다고…….”

“그, 그게 대공 전하께서…… 급하게 구, 구하셨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힐다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드레스는 가져왔니?”

“예, 예. 아가씨.”

힐다가 손에 든 드레스를 내보였다. 노집사의 취향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럼 옷을 갈아입혀 줄래?”

“네, 네. 아가씨!”

힐다는 생각보다 일을 잘했다.

뭐든지 서툴 것 같이 생겨선, 순식간에 드레스를 입혀 줬다.

거기에 내 멍 자국을 또렷이 봤을 텐데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네, 네?”

드레스를 모두 입고 내 머리를 빗겨 주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다 좋은데 그녀는 아까부터 과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 대공 전하께서 사람을 구한다는 말이 영지에 쫙 퍼, 퍼져서요.”

“흐음. 영지민이었구나.”

“저, 하, 하지만. 저, 절대 어디 가서 말하지 않을게요!”

힐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뭘?”

“예?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가씨가 전하의 집에 억, 억지로 오셔서…… 혼인을 하셨다고…….”

“뭐?”

내 고함에 힐다가 빗을 툭 떨어트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혼인이라니? 자세히 말해 봐.”

물론 내가 억지로 납치당한 건 맞았지만, 혼인이라니. 대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 퍼졌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납치 자체가 비밀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황당해하는 내 눈길을 피하던 힐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아주, 아주 잔인하신 분이라고……. 그, 그래서 아직 혼인을 안, 안 하셨고 그러니까…… 이, 이 집에 젊은 여자가 있는 걸 보면 모두 강, 강제로 혼인을…….”

“잠깐만, 진정하고 제대로 말해 봐.”

힐다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데반은 젊은 여성을 위한 하녀를 찾는다는 공고를 영지 전체에 냈다. 자연히 그가 젊은 여성을 성에 들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은 금세 데반이 어딘가에서 여자를 사 와 강제로 혼인을 하려 한다고 와전됐다.

난 황당함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소문은 둘째 치고, 그리 당당하게 제 성에 젊은 여자가 있다고 밝히는 데반의 배짱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영지 밖으로까지 퍼진다면, 갑자기 나타난 젊은 여성의 신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거기에 디에고 백작 영애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합쳐진다면?

대공 저의 젊은 여성이 나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한둘쯤 생길지도 몰랐다.

물론 디에고 백작이 눈에 불을 켜고 날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점점 날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보고 있었으니, 어쩌면 잘됐구나 하고 벌써 장례까지 치렀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납치한 건 저쪽인데 도대체 왜 내가 더 걱정을 해야 하는 거지?

“저, 아가씨. 그런데 저, 정말로 대공 전하께서는 그렇게, 그렇게 잔인하신 분이신가요?”

힐다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호기심이 많아서 하녀 일을 지원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글쎄.”

난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잔인하다라. 그런 소문이 제국 전체에 돌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제 동생을 끌어 내리고 황좌에 오르려고 한다는 소문도 함께.

“그렇지 않을까?”

확실한 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라는 거였다.

난 얼마 후면 이곳을 완전히 떠날 사람이었고, 내게 필요한 건 단지 돈뿐이었으니까.

*

데반 란티모스는 여러모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건 어쩌면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왔던 저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고, 이번 희망도 산산이 부서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한 손에 잡히던 마른 손목과 어울리지 않게 당차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데이지 향을 풀풀 풍기던 디에고 백작가의 여식, 에블린을.

데반은 그녀가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신전에서 길러지다가 백작가로 입양됐다.

디에고 백작가의 인장이 태양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도, 그녀의 몸에서 데이지 꽃향기가 풍기는 것도 모두 확실했다.

그는 웬만한 확신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단서가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예언의 주인공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왜일까.”

데반은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턱을 느리게 쓸었다.

단순히 신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녀는 어딘가 그가 상상한 모습과 달랐다.

물론 외양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와 왠지 모를 당당함 따위가 그랬다.

심지어 납치당한 주제에 역으로 거래를 제안해 오지 않았던가. 그때를 생각하자 황당함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이 제국을 뜰 수 있는 돈과 지위라.

실제로 그에게 저주를 치료해 주는 대가로 돈이나 권력을 요구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얼간이 같은 치들이었다. 하나같이 제 신력에 자신이 있다고 말을 늘어놓더니, 치료는커녕 데반의 몸에 신력을 흘려보내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로 데반이 나중에 황좌에 오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 오로지 막대한 돈과, 데반의 권력을 꾀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에블린은 달랐다. 그녀는 거부로 소문난 디에고 백작의 여식이었다.

푼돈이 아쉬울 위치도, 신분 상승 따위를 바랄 위치도 아니었다.

그래, 데반이 가장 황당한 지점은 그거였다.

이 나라를 뜰 수 있을 정도의 돈. 그건 디에고 백작에게도, 그에게도 너무나 푼돈이었다. 평생 고통받은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는 대가로는 너무나 적었다.

데반은 잠시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한 건,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라는 거였다.

저주만 풀어 준다면 데반은 무엇도 줄 수 있었다. 설령 그녀가 원하는 게 제 전 재산이었다고 해도 그는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데반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채, 고개를 털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필요 없었다. 그는 오로지 제 저주를 고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에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에블린의 치료를.

그녀가 말한 대로 씻고, 식사했으니 이제 치료를 할 차례였다.

집사에게도 지시해 두었으니, 곧 그녀가 올 것이다. 그는 긴장으로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때, 허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킬킬.>

꼭 장난스러운 웃음소리 같았다.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재밌게 굴러가고 있네?>

무언가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데반의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어때, 그 아이는?>

“닥쳐.”

데반이 참지 못하고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러나 킬킬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5년이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말을 걸어 온 지가.

그는 이것의 정체도, 원하는 것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남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만 알았다.

그는 가끔씩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이것도 저주의 일부일지도.

저주가 사라진다면 이것도 사라질까.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느껴지던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가씨를 데려왔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데반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가 깊게 심호흡했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익숙한 노집사의 발걸음 소리 뒤로, 가벼운 발걸음이 따랐다.

데반은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곧 사물과 사람의 형태가 아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새까만 가운데 사물과 사람의 테두리만 짙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이것 역시 5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나면서 생긴 능력이었다.

완벽하게 보인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형태는 보였다.

이 능력 덕분에 그는 볼썽사납게 넘어지거나 부딪히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노집사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데반은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는 에블린에게 말했다.

“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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