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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6화 (6/123)

6화

그날 저녁, 데반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식사도 없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깼을 때, 그때야 겨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벌컥 문을 열었다. 어느새 자물쇠는 풀려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내 기대와 달리 노집사였다.

하긴, 데반이라면 노크를 하는 대신 마음대로 방에 쳐들어왔겠지.

“드디어 식사인가요? 빠르기도 하네요.”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에 그가 약간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를 그레이트 홀로 모셔 오라는 명령이십니다.”

“……홀이요?”

“전하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식사도 하고 싶다고 하셨고요.”

홀에 가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난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게 거절할 권리는 없었다.

“……좋아요. 앞장서요.”

복도는 방 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화려한 장식 따윈 없이 깔끔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더 그래 보였다. 백작가와는 달랐다.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집사들도, 시녀들도, 시종 한 명도 없었다.

거기에 길이 이리저리 꼬여 있어 복잡했다.

앞장서 걷고 있는 집사가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런 방에 가둬 둔 걸까.

갈림길에서 오른쪽, 다시 왼쪽, 계단을 반 층 올랐다가, 다시 갈림길에서 직진, 다시 오른쪽…….

노집사는 거침없었다. 복기하기는커녕 따라가기도 바빠서, 난 길을 외우는 걸 중간부터 포기해야 했다.

마침내 도착한 그레이트 홀은 커다랬다. 정말로 커다랬다. 하지만 그만큼 삭막했다.

융단조차 깔리지 않은 바닥엔 기다란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천장엔 무늬 없이 크기만 커다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그게 다였다. 벽에는 태피스트리 한 장 없었고, 화분이나 동상 따위도 없었다.

데반은 그 기다란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노집사는 허리를 한 번 숙여 보고하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다.

데반이 테이블을 턱짓했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검은 안대가 둘러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앉으려다가, 멈칫했다.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잔뜩 헝클어진 머리며 구겨진 드레스가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저기, 그 전에 저 좀 씻고 싶은데요.”

“일단 먹지.”

“하지만 그제부터 못 씻었어요. 납치당한 후로.”

“씻으나 안 씻으나 그대로일 것 같은데 그냥 앉아.”

난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데반은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곧 노집사가 음식이 가득 든 트레이를 끌며 나타났다. 집사는 여전히 서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의자 하나를 빼 줬다.

정말 이 꼴로 식탁에 앉아도 상관없나?

다들 내 옷차림 따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자, 되레 내가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난 포기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트레이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를 참기 힘들어진 이유도 있었다.

집사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레이트 홀에도 시종은 보이지 않았다.

“사용인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녜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데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랬다. 난 하루빨리 치료를 끝내고 이곳을 뜰 거니까. 이 나이 든 집사가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고 이 집을 떠나도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노집사가 내 테이블 위로 그릇을 올려뒀다.

백작가에선 구경도 못 해 본 뜨끈뜨끈한 수프였다. 고기가 어찌나 많은지 한 숟가락을 뜨자 몇 개가 한 번에 올라왔다.

잔뜩 허기진 배가 요동쳤다. 품위 없이 굴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입 가득 수프를 머금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이 세계에서 먹은 것 중 제일이었다.

내 처지를 잊을 정도였다. 나는 어느새 긴장을 풀고 몸을 만족스럽게 떨었다.

“디에고 백작가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홀의 적막을 깨부수며, 데반이 입을 열었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굉장한 부자라더군.”

사실이긴 했다. 백작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부호였으니까.

“그래서요?”

“대체 돈이 왜 필요한 거지?”

내가 제안했던 거래를 말하고 있었다.

저주를 해결해 주는 대신 이 제국을 뜰 돈과 지위를 달라는 그 거래.

“그건―”

“이 제국을 뜨고 싶다고.”

그는 내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데반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사람 진짜 눈 안 보이는 거 맞아?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거기다 그는 아까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은 채 능숙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펴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제 사정을 말씀드려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저주를 풀어 주고, 전하께선 저한테 돈을 주면 돼요. 그 정도 돈을 준비하는 건, 전하라면 간단하잖아요.”

꽤 건방진 내 말투에도 데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단지 내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네 사정을 내가 알 필요는 없지. 정말로 네가 저주를 풀 수 있다면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도에 퍼진 소문은 어떡할 거지?”

소문?

“막대한 신력을 가진 아이가, 디에고 백작가에 가더니 갑자기 힘을 못 쓴다던데.”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이 제국 전체에 돌고 있었다.

“그건…….”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실제로 8년 전 즈음부터 디에고 백작령에 드나들던 환자의 수가 뚝 끊겼다.”

난 입술을 까드득 물었다.

어쩐지 내 제안을 쉽게 수락한다 했더니, 어제 날 하루 종일 방에 가둬 둔 건 뒷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신력이 아닌 다른 힘으로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8년 전부터 디에고 백작령에 환자가 드나들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다만―”

급하게 말을 이었다.

“신력을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사용하지 않았던 거죠.”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건…….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다만 확실한 건, 제가 제 의지만으로 8년 동안이나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단 거예요. 만약 전하께서 어제처럼 절 방 안에 가둬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한다면…….”

“그럼 어쩔 테지?”

“제가 앞으로도 신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죠. 8년을 참았는데, 그 며칠이 힘들겠어요?”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협박한다면? 신력을 사용하도록 고문하고, 가둬 둔다면? 그렇다면 어떡할 거지?”

“시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눈이 있을 위치를.

감금, 협박, 고문……. 그 지하실을 견딘 나에게 그런 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든,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신력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반대로 제가 원한다면 저주를 고칠 수 있다는 소리고요.”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지.”

“전 단지 쉬운 길을 알려 주고 있는 거예요.”

“……그 거래를 말하는 건가?”

“맞아요. 저에게 필요한 건 그저 돈과 지위뿐이에요.”

데반이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무언가를 깊게 고심하는 것 같았고, 난 그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을 깬 건, 의외의 한마디였다.

“혼자 씻을 수 있나?”

“네?”

나는 황당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보다시피 여긴 사용인이 매우 적지. 네 목욕 시중을 봐줄 시녀도 없단 소리야.”

“……거래를 수락하겠다는 말인가요?”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욕실이 어딘지만 알려 주시면요.”

“그러지.”

데반이 다시 식기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천천히 포크를 들었다.

첫 번째 관문은 넘은 모양이었다.

*

식사가 끝나고 날 욕실로 데려다준 건 노집사였다.

이 큰 저택에서 정말 혼자 일하는 건가. 그런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집사가 옷가지를 건넸다.

“갈아입을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씻고 나오신 뒤 가운을 입고 계시면,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집사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사라졌다.

욕실의 풍경도 조금 전에 보았던 홀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난 옷을 벗어 벽에 걸어 뒀다.

알몸 위로 작은 노란색 목걸이가 반짝였다.

목걸이 끝에 달린 펜던트를 쥐고 딸깍― 뚜껑을 열었다. 납작한 동전 같던 펜던트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 담긴 액체를 뜨거운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 안에 한 방울 떨어트렸다.

순식간에 욕실에 데이지 꽃향기가 가득 찼다. 서둘러 욕조에 몸을 담갔다.

펜던트에 든 건 마법으로 농축한 데이지 꽃 추출액이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며칠간 향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질릴 것 같은 향기였지만, 혹시나 날아갈까 머리끝까지 물에 담갔다.

“푸하.”

숨이 막힐 때가 돼서야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조그만 펜던트를 손에 꼭 쥐었다.

킬리언에게 부탁해 구한 것이었다. 그날부터 하루도 내 몸에서 이 향기가 나지 않는 날은 없었다.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예언의 주인공이 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태양의 여신을 인장으로 가지고 있는 디에고 백작가의 사람일 것.

두 번째, 데이지 꽃향기가 날 것.

여주인공이라서인지 뭔지, 코델리아는 정말로 몸에서 데이지 꽃향기가 난다고 서술돼 있었다.

하지만 난 아니니까. 이 펜던트가, 코델리아를 대신하기 위한 내 두 번째 방법이었다.

다시 머리끝까지 잠수했다. 뜨거운 물이 몸을 감쌌고,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촤륵― 몸의 열기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찬 공기와 닿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백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상기됐다. 따뜻한 물을 만들어 내기 위한 마도구는 굉장히 비싸서, 지금껏 나에게 허락된 적 없었으니.

서둘러 벽에 걸어 둔 가운을 걸쳤다.

거울에 몸을 비춰 보는데, 벌어진 가운 사이로 멍 자국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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