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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5화 (5/123)

5화

모여 있던 영애들의 눈이 반짝였다.

“실은 제가 아직.”

“어머, 저도랍니다.”

“조금 느긋하게 정하려고 했는데.”

앞다투어 말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난 말갛게 미소 지었다.

그들 모두 노골적으로 킬리언을 원하고 있었다.

개중 가장 용기 있는 여자가 불쑥 나섰다.

“혹시…… 소백작님은 어떤 용모를 좋아하시나요?”

이 나이대 영애치고 꽤 당돌한 질문이었다. 줄곧 내게 머물러 있던 킬리언의 시선이 흘깃 그녀를 향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여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킬리언의 입이 열렸다.

“……그다지, 없습니다.”

영애들 사이를 은근히 맴돌던 긴장감이 맥 빠지듯 풀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잘 생각해 보시면 분명 있으실 거예요! 이를테면 짙은 머리 색이 좋은지, 옅은 머리 색이 좋은지 같은 것들이요!”

여자는 포기하지 못한 것 같았다.

킬리언은 다시 한번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가, 이번엔 내게 시선을 뒀다.

난 부러 찻잔을 들며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옅은 편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옅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영애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난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정말이지 맹목적인 남자였다.

만약 오늘 내가 머리를 새까맣게 물들이고 왔다면, 곧바로 짙은 색이 좋다고 했겠지.

옅은 갈색 머리칼을 한 여자가 꼭 발표라도 하듯 손을 들었다.

그러곤 거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 그렇다면 소백작님. 제 데, 데,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어요?”

체면치레가 중요한 귀족 영애가 하기엔 용감한 발언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은 이미 터질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킬리언은 대답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좋은 생각이네요, 오라버니.”

킬리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진의를 살피듯 날 바라봤다.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여전히 시선은 날 향한 채, 킬리언이 말했다.

손을 들었던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머지 여자들의 낯빛이 흐려졌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설탕을 넣은 차의 맛이 달았다.

모름지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가지는 법이었다.

*

“정말 괜찮겠어?”

내 뒤를 졸졸 쫓아오며 킬리언이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고, 그는 방까지 쫓아 들어왔다.

문을 닫고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뭐가.”

침대에 털썩 앉은 내가 싸늘하게 일갈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곤 구두를 한 짝씩 벗겼다.

“데뷔탕트. 너도 올해 치러야 하잖아. 파트너는? 혹시 다른 사람이 이미 있는 거야?”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곤 그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날 올려다봤다.

난 백작가에 갇혀 사교회에 오는 귀족 영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니 제도의 물건이나 소식도 킬리언을 통해 전달 받는 거였고. 파트너 같은 게 있을 리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건지 킬리언의 눈동자가 약간 떨렸다.

한쪽 다리를 꼬고 그를 내려다봤다.

“파트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데뷔탕트를 파트너도 없이 치를 수는―”

“그보다 내가 말했던 건?”

킬리언이 입을 꾹 다물곤, 제복 안쪽을 뒤적거렸다.

“어디에 필요한 건지 정말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줘.”

대답 대신 손을 내밀자, 그는 잠깐 한숨을 내뱉더니 노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내 손에 떨어트렸다.

저번 주에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확실한 거지?”

“……그래. 한 방울이면 돼.”

“수고했어.”

펜던트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 봤다. 확실한 것 같았다.

목걸이를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봐.”

“에블린, 데뷔탕트는…….”

“하아.”

들으라는 듯 커다랗게 한숨 쉬자, 그가 몸을 움찔했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 킬리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그의 목덜미를 확 껴안았다.

딱딱하게 경직된, 사내의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뱉어졌다.

표정 없이 눈을 감고 다섯을 셌다. 하나, 둘……. 이제 됐겠지.

다시 킬리언을 떼어 내고 환하게 웃었다. 무해한 여동생처럼.

“구해다 줘서 고마워, 오라버니.”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가 날 바라봤다.

“이제 가 봐. 쉬고 싶어, 정말로.”

“……그래.”

침대에 풀썩 드러눕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끈덕진 시선이 따라붙었다가, 곧 조용히 문이 닫혔다.

마침내 혼자 남은 방에서 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필요한 건 모두 얻었다.

데뷔탕트까지 세 달, 원작대로라면 데반은 그 전에 코델리아를 납치하려 할 것이다.

물론 이번에 납치당하는 건 내가 될 테고.

이제 남은 건 킬리언을 이용해, 그 전까지 백작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데뷔탕트 전까지만이라도 그가 날 지하실로 끌고 가지 않도록.

코델리아는 제 방 침대에서 자다가 납치당했다. 그러니 나도 그래야만 했다.

혹여라도 지하실에서 잠든다면, 10년간 준비해 온 일이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데뷔탕트를 거론하면 백작은 쉽게 설득당할 것이다. 여타 사교회와는 급이 달랐으니까.

데뷔탕트는 황족부터 고위 귀족 모두가 오는 자리였다. 혹여나 드레스 아래로 멍 자국이라도 보인다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데뷔탕트에서 만나게 될 ‘진짜 귀족’들은 넘어졌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으리라.

천장에선 태양의 여신이 날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디에고 백작가의 인장이었다.

절대 닿을 리 없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양의 여신이라…….”

뻗은 손을 그대로 주먹 쥐었다. 손톱이 아프게 살을 파고들었다.

막대한 신력을 가졌음에도,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했음에도 단 한 번도 신을 믿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살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백작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여신이 되어 줄 자신이 있었다.

*

데반 란티모스에게 저주를 풀어준다고 약속한 후, 난 꼬박 하루 동안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날 반기는 건 사자의 눈동자였다.

화살이 잔뜩 박혀 죽어 가는 사자는, 그런 것치곤 꽤나 생생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란티모스 대공가였다.

깊은 안도감이 몸에 퍼졌다. 꿈이 아니었다. 모든 게 내 계획대로였다.

지옥 같은 지하실도, 역겨운 백작도, 킬리언의 끈덕진 시선도 이곳엔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나저나 왜 아무도 안 오지?”

난 슬쩍 침대에서 일어났다.

뒷목을 강타했던 둔통은 가셨음에도 납치할 때 무슨 약을 쓴 건지 쉽게 잠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옷은 납치당할 때 그대로였다. 드레스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눈부신 햇빛이 들이닥쳤다.

설마하니,

“벌써 오후야?”

황당해서 난 작게 입을 벌렸다.

백작가에서도 이 시각까지 잔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아침이 되자마자 지하실로 끌려가야 했으니까.

그리고 보통 이 정도 되면 깨우지 않나?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내가 정상적인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알았다.

이건 날 무시하는 걸까, 혹은 배려하는 걸까.

배가 꼬르륵거리며 울렸다. 만 하루가 넘게 먹은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제 데반에게 말한 대로 일단 잤으니, 이번엔 씻을 차례였다. 밥은 그 다음이었고.

이 정도 허기는 익숙했다.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덜컹― 둔탁한 소리가 났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겼다고? 문고리를 몇 번 더 돌렸다. 주먹 쥔 손으로 세게 내리치기도 했다.

쾅, 쾅―

그럼에도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꿈뻑꿈뻑 떴다.

갇혔다. 방에 갇힌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두려웠다. 그 끔찍한 지하실에서 내가 어떻게 벗어났는데 다시 갇히다니?

크게 심호흡한 후, 다시 침대로 가 털썩 앉았다.

당황할 필요 없었다.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 데반의 입장에선 귀족 영애를 납치당한 상황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도망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제 발로 납치당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아무래도 어젯밤 내가 제안한 거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그에게 협력할 마음이 만만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했다.

어쨌든 그도 내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니 늦지 않게 찾아오겠지. 이런 방에서 굶어 죽는 걸 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복도에 인기척이 들렸다. 서둘러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좁은 문틈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누군지 모를 사람은 그대로 복도에 서 있었다.

망설이는 태도를 보아하니 데반은 아닌 것 같았고, 시종일지도 몰랐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침착하게 말을 내뱉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집사였다.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데반……. 그러니까 대공 전하는 어디에 계시죠?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노집사가 부드럽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죄송하지만 아가씨, 그건 불가합니다.”

“……왜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낱 집사인 제가 어찌 전하의 명령을 거역하겠습니까.”

그 말은, 역시 날 여기에 가둔 게 데반의 뜻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 명령이 달라질 거예요. 저랑 이야기를 조금 해 보면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집사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순간, 이대로 그를 밀치고 복도로 뛰어나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노인이라 한들, 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라 보통의 여자보다도 체력이 약했다.

거기다 괜히 데반을 도발할 필요는 없었다. 그랬다 괜히 의심만 북돋아 줄 수도 있었으니까.

고민하는 사이에 문이 천천히 닫혔다.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에 집사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이러나저러나 굉장히 정중한 사람인 건 틀림없었다.

“씻고 싶은데 그것도 힘들까요?”

“전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식사는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힘이 없어서 신력을 못 쓰면 어떡하죠? 그걸 바라진 않을 텐데요.”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고민하던 노집사가 다시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전하께 여쭤 보겠습니다.”

탁-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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