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킬리언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맹목적인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집에 입양됐을 때부터 그랬다.
그는 항상 나를 바라봤다.
제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라도 갈구하는 것처럼.
내가 신력을 거부했던 순간부터 그 눈빛은 더욱 심해졌다.
빤히 응시하자, 킬리언이 침대로 다가오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뭐 도울 일은 없나.”
하, 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고…… 말했잖아.”
잔뜩 쉬고 갈라진 내 목소리에 그가 움찔 떨었다.
“백작을 죽여.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항상 그러하듯, 그는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도울 일은, 없나.”
비겁한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매번 말해 왔는데.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차라리 묻지 않으면 희망도 품지 않을 것을.
“흐, 흐흐.”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킬리언이 이끌리듯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그의 은색 머리칼을 헤집었다.
제 아비와 똑 닮은 금색 눈동자가 날 올려다봤다. 그 안에 어렴풋하지만 분명한 욕망이 있었다.
도울 일이라. 이 어린 사내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 봤자 그도 작위 하나 받지 못한 미성년인 것은 같았다.
손을 조금 더 내려 킬리언의 볼을 쓸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네가 날 도와줄 수 있을 거야.”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먼저…….”
이어지는 속삭임을 들은 킬리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의도를 알 수 없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해 줄 수 있지, 오라버니?”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킬리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파스스한 은발이 내 어깻죽지에서 찰랑거렸다.
슬쩍 봤을 때, 그의 귓불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킬리언은 서둘러 나에게서 몸을 뗐다.
금세 딱딱해진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그가 말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백작가의 주치의였다.
노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킬리언과 날 번갈아 바라봤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가 아니라면 나에게 진찰은 허용되지 않았다.
백작이 알게 된다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오늘의 그는 내 반항에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치료해.”
“하, 하지만 소백작님…….”
노인은 안타까울 정도로 떨었다.
지금쯤이면 아까 그 시녀들이 백작에게 말을 전했을 거다. 그럼 곧 쳐들어오겠는데.
괜히 일이 더 커지는 건 사양이었다. 이 정도 상처를 입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난 됐어.”
“……치료.”
킬리언은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의사에게 명령하더니,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도,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백작이 오기 전까지, 밖을 지킬 모양이었다.
곧 얻어맞을 거면서. 바보 같은 놈.
난 그의 머리칼을 쓸었던 손을 꼭 쥐었다. 여전히 어깻죽지엔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내가 처음 지하실로 끌려갔을 때, 거기엔 이미 누군가가 당한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오기 전에는, 킬리언이 백작의 희생양이었으리라.
쿵쿵, 복도가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백작이 오는 소리였다.
늙은 의사는 벌벌 떨면서 내 팔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문밖으로 고함이 들렸다.
난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똑같은 내일이 올 것이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
마침내 열여덟, 원작에서 코델리아가 납치당하는 해이자 내가 10년 넘게 기다린 그 해가 찾아왔다.
3년 동안 변한 건 거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지하실을 방보다 자주 드나들었고, 백작은 나에게 충격을 줘야 한다며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킬리언과 나의 관계였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껴안은 그 날, 나는 킬리언에게 소문을 내라고 명령했다.
‘디에고 백작령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라는 내용으로.’
킬리언은 내 생각보다 명령을 잘 따랐다.
제도의 중앙 귀족들이 모두 수군거렸다. 모름지기 진실보단 듣고 싶은 사실이 더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실제로 시체가 있든 없든, 전염병이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작은 흉흉한 소문이 실체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그를 견제할 명분을 주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 절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날 이후로 지하실에 애꿎은 손님이 오는 일은 없었다.
지하실에 들어가는 건…… 나 하나로 족했다.
거기에 하나 더, 킬리언과 백작의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어느새 성년이 넘은 킬리언은 백작의 명령으로 황궁 근위대에 들어갔다.
남다른 덩치와 타고난 실력으로 그는 순식간에 차기 근위대장을 노릴 정도로 입지를 다졌다.
백작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갔고 킬리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여전히 킬리언은 백작을 두려워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이상 킬리언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덕분에 킬리언은 일주일에 한 번 사교회가 열리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와 나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부탁하거나 제도의 소식을 듣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에블린.”
근위대 제복도 벗지 못한 채로, 킬리언이 성큼성큼 홀로 들어왔다.
귀족 영애들만 잔뜩 모인 사교회였다. 내 또래의 여자들 사이에서 그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어머.”
“저분이 바로…….”
귀족 영애들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킬리언의 외모와, 몸, 성격, 그리고 그의 애인 유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만한 외모였다.
킬리언이 제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건 화려한 은발과 황금빛 눈동자뿐이었다.
난 가끔 그를 보면서, 오래전 죽었다는 그의 어미를 떠올려 보곤 했다. 분명 굉장한 미인이었으리라.
별다른 무늬 없는 새까만 제복도 그가 입으면 화려하게 치장한 연회복 같았고, 외모와 달리 항상 무뚝뚝한 표정 역시 그의 매력에 단단히 한몫했다.
가끔 훈련을 마치고 오느라 가벼운 튜닉 차림일 때면 주위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고, 검이라도 휘두를 때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 그런 그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마나 잘생겼건 나와는 관련 없었다.
나에게 그는 그저 디에고 백작의 아들, 피가 안 섞인 명목상의 오라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이런 자리에서 그걸 겉으로 티 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영애들의 시선이 나에게 오기 전, 꾸며 낸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오라버니?”
킬리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건 일종의 쇼였다. 디에고 백작이 만들어 둔 이미지를 굳건하게 하는 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제복을 만지작거렸다.
“옷은 갈아입고 오시지. 바쁘신가요?”
“……조금 바쁘네. 알다시피 황태녀 전하께서 워낙 원정이 잦으셔서.”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화려한 내 차림 때문이었다.
난 쇄골과 어깨가 모두 드러나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백작이 나에게 값비싼 드레스를 입힐 리 없었으니 따지자면 싸구려에 가까운 원단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싸구려에 마음이 동하는 법이었다.
킬리언은 날 내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목덜미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어서 앉으세요, 오라버니. 차가 식겠어요.”
“……그래.”
그는 익숙하게 내 의자를 빼 주곤, 내가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그 후엔 내 잔에 차를 따르고 다과를 내 쪽으로 밀었다.
꼭 숙련된 집사 같은 그의 동작에 영애들이 한 번 더 술렁였다.
이런 점 또한 그의 매력을 끌어올려 주는 요소 중 하나였다.
피도 안 섞인 동생에게도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자신의 것이 되면 어떨까, 모든 여인들이 기대할 만했다.
킬리언은 심지어, 내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손으로 떼더니 자연스럽게 제 입에 넣기도 했다.
“어머.”
차마 주체하지 못한 건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쪽으로 시선이 쏠리자 마침 잘됐다는 듯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백작가의 사교회에 종종 찾아왔던 세실이었다.
“정말, 볼 때마다 두 분의 우애가 너무 좋아서 부러울 지경이에요. 레이디 에블린.”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라는 문장이 숨어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부채를 손에 말고 웃는 모습에, 나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가요? 저도 어떤 분이 제 오라버니를 데려가실지 벌써부터 부럽네요.”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 드나들던 귀족 영애들은 그 무엇보다 권력에 예민했다. 킬리언과 내 관계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꼭 이 자리에서 혼처를 정하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턱을 치켜들고 그들을 한 바퀴 돌아봤다.
그 중 한 영애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역시 소백작님은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으셨나요?”
“예, 일이 바빠서요. 아버지가 아직 신경을 못 쓰시는 것 같아요. 이젠 곧 가야 할 텐데 말이에요.”
스윽, 부러 킬리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러고 보니 곧 데뷔탕트네요. 영애들 중에 파트너를 정하지 못하신 분이 계실까요?”
이 세계에선 열여덟 살이 되면 데뷔탕트를 치러야 했다.
이렇게 또래 영애들끼리 각자의 집에 모여 하는 장난 같은 사교회가 아닌, 진정한 사교계로의 데뷔를 알리는 행사였다.
그러니 이 자리의 영애들 대부분이 올해 데뷔탕트를 치를 것이다.
순식간에 그녀들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