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전생에 내가 읽은 소설 <태양의 여신>의 줄거리는 이랬다.
막대한 신력을 가진 여자, 코델리아는 신전과 백작가에서 이용당하다가 흑막 대공 데반에게 납치당한다.
데반은 그녀에게 자신의 저주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그의 저주를 풀어 주고, 그는 그녀를 위해 백작과 신전에게 대신 복수한다.
그렇게 서로를 구원한 둘이 사랑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니 예언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코델리아였다.
난 그런 코델리아의 자리를 슬쩍 차지하려고 하는 거고.
억울하지 않은가. 누가 지껄인지도 모르는 말 한 마디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산다니.
물론 정말로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흑막 대공이라는 자와 결혼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니었다.
원작과 똑같이 행동하는 건, 열여덟이 되는 해에 날 납치하는 것까지만이다.
원작대로 납치당하고, 원작대로 저주를 풀어준다. 그러나 내가 요구할 건 복수가 아니라 이 나라를 뜰 수 있을만한 돈과 지위였다.
신전도 백작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복수를 할 시간에 차라리 멀리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영영 이 빌어먹을 소설이 내게 부여한 역할과도 안녕하는 거다.
“으으…….”
몸을 뒤척일 때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여기저기가 쑤셨다.
양심에 걸리긴 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내년에 이 집에서 죽어 사라져야, 코델리아가 입양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신력을 쓰지 않고 버틴다면 디에고 백작가는 신전의 신뢰를 잃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백작가가 다른 아이를 또 입양한다고 하면 거절할 게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신력을 쓰지 않기를 결심한 이상, 코델리아가 이곳에 입양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예언도 바뀌려나. 앞으로의 이야기도 뒤틀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주인공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남자 주인공인 데반은 너에게 넘겨줄게, 코델리아. 그런 다짐을 하면서.
*
내가 열다섯까지도 신력을 쓰지 않자, 디에고 백작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다.
“깨갱!”
강아지 한 마리를 인질이랍시고 데려온 것이다.
“잡아.”
백작의 한마디에 옆에 있던 시종들이 재빨리 내 고개를 붙잡았다.
그러곤 백작의 손에 들린 강아지와 그 옆에 목줄로 묶인 어미 개를 바라보게 했다.
“자아.”
꼭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시작하듯, 백작이 입가를 축였다.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네가 신력을 쓰지 않으면 이 강아지는 죽는다.”
안 돼.
앙다문 잇새로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백작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동안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내가 반응을 보이는 게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컹컹!”
강아지의 어미, 커다란 개가 날카롭게 울었다.
불과 며칠 전 새끼를 낳아 홀쭉해진 배가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백작이 강아지를 인질로 데려온 건 저 어미 때문이었다.
어미는 백작가 근처를 떠도는 개였다.
그리고 내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좋든 싫든 지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게 꽉 막힌 지하실에는 밖과 이어지는 구멍이 딱 하나 있었는데, 납작 엎드려야만 볼 수 있는 아주 낮은 창문이었다.
그것도 철창으로 막혀 있어 고작 손을 넣고 뺄 수 있는 게 다였다.
침수를 막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 같았고, 그것의 존재를 아는 자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내 눈에는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미 개는 종종 그 구멍으로 다가왔다.
백작도 시종도 모두 나가고, 혼자 남은 내가 서늘한 바닥에 몸을 부비며 고통을 참아 내고 있을 때.
그 개는 꼭 모든 상황을 아는 것처럼, 짖지도 않고 구멍에 납작 엎드린 채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동그란 까만 눈과 손을 뻗어 가까스로 닿았던 촉촉한 코의 감촉 따위가 생생히 떠올랐다.
“듣자 하니 네가 아끼는 개라지?”
백작의 눈동자가 악랄하게 빛났다.
종종, 식사를 숨겨다가 구멍 틈으로 조금씩 던져 준 적이 있었다. 특히나 개가 임신을 한 후에는 자주 그랬다.
누군가 그걸 보고 백작에게 고한 게 틀림없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목에 핏대가 섰다.
어느새 떠돌이 개는 백작이 아닌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평온했던 그 새까만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가 신력만 사용한다면 바로 풀어 줄 텐데. 물론 어미도 함께.”
백작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백작을 빤히 노려봤다.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나는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신력을 썼다. 그 동그랗고 까만 눈과 마주치자마자, 신력을 폭발하듯 발산했다.
백작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는 아무래도 제가 한 짓 덕에 막혀 있던 내 신력이 다시 뚫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백작은 내 신력이 모두 바닥났다거나, 내가 일부러 신력을 쓰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이런 짓을 견디면서까지 신력을 일부러 감출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는 충격을 줘야만 신력이 뚫린다는 바보 같은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시종들이 뒷마당을 깊게 파는 것을 목격했다.
신력을 사용하면 강아지를 온전히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강아지를 살려 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 후로 나는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세 마리의 강아지를 잃었다. 백작은 마지막 남은 강아지 한 마리마저 인질로 잡아왔다.
내가 또 신력을 쓴다 해도, 어차피 강아지는 죽겠지.
차라리 처음부터 신력을 쓰지 않았다면. 백작이 이런 같잖은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엔 금세 포기하더니, 이제 이 정도로는 신력을 쓰지 않겠다는 거냐, 응?”
백작이 내 턱을 들고 눈을 맞춰 왔다. 광기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내 고개를 강제로 돌려 떠돌이 개와 눈을 맞추게 했다.
“너 때문에 새끼를 셋이나 잃은 어미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보지?”
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네가 감히…….”
백작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씨근댔다.
“컹! 컹컹!”
그 순간, 백작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는 떠돌이 개의 새까만 동공이 보였다.
어떠한 원망도 느껴지지 않는 맹목적인 동공이.
개는 백작을 향해 짖고 있었다. 나에게서 손을 떼라는 듯,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듯.
나를 구하려고 하고 있었다. 제 아이도 살리지 못한 나를.
입 안 여린 살을 꼭 깨물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 자격이 없어서 그랬으리라.
*
그날 나는 끝까지 신력을 쓰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면 좋으련만, 어쩌면 계속될지도 몰랐다.
원래도 그랬지만 백작의 광기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디서 또 새로운 수를 가지고 와도 이상하지 않다.
차라리 처음 입양됐을 때부터 신력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백작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심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파양을 당했을지언정, 아무런 죄 없는 강아지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가 죽는 건 내가 됐을지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신력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미 원작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순탄한 해피엔딩을 맞이했을 코델리아의 인생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 나는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살아남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로 물러나선 안됐다.
무슨 짓을 해도 신력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내가 신력을 자의로 사용할 수 없다고, 백작이 믿게 해야 했다.
몸이 아래로 축 처졌다.
양옆에서 내 팔을 붙잡은 시녀들이 귀찮아하는 기색이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느껴졌다.
어느새 2층 복도였다. 2층엔 내 방이 있었다.
잠이 홀딱 깰 만큼 차가운 물이겠지만, 그래도 곧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 후엔 잠들 수 있겠지. 그리고 내일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돌연 시녀들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난 떠지지 않는 눈을 가물가물 떴다.
복도에 서 있는 커다란 형상이 보였다.
저 덩치에 갑옷을 입은 걸 보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킬리언이었다.
“……내가 데리고 가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하나, 목욕 시중이 필요한지라.”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다. 내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소백작 각하.”
시녀들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곤 어느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빌어먹을 오라버니란 작자에게 날 맡겼다.
그는 날 쉽게 들어 안았다. 갑작스럽게 몸이 붕 뜨자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시녀들이 당황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킬리언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방으로 의사를 보내라.”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익숙하게 내 방문을 연 그는 침대 위에 날 조심스럽게 눕혔다.
오늘따라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침대에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데,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역겨워.
이 집안은 애비고 자식이고, 어쩜 이렇게 역겨운 짓만 하는지.
억지로 눈을 떴다.
킬리언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맹목적인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