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철컥― 침실 문이 닫혔다.
“후.”
난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손바닥을 이불에 슥슥 문질러 땀을 닦았다.
아무리 당당한 척을 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이 제국 최고의 흑막으로 소문난 란티모스 대공이 아니던가.
거기다 마지막 말은 또 어떻고. 거짓말을 했다간 날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으로밖에 안 들렸다.
하지만 그래도 난 성공했다.
계획대로 납치됐고, 제안도 받아들여졌다. 이제 눈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이 제국을 뜰 날만 남았다.
난 주먹을 꼭 쥐고, 내 신력을 가늠했다. 문제없다.
그간 어떤 핍박에도 신력을 쓰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주먹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지난 10년간 겪은 학대와 수모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전도 백작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으리라.
나는 천장에 새겨진 사자를 결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곳이 진정한 새 출발의 발판이 돼 줄 것이다.
*
“도대체 왜! 왜 신력을 못 쓴다는 거야, 왜!”
디에고 백작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난 팔다리가 의자에 고정된 채,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쓸모없는 계집.”
백작이 쾅, 발을 굴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오랜 경험으로, 이럴 때는 찍소리도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작은 빤히 날 바라보다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뒤에다 대고 시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백작님!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약 먹여!”
“하, 하지만 이 이상 먹이면 신력이…….”
기어들어 가는 시종의 목소리에 백작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곤 쾅― 문을 닫고 지하실을 나갔다.
이제 지하실에는 두 명의 시종과 나뿐이었다.
시종 하나가 망설이다, 물약을 손에 들고 다가왔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나……날 원망하지 마. 난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야.”
저런 말을 하면 죄책감이 좀 덜어지나?
난 무심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그의 손에서 낚아채듯 물약을 가져왔다.
어딘가 탁하고 수상해 보이는 액체를 빤히 바라보다, 한 번 한숨 쉬곤 그대로 들이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으로 차가운 액체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했다.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신력이 빠르게 팽창했다.
두근, 두근.
애초에 난 신력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쓰지 않는 거니, 이런 약 따윈 하나도 소용이 없는데.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몸 안에 담기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신력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었다.
*
이 세계가 내가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 세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후로 나는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큰 공을 들였다.
분명 소장본까지 샀던 책이니, 줄거리는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런데도 난 ‘에블린 디에고’란 이름을 그 책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왜일까?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역시 모든 게 내 착각이나 망상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건 내가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책에 스쳐 지나가듯 서술된 엑스트라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엑스트라라니. 그 수많은 엑스트라 중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주인공 코델리아는,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신전 산하의 고아원에서 자란 자였다. 그리고 디에고 백작에게 입양됐다.
어딘가 익숙했다. 그래, 지금 내 상황과 똑같았다.
막대한 신력도, 신전에서 자란 것도, 디에고 백작에게 입양된 것까지.
그렇다고 내가 여주인공인 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녀처럼 허리께에서 고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이나 아름다운 진녹빛 눈동자를 가지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그녀가 백작가에 입양된 건 열세 살이 되는 해였다. 일곱 살에 입양된 나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왜 다른 상황이 똑같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코델리아보다 먼저 디에고에게 입양됐다가, 신력을 이리저리 이용당하고 죽어 버리는 엑스트라.
진짜 여주인공이 입양되기 전, 실험체처럼 쓰이고 버려진 바로 그 엑스트라.
똑같은 조건에서 태어났음에도, 여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 반대의 삶을 살다가는 엑스트라.
……그게 바로 나였구나.
내 역할을 깨닫자마자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신력이 떨어져서 죽은 사람은 이제껏 없었는데?
나는 순간 벼락같이 깨달았다.
신력이 떨어져서 죽은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였다.
막대한 신력을 가진 자가 한계에 도달한 후에도 신력을 사용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필요했던 거다.
디에고 백작과 신관들이 코델리아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이용하게 만들기 위한 쿠션 역할로.
허탈함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 역할이 고작 그 정도라니.
하지만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코델리아가 입양된 건 열세 살이고 나와 그녀는 동갑이라는 설정이었으니,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열세 살이 되기 전에 난 죽을 운명이었다.
똑같은 조건에서 태어났는데 한 명은 학대만 받다가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죽어버리고, 다른 한 명은 남주인공을 만나 해피엔딩이라니.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난 열 살 이후로 아예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모진 매질을 당하고, 신력을 방출하지 않으면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약을 먹여도.
……죽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이봐.”
상념을 깨우듯, 시종 하나가 날 툭툭 쳤다. 가물가물 눈을 떴다.
“이만 일어나. 나갈 시간이다.”
덜컹― 지하실 문이 열리고, 시녀 둘이 다가왔다. 두려움과 혐오가 섞인 얼굴이었다.
그녀들은 쓰러진 나를 양옆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핏 내 옷에 묻은 오물을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고 겨우겨우 계단을 올랐다.
곧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거리는 황금이 주위에 널려 있는, 디에고 백작가였다.
시녀들은 날 질질 끌고 욕실로 갔다.
몸이 아프도록 박박 씻기고,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옷을 입혀 줬다. 향유를 바르고 오랜 손질이 이어지자 푸석하던 머리칼은 어느새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빤히 거울을 바라봤다.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마른 것만 제외하면, 거울 속 여자는 미인이라고 말하기 부족함이 없었다.
약간의 연둣빛이 섞인 레몬색 머리칼은 가슴께에서 찰랑거렸고, 금빛 반점이 별처럼 흩뿌려진 파란 눈동자는 황금빛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처럼 반짝거렸다.
아마 나이를 좀 먹으면 더 괜찮지 않을까.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야. 난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걸 어쩐담.”
시녀가 한숨을 쉬며 날 바라봤다.
정확히는 내 뺨에 난 기다란 상처를.
디에고 백작이 뺨을 때릴 때, 그의 검지에 끼워진 커다란 반지 때문에 난 상처였다.
백작 영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처기도 했다.
“……넘어졌다고 하면 돼.”
“칠칠맞지 못하게!”
시녀는 인상을 구겼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고용인인지 알 수 없는 대화였다.
“뭐, 다른 방법이 없으니.”
결국 난 볼에 생채기를 지닌 채 홀로 나갔다.
홀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들이 가득했다. 개중 하나가 날 알아보곤 미소 지었다.
“레이디 에블린!”
나도 겨우 입꼬리를 올려 빳빳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반가워요. 레이디 세실.”
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이 사교회의 호스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내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물론 나는 전혀 알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사교회였지만.
디에고 백작은 겉으로 보이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사교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를 넘긴 후부터,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사교회를 열어 날 참석시켰다. 그때만큼은 난 완벽한 귀족 영애의 모습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분에 못 이겨 상처를 내는 일도 있었다.
“어머. 볼에 상처는 뭐예요, 레이디 에블린?”
그럴 때마다 변명은 내 몫이었다.
“제가 칠칠치 못하게 그만 넘어져 버렸네요.”
“저런.”
영애들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넘어진다고 이런 상처가 날 리가 없는데. 귀하게 커서 그런가 참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하긴, 모두 열다섯도 되지 않는 아이들이니까.
지친 표정으로 겨우 앉아 있는데, 시선 끝에 디에고 백작의 보좌관이 걸렸다.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어색함을 보였다간, 오늘 저녁이 순탄치 않으리라. 대신 제대로 끝낸다면, 저녁엔 푹 쉴 수 있겠지.
*
내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사교회를 굉장히 자연스럽고 훌륭하게 마쳤음에도 저녁은 순탄치 않았다.
보통은 하루에 한 번이었는데, 오늘은 저녁까지 매질을 당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 백작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나는 방에 누워 아픈 몸을 겨우 뒤척거렸다. 그나마 지하실이 아니라 방에 데려다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 그래 봐야 황궁에 불려 갔다가 다른 귀족들에게 망신이나 당했겠지.
그가 나에게 신력을 쓰라고 윽박지르는 이유는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돈이 가장 큰 이유긴 했지만, 그에 더해 사교계에서 공공연하게 도는 소문 때문이기도 했다.
‘막대한 신력을 가진 아이가, 디에고 백작가에 가더니 갑자기 힘을 못 쓴다.’
귀족들은 디에고 백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훈육에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날 걱정하는 건 아니었고, 백작가의 평판을 떨어트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신력을 사용하지 않은 지 어느새 2년째였다.
사실 백작은 내가 처음 신력을 사용하지 않은 열 살 무렵부터 날 파양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열 살이 넘은 아이는 절대로 파양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었다.
그러니까, 일곱 살에 모든 걸 깨달은 내가 열 살까지 고분고분 숨죽이고 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파양은 절대 안 됐다. 어쨌든 난 디에고 백작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가문의 인장이.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데반 란티모스, 그를 향한 예언 속 인물이 나인 척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납치당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