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
1화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군가가 내 몸을 짐짝이라도 된 듯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털썩―
다음 순간 난 바닥에 처박히듯 내려졌다.
바닥엔 융단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막 기절했다 깬 탓에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백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백작은 항상 제 재력을 과시하고자 바닥에 화려하고 푹신한 융단을 깔아 두곤 했으니까.
“이자가 확실한가?”
머리 위에서 서릿발같이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합니다. 말씀하신 가문에 젊은 여자라곤 이자밖에 없었습니다.”
“그런가.”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제야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됐다.
오늘이었다. 10년도 넘게 고대해 왔던 그 날이.
“흐음.”
서서히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어느새 사내는 내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부여잡았다. 품평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목구비가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내는 검은 천을 눈가리개처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보이는 게 없을 텐데, 꼭 나를 꿰뚫어 보는 서늘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거 놔!”
고개를 내저어 그의 손을 털어 냈다. 손목이 뒤로 묶여 있었기에 별수 없었다.
“……귀찮게 구는군.”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그 빛이 사내의 옆얼굴을 비췄다.
나도 모르게 숨을 날카롭게 들이켰다.
칠흑같은 밤하늘과 꼭 닮은 색의 머리카락은 약간의 빛도 삼킬 수 없다는 듯 달빛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콧대를 횡으로 가르듯, 눈을 가린 검은 천이 그를 금욕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매끄럽게 솟아 있는 콧대와 약간의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또한 그를 야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너무나 위험한 미모였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빠져들 것 같았다.
그가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
“데이지 꽃향기는 확실한데.”
목울대가 아름답게 움직였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더 올라갔다.
그것만으로 순식간에 인상이 뒤바뀌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미소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는 다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일단 가둬 놔. 확인은 내일 하지.”
그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일자로 뻗은 긴 다리 위로 넓은 어깨가 보였다.
그 위로 걸쳐진 망토에 익숙한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사자 한 마리가 수많은 화살에 박혀 있는 그림.
확실했다. 내가 찾던 사람이 맞았다.
데반 란티모스.
그는 저주에 걸려 눈이 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잠깐만―”
다급하게 입을 떼려던 차였다.
퍽―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뒤에 날 납치해온 자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목 뒤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지독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가 전생에서 내가 읽었던 소설이라는 걸 정확히 깨달은 건, 태어난 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나, 신전 산하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 덕에 나를 입양하겠다는 귀족들이 줄을 섰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서는 신력이 곧 돈이었다.
신력은 고칠 수 없는 병을 치료하고, 풀 수 없는 저주를 풀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신력으로는 세상에 못 고칠 병도, 못 풀 저주도 없었다.
신전은 한 졸부 백작가에 날 입양시키기로 결정했다.
힘이 없으니 언제든 저들이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고, 돈이 많으니 신전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리라.
“그래, 그래. 네가 에블린이구나.”
디에고 백작은 배가 불룩이 튀어나온, 탐욕스러운 자였다. 얼굴은 기름기로 번들거렸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값비싼 황금 거위라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앞으로 함께 살 자식이 아닌 돈줄로 바라보는 그 더러운 표정을 보면서도 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드디어 미음과 풀만 먹는 신전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매일 아침 찬물로 목욕하고 회초리를 맞아 가며 성서를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도 더는…….
“어이구, 예쁘기도 하지.”
백작이 나를 붕 들어 올리더니, 뽀뽀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나는 슬쩍 손으로 얼굴을 밀었다. 손바닥에 개기름이 묻은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허허허. 그래그래. 내가 이제부터 네 아빠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돈에 눈이 멀어 내 표정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됐다. 어차피 이 돼지의 집에서 어떻게 구르게 되든 신전에서 혹사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신력은 무한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한한 것도 아니었지만 회복은 가능했다.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진 그랬다.
사용하는 속도가 회복되는 속도를 뛰어넘는 순간, 신력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신전은 그걸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되든 쉬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게 시켰다.
때문에 신전에서 혹사당하는 동안 내 신력은 점점 더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자, 얼른 가서 아빠랑 오빠랑 놀자.”
응?
다정한 척 날 껴안은 디에고 백작의 뒤로 익숙한 인장이 새겨진 마차가 보였다.
태양의 한가운데에 여신의 얼굴이 그려진 인장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백작은 신관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금세 마차에 올라탔다. 혹시라도 입양이 취소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마차에 타자마자, 날 옆에 앉혀 두곤 한숨 쉬었다.
“자, 잘 먹고 잘 살고 싶으면 신전에서처럼 계속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알았지?”
우악스럽게 내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백작의 손에도 같은 인장이 새겨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덥석― 나는 그의 통통한 손가락을 가져가 자세히 살펴봤다. 뭘 착각한 건지 그가 만족스럽게 허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래도 전생이었던 것 같은데.
헉, 나는 통통한 백작의 손을 툭― 떨어트렸다.
기억났다. 이 무늬는 분명 전생에서 내가 보던 소설의 표지였다.
너무 좋아해서 소장본 종이책까지 샀던 바로 그 로맨스판타지 소설.
*
정신이 돌아오자 얻어맞았던 뒤통수부터 아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화살이 잔뜩 박힌 사자가 그려진 낯선 천장이었다.
이 인장은 2권 표지였지.
1권 표지는 여주인공인 코델리아가 자란 디에고 백작 가문의 인장.
2권 표지는 남주인공인 데반의 가문, 란티모스의 인장이었다.
그리고 3권은…… 뭐였더라.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오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내심 아니길 바랐는데.
이 세계는 내가 보던 소설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여기가 란티모스가라는 건 확실했다. 사자 인장이 천장에 떡하니 박혀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내가 알기로 그는 제국 제일가는 부자였는데, 그에 비해 침실은 소박했다. 아니, 정확히는 깔끔했다.
화려한 금붙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가구들은 결이 좋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겉으로만 번쩍거리는 디에고 백작가와 다분히 비교되는 방이었다.
뭐 훔쳐 갈 만한 건 없나.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난 재빨리 눈을 감았다.
성큼성큼, 누군가 내 침대 가까이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숨을 참은 채, 난 혹시라도 침을 꼴깍 삼키진 않을까 걱정했다.
“깬 거 다 아는데.”
그러나 갑작스럽게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쉽게 잊을 수 없는 목소리라 그런가, 고작 한 번 들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였다. 데반 란티모스.
“흐음.”
침대 한쪽이 풀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스윽,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얽혀 오더니 고개를 내려 속삭였다.
“어디서 읽었는데…….”
그가 내 손톱을 매만졌다.
“손톱을 뽑는 게, 인간이 겪는 고통 중 제일 심하다고 하더군.”
뭐?
“너무 아프면 기절한 사람도 깨지 않을까, 응?”
지독히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검지 손톱에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눈을 뜬 뒤에도 손톱을 꾹꾹 누르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이거 좀 놔 봐요.”
손에 힘을 줘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꺼운 뼈마디가 손가락을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응? 왜? 자고 있는 거 아니었나?”
그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미친놈인가?
“아프다고요!”
빽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데반이 손을 놓아줬다.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아픈 손톱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슬쩍 그를 훔쳐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전날에 느꼈던 감상은 착각이 아니었다. 검은 천이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는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여자 주인공의 것이 될 거라는 게 아까울 정도로.
저 안대 뒤에는 어떤 눈이 있을까. 그의 눈동자는 무슨 색일까.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대에 가려져 시선을 느낄 수 없었음에도 꼭 모든 게 낱낱이 까발려지는 느낌이었다.
그 눈이 어떻든 눈동자가 무슨 색이든, 날 노려보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해 보였다.
잘못 걸린 건 아니겠지. 분명 계획대로 그에게 잡혀 온 것임에도 어딘가 등골이 서늘했다.
“내가 무섭나?”
그가 시선을 느낀 듯 말했다.
“그렇다고 하면 돌려보내 주실 건가요?”
“설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웃음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예언을 하나 들었는데, 네가 내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더군.”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들은 예언은 정확히 이랬다.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그러니까 그 예언은, 태양의 여신을 인장으로 가지고 있는 디에고 백작가의 어린 여식 중 데이지 꽃향기가 나는 사람을 찾으란 소리였다.
“고칠 수 있나?”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약간 긴장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긴, 몇 년을 찾아다니던 사람을 겨우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내 신력이라면 이 정도 저주를 푸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기다리던 답이었을 텐데 그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 이 사람은 눈이 안 보이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고칠 수 있어요.”
순간 데반의 손이 움찔 떨렸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이번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납치된 주제에 당당히 조건을 제시하니 황당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거래가 실패한다면 내 지난 10년은 무용지물이 된다.
“……뭐지?”
“이 제국을 떠나서 살 수 있는 돈이 필요해요. 적당한 지위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
“뭐?”
그는 의중을 가늠하듯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봐야 보이는 건 없을 텐데. 아니,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뭔가가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떨리는 손을 꼭 쥐고, 난 일부러 더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저주를 고치는 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치료는 하루에 한 번만. 그 이상은 못 해 줘요.”
이건 내 신력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하.”
황당한 웃음을 내뱉은 데반이 턱을 약간 들어 올렸다.
“내 여신님이 이렇게 계산적인지는 몰랐군.”
여신님이라니.
그는 예언을 지칭한 거겠지만, 어쩐지 내 얼굴은 약간 달아올랐다.
보통 남자에게 이런 대사를 들었다면 부끄럽긴커녕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을 테다. 하지만 얼굴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아무튼 좋아. 그럼 치료는…….”
“오늘은 안 돼요. 전 납치됐어요. 일단 좀 자고, 씻고, 밥부터 먹어야겠어요. 준비해 줘요.”
속사포로 말을 마치곤, 그만 가 보라는 뜻으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볼 수는 없어도 이만하면 느껴지겠지.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데반은 황당한 눈치였다.
그는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방을 나서기 직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거짓말을 굉장히 싫어해. 네가 오래 살아 있길 기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