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8장. 고언(3)
‘이를 악물고 버텨?’
김현재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고언을 하겠다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저지르라는 장태산 회장.
그의 눈빛을 보아 농담일 리 만무하다.
술이 한 잔 돌았지만 의미 없는 말들이 오갈 상황은 아니다.
그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
첫 번째 만남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는 당시 김현재를 충격에 빠트리게 했다.
나이보다 더 한참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진 장태산.
그러나 대화가 길어질수록 젊은 외모와 달리 해박하고 깊은 그의 식견과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길 없었다.
그 자리에서도 배운 게 무척 많았다.
AI부터 시작해 4차와 5차 산업 혁명까지 국가 경제가 나아갈 청사진을 미리 본 듯 놀라웠다.
강력한 이유는 강력한 행동을 불러온다는 그의 충언은 아직도 가슴에서 진동하고 있다.
요근래 장태산만큼 김현재를 감동 시킨 인물이 없다.
장태산 덕분에 여러 방면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김현재를 두고 대통령이 될 것이라 감히 예언했다.
그의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머리에 되새겼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때를 기다리며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어온 대한민국의 폭풍.
주순자의 비리가 씨앗이 되어 결국 초특급 태풍을 키웠다.
조근영 대통령에 대한 탄핵 문제가 며칠 사이로 결정될 것이다.
국회에서 통과되면 헌재에서 각하될 일은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일개 사이비에 불과한 여자의 주문대로 움직였다는 일국의 대통령은 세계 지도자들을 통틀어도 없다.
조선시대 궁중 야사에서나 존재할 법한 대사건 이 시대에 벌어졌다.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은 세계 언론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심히 부끄러웠다.
한민족 조상들이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국격이 한순간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독재자의 딸.
정작 그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국민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라는 기본 정서가 아예 세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앞에 서서 이끌고 가야 할 우매한 대중으로만 여겼다.
어린 시절 독재 권력자인 부친에게 학습받은 결과였다.
김현재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오지 않을 좋을 기회였다.
대선뿐만 아니라 총선까지 승기를 잡을 수 있다면 대한민국을 밑바닥부터 개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감히 국민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수면 아래에 숨겨진 엄청난 종류의 카르텔.
법조계, 언론계, 정치계부터 시작해 공무원 사회까지 썩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그 한 발자국 나가기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기득권을 점한 자들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짓눌렀다.
솔직히 두려움이 없지 않다.
아끼는 친구가 그런 그들과 맞서다 허무히 산화했다.
그 역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국민들을 향해 경각심을 남겼다.
살신성인의 길.
김현재도 그 길 위에 설 준비를 했다.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이깟 몸뚱이 하나 던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런 김현재를 향해 장태산이 버티라고 말했다.
말을 전하는 장태산의 눈빛은 몹시 슬퍼 보였다.
마치 김현재에게 닥칠 미래를 알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뼈가 있는 고언 같습니다.”
김현재가 조용히 물었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장태산과 마주하는 일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감해 온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통사고로 아웅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들었던 구원의 목소리가 장태산의 목소리와 많이 비슷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느낌이 그랬다.
그래서 더 이번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마음 한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태산은 생각처럼 무척 바빴다.
해외에 체류하는 기간도 길었고 가뜩이나 일절 연락을 받지 않았다.
가까이 두게 된 양우석 의원을 통해 그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몇 차례 부탁했다.
그렇게 이뤄진 만남이다.
그는 200년 묵은 산삼을 준비해 두고 김현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 역시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두 번째 고언은 절대 사람을 보고 실망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고언하는 장태산.
지금 그가 건넨 말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 말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겪었던 인간에 대한 실망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실망했다.
믿었던 민주화를 함께했던 동지들의 배반은 더욱 충격이었다.
사실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진실로 믿었던 이들마저 뒤에서 칼을 꽂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다.
“부모님과 반려 빼고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설사 그게 형제와 자식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번에는 분명하게 고언이 맞다.
성년이 된 자식들은 더 이상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들도 각자의 욕망과 삶을 대하는 데 있어 매일 계산하며 살고 있다.
부모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다 해도 그건 부모의 일이고 부모의 선택일 뿐이다.
똑같은 모습으로 살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먼저 간 친구도 가족들과 조력자들로 인해 고통받았다.
누구보다 청렴하고 소박했던 친구였음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통제할 수 없었다.
주변인들의 욕심이 빚은 결과에 대해 무척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유난히 진보에 대해 더욱 엄격한 잣대를 댔다.
칼날 같은 시선과 잣대에 도리어 그나마 인간적이고 쓸만한 이들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김현재 주변에 더욱 인재가 부족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다.
만회할 기회를 한 번은 줬어도 되는 인재들이 많았다.
그래서 더 김현재는 괴로웠다.
그의 눈에는 고쳐 쓰고 기회를 주어도 될 만한 이들이 정작 가장 가까운 정치 동반자들의 비난과 힐책에 먼저 포기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오늘 전하는 장태산의 고언들은 이전 만남에서와 달리 설명이 부족했다.
그래도 김현재는 충분히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고언은…….”
***
- 인간들은 참 괴롭게 삽니다. 우리 드래곤들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샨트리아가 김현재와의 대화를 쉽게 동감하지 못했다.
가진 바 능력이 슈퍼 깡패니 당연히 누구를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드래곤과 다르다.
약하기에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람은 서로 기대어 성장하며 공생하는 인간 생명체다.
“…….”
잠시간 침묵이 돌았다.
이율배반적인 고언들이 섞여 무질서하게 전해졌다.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저지르라 조언하면서 또 버티되 다른 이들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이해력이 부족하면 골치 아픈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김현재 대표는 말하는 바를 잘 알아들었다.
인생 평지풍파 한두 해 겪는 것도 아닐 터였다.
믿었던 선배와 친구, 후배들의 배신을 한두 번 겪어 보았겠는가.
지금 당장 아직도 빨갱이들을 타도하라며 여당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동지들도 많다.
같이 날밤을 세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동지들의 배신은 더 뼈아플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스스로도 끓어오르는 욕망과 결국 선택해야 하는 일에 대한 갈림길에서 갈등하는데 타인들의 의중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 고언도 부탁드립니다.”
김현재 대표의 표정이 담백해졌다.
내가 던졌던 말들을 모두 소화해낸 듯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미래를 겪고 왔다.
김현재 대표가 임명했던 고위 공직자들 상당수가 임명자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쳤다.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시키고 공직자로 임명했던 수많은 인사들.
임명장을 전달할 때마다 굳은 의지를 담아 악수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김현재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 역시 모두가 자신 같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대한민국 개혁을 위해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었을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썩은 물이 가득한 곳에서 고르고 골라 임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 역시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고 그들의 본색이 밝혀졌다.
그중에서 법조계 카르텔이 가장 추악했다.
검찰 출신들이야 그 이전에도 위세가 대단했고 악명이 높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과거부터 나이가 어려도 영감님이라 불리며 가장 강한 권력을 누렸던 이들이었다.
욕망의 집합체라 말할 정도였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법관들.
청렴함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법관들이 가장 문제가 됐다.
아집과 오만과 편견이 가히 상상을 뛰어넘었다.
겉으로는 없는 자들을 위해 법을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조직에 담 담은 채 연륜이 쌓이며 더욱 강력한 기득권이 되었고 처음 품었던 순수한 마음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았다.
선량한 소시민이었던 대통령의 약점을 제대로 잡았다.
임기가 보장된 것을 악용해 집단의 힘을 이용해 임명권자의 뒤통수를 쳤다.
당시 김현재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임에도 침묵했다.
그 괴로움의 무게는 감히 지금도 상상하기가 힘들다.
- ……비장합니다. 이게 인간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삶의 묘미군요. 유희는 겉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샨트리아가 방안에 깃든 기운을 흠뻑 느꼈다.
비장함이 맞을 것이다.
오늘 이후 난 절대 김현재 대표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과 달의 길은 다르다.
“대표님.”
김현재를 가만히 불렀다.
“네.”
파밧.
김현재와 눈빛이 부딪쳤다.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샛별 같은 그의 눈빛.
울컥 심장이 또 저려왔다.
앞으로 다가올 그가 견뎌야 할 고난의 시간들.
“……시 좋아하십니까?”
“???”
뜬금없이 시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가 샛별 같은 눈을 깜박인다.
“……좋아합니다.”
쉴 때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로 유명한 김현재 대표다.
“최근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여류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언급하는 시는 시가 아니라는 걸 이미 김현재는 눈치챘다.
“제목은…….”
김현재 대표와 양우석 의원이 동시에 내 입을 바라봤다.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