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6장. 고언
“사무실에 그대로 있다고?”
- 들어간 후 나오지 않았습니다.
“확실해? 다른 차량을 이용할 수도 있잖아.”
- 다각도로 확인했습니다. 포섭한 직원을 통해 움직임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흐음…….”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마음이 언짢았다.
오른팔인 보좌관도 모르는 비밀 정보라인과 통화 중이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조직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일본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연이 되어 온 라인이다.
정치적으로 승기를 잡아 온 여러 선거도 그들의 도움을 받은 덕이다.
이미지 관리뿐만 아니라 중앙 일간지 기자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도 큰 힘이 됐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거래된 돈으로 자금도 불렸다.
아쉬운 것 없이 경제적으로 충분히 여유로웠다.
그만큼의 자금을 쥐고 있어 파벌을 운영하는 데도 용이했다.
여러 경로로 수집한 비밀 정보를 통해 흠결이 있는 많은 의원들을 어렵지 않게 포섭했다.
그중에는 여당 의원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결코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게 관리해 온 덕에 여야를 막론하고 큰 힘이 되는 조력자가 많았다.
최근에는 유력한 야권 대권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모든 일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진행시켰다.
조근영의 탄핵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다.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비밀 조직의 힘은 그만큼 엄청났다.
김현재에 대한 테러도 비밀 조직에서 도움을 주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에 관련한 모든 과정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김현재는 빈틈이 별로 없다.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고 쓸 만한 정보를 캐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잘한 부스러기 종류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남자 유권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군경력부터 가정문제, 부동산 투기 등 어느 하나도 그에게 시빗거리로 엮을 게 없다.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임에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정치 자금도 어느 정치인보다 자유로웠다.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인정할 만큼 깨끗하기로 손에 꼽혔다.
‘장태산이 아니란 말인가?’
보좌관을 통해 양우석과 김현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장태산이다.
비밀 조직을 가동해 정보를 수집했었다.
다행히 장태산에 대해 비밀 조직에서도 웬만한 정보를 수집해 두고 있었다.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장태산이 양우석 의원과 접촉할 것을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왜 이렇게 찝찝해?’
남자는 불안한 듯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복잡한 머릿속만큼 소란스러운 여의도의 퇴근길 거리.
의원실 너머로 차량들의 불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느리게 흘러갔다.
“계속 지켜봐.”
- 넵!
통화를 마쳤다.
“장태산이 아니면 도대체 누굴 만나러 간 거야?”
별 볼 일 없던 양우석이 장태산과 엮이면서 지역구 강자로 떠올랐다.
양우석은 대권주자급까지는 아니었지만 3선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벌을 형성했다.
강단과 소신 있는 의원들이 양우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양우석은 어느 정도 능력은 있지만 한계가 명확한 인재다.
그의 뒤에서 양우석을 조종하는 자가 장태산이라는 건 남자도 감으로 직감했다.
수십 년 동안 큰 무리 없이 정치판에서 생존했다.
그것도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야당 쪽에서 말이다.
비밀 조직의 울타리 덕분에 버텨올 수 있었지만 절대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남자만이 갖고 있는 정치적 감각과 수완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뛰어났다.
그런 남자가 몹시 껄끄러워하고 있는 인물이 장태산이다.
게다가 장태산에 관련해서 비밀 조직에서도 주의를 주고 있었다.
최대한 친밀한 관계가 되라는 주문이 왔다.
“그룹 회장들도 아니고 정치판 인사도 아닌데…… 누굴까……. 누구.”
남자는 몇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모든 정황을 파악한 후 관련된 일을 손안에 넣고 완벽한 시니리오를 써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남자의 성격이다.
그러나 오늘은 연이어 수에 당했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김현재 당신은 어차피 내가 깔아놓은 장기판의 말에 지나지 않아. 흐흐흐.”
김현재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천천히 포섭해 나가고 있다.
김현재는 국민들이 선택할 만한 이상적 정치인이 맞지만 그의 주변에는 쓸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뒤를 살피며 조력자들로 쓸만한 인재들을 하나둘씩 김현재 주변에 심었다.
지금뿐만 아니라 차기 대선까지 염두한 설계다.
하늘이 허락해야 한다는 일국의 지도자 자리의 주인.
한 번도 밝힌 적 없지만 남자의 꿈 역시 어릴 적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향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한 번은 앉고 싶은 정치인의 끝판왕 자리.
몇 년 정도의 기다림은 그의 긴 정치 인생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
“이거…… 뇌물 아니죠?”
대접을 받아들며 김현재 대표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청백리의 표본으로 삼을 만큼 뇌물에 엄격한 양반이 이분이다.
친구였던 주무형 대통령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해 국정원과 검찰, 언론들의 장난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다 보니 백숙에 든 산삼이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대표님. 변호사시니까 뇌물죄 구성 요건 아시죠?”
“…….”
“형법 제129조 1항.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2항.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될 자가 그 담당할 직무에 관하여 청탁을 받고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후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김현재 대표가 가만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현재 국회의원이 아닌 당의 상임고문이시니 공무원이나 중재인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저는 대가를 바랄 것도 아니고 청탁을 요구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냥 몸에 좋은 무라고 생각하시고 드시면 됩니다.”
“무요?”
“삼도 무과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냥 200년 묵은 무라고 생각하십시오. 입에 넣고 씹으신 뒤 화장실 가시면 다 거름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벼운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진실한 이에게 거짓을 종용하거나 해로운 걸 먹이면 나도 벌 받는다.
마음이 편해야 음식도 독이 되지 않는다.
“조상님들이 주신 귀한 무입니다. 드십시오.”
“…….”
김현재 대표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전 무로 알고 먹겠습니다.”
양우석 의원이 분위기를 타고 호탕하게 웃었다.
“드십시오. 오늘 이후로 제가 대표님과 독대하거나 통화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진심이다.
사방에 감시자가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적들이 많다는 걸 잘 안다.
본토왜구의 지령을 받은 토착왜구와 독재정권과 불의한 기득권자들의 마수가 어디서 뻗어올지 몰랐다.
지금도 내 주변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게 빤했다.
그래서 기습적으로 오늘 같은 약속을 잡았다.
양우석 의원에게도 미리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빈틈이 적지 않은 양우석 의원의 차량을 위성으로 관찰했다.
일부러 시골길을 우회해 이곳에 오도록 만들었다.
나 역시 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유세라 상무를 통해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명했다.
나의 숨은 능력을 이용해 창문을 통해 빠져나와 날아서 이곳에 왔다.
샨트리아 덕분에 시간도 단축됐다.
그야말로 은밀한 접선인 셈이다.
방갈로도 차명으로 예약했다.
백숙 맛집이지만 11월 평일 늦은 밤에 이곳까지 식사하러 올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밀 계좌로 술값까지 선입금했다.
주인에게도 신신당부해 떨어진 이곳 방갈로까지 올 사람은 아예 없다.
“……알겠습니다. 귀한 무. 잘 먹겠습니다.”
김현재 대표가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산삼 삼계탕 한 번 먹이기 참 힘들다.
“일단 국물 한 번 마시고 닭다리 드십시오.”
토종닭은 보기에도 아주 실했다.
큼지막한 닭다리를 김현재 대표와 양우석 의원의 대접에 각각 담았다.
“회장님이 닭다리 드십시오.”
양우석 의원이 그릇을 양보하려 했다.
“그동안 전 쭉 먹었습니다. 걱정 말고 드십시오.”
“그럼…….”
후르르르륵.
침을 삼키던 양우석 의원이 바로 대접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크으!”
꿀꺽꿀꺽 마시더니 대접을 내려놓고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죽입니다! 태어나 이런 백숙은 처음 먹어 봅니다.”
어떤 황제나 왕도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500년 묵은 산삼은 과거에도 구하기 힘들었다.
한 뿌리도 아니고 무려 세 뿌리다.
진하게 우려낸 산삼 국물과 토종닭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 잔치를 벌였다.
맛이 없으면 그게 이상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국물을 가볍게 한 번 마셔보고 김현재 대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잔 받으십시오.”
소주병을 들었다.
소탈한 사람이다 보니 양주나 와인보다 소주를 더 좋아할 것 같아 준비했다.
“감사합니다.”
연장자임에도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또로로록.
잔을 채웠다.
“의원님은 운전하셔야 하니 콜라 드십시오.”
“안주도 좋은데…… 참 아쉽습니다.”
양우석 의원도 내로라하는 주당이다.
좋은 안주에 소주가 빠지니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다.
“다음에 장주시에서 날 잡죠.”
“알겠습니다! 오늘은 사이다로 대신하겠습니다.”
양우석 의원에게는 사이다를 권했다.
“장 회장님은 드셔도 됩니까?”
“네.”
내 음주비행을 단속할 만한 존재는 지구에 없다.
“그럼.”
이번에는 김현재 대표가 술병을 잡았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또로로록.
맑은 소주가 잔에 채워졌다.
“대표님 한 말씀 하시죠.”
“……귀한 인연을 위하여.”
팅.
짧은 건배사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꿀꺽.
고개를 살짝 돌려 잔을 단숨에 비웠다.
“…….”
소리 없이 세 사람 모두 잔을 비웠다.
“드십시오.”
일단 식사가 중요했다.
농담이 아니라 오늘 이후 김현재 대표를 이렇게 사적으로 마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앞으로 그 역시 나를 만날 시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폭풍처럼 불어닥칠 대한민국의 여러 사건들.
최병박과 조근영이 사방에 싸지른 똥을 치우는 일에도 5년이란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대통령제의 폐해다.
완벽한 민주 국가 시스템도 대통령 한 명 잘못 뽑으면 10년 이상 퇴행하는 건 일도 아니다.
윗물이 흐려지면 아랫물들도 함께 오염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고위 공무원들이 썩어 버리면 공무원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오염원이 흘러들어 엉망이 돼 버린다.
“잘 먹겠습니다!”
양우석 의원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손을 뻗어 닭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식에 들어갔다.
“……꿀꺽. 이거…… 육질이 예술입니다. 살에 배어 있는 무향이 기가 막힙니다!”
살점을 씹으며 양우석 의원은 연속 감탄을 터트렸다.
후르르륵.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식사가 이어졌다.
“더 드십시오.”
마지막 국물까지 퍼서 두 사람을 먹였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우직한 소처럼 멍에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
두 사람은 전혀 모르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잘 먹었습니다.”
평소 소식을 한다던 김현재 대표가 깔끔하게 대접을 비웠다.
200년 무도 사라지고 없다.
“진짜 맛있었습니다!”
양우석 의원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회장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 자리는 김현재 대표가 원해서 만들어졌다.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나이도 한참 어린 제가 조언을 드릴 게 있을까요?”
“대단한 분이신 걸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과감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결의에 찬 모습으로 조언을 구하는 김현재.
“정 그러시다면…… 뼈 아픈 고언 몇 말씀 올리겠습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