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4장. 모두 다 희극
“어디를 갔다고?”
“……양우석 의원님과 사라졌습니다.”
“오늘 경남 시도당 위원들 만나는 날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 못 했습니다.”
“파악을 못 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국회의원 회관.
다선이나 중진들을 위해 배정된 신관 의원실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중년 남자의 눈썹이 험상궂게 휘어졌다.
평소 언론에 내비치던 모습과 사뭇 다른 얼굴이다.
싸늘한 냉기가 눈빛에 감돌았다.
“죄, 죄송합니다.”
보좌관의 허리가 단번에 90도로 꺾였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감정적으로 몹시 차가운 남자였다.
10년 이상 곁에서 보좌해온 보좌관은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확실히 하라고 했지? 이래서 어떻게 큰일을 도모하겠어!”
“…….”
남자는 오늘따라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보좌관은 다른 날보다 더 숨을 죽였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쪽에 붙여 놓은 애들도 있잖아.”
“양우석 의원의 차를 타고 바로 빠져나갔습니다.”
“운전기사나 보좌관들도 없이?”
“네.”
“……그렇단 말이지…….”
남자가 두 손 모아 깍지를 꼈다.
고민할 때 나오는 그 만의 버릇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양우석하고 둘이 어디를 갔다는 말이야?’
생각지 못한 상황이 고민스러웠다.
선뜻 답이 될 만한 모양새가 잡히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불어닥쳤던 주순자발 폭풍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급기야 꿈쩍도 하지 않던 여당 의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칫 시민 혁명에 휩싸이기라도 하는 순간 그들 스스로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론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기득권들을 위한 정책을 펼친 대가였다.
청와대 신문고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최병박 때는 겉으로 시늉이라도 했지만 조근영은 처음부터 아예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형 언론사도 용비어천가만 불러댔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진 주순자 사건.
권력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모습을 봐버린 대한민국 시민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폭풍의 방향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국정원을 이용할까요?”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다.
“미쳤어? 물에 빠진 국정원 놈들이 도리어 역으로 이용하면 우리 엿 되는 거야.”
“생각이 짧았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해.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아…….”
남자는 특유의 동물적인 정치 감각 덕에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정치바닥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국회의원은 물론 지방선거에서 오래도록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양우석 의원 보좌관들과 친분을 더 쌓아놔.”
“넵!”
“그리고 비밀리에 준비시켰던 정책추진단도 스톱시켜.”
“스톱씩이나 말입니까?”
“……판이 제대로 깔릴 것 같지 않아.”
남자는 지금 돌아가는 판도를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쉽습니다. 이번 판은 누가 봐도 먹는 판인데…….”
보좌관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여당은 이번 대선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질 게 확실했다.
국민들의 분노가 그만큼 극에 달했다.
“틀려.”
“네?”
“여론이라는 건 말이야 충분히 뒤집힐 수 있어. 적당한 수준의 재료에 자극적인 맛을 내는 재료를 추가하면 우매한 민중들은 금방 흔들려. 그러다 빵! 하고 큰 거 하나 던지면…… 다 끝나. 특히 작금의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는 여론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아무리 분노해도 막상 투표할 때는 관성의 법칙을 따르게 돼 있거든.”
“관성의 법칙요?”
“최병박을 찍었던 손이 김현재를 찍었을 것 같아?”
“아!”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들은 조근영을 찍었어. 국정원 여론 조작은 누가 봐도 아는 진실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무시했잖아. 그럴싸한 명분만 제시하면 자신의 신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려. 그래서…… 이 나라는 안 되는 거야. 멍청한 놈들이 자존심까지 쎄거든. 크크크.”
비열한 웃음이 남자의 입에 걸렸다.
국민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정했다.
“지금은 조근영에 대한 분노가 크지만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기는 싫을 거야. 한마디로 김현재가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렇게 크지 않아.”
“그래도 조근영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각종 여론 조사에서도 김현재 대표를 비롯해 야당 주자들에 대한 지지율이 높게 나왔고 말입니다.”
“허수야.”
“허수요?”
“내가 예상하건대…… 잘해야 40%로 살짝 넘는 지지율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
“네? 40%요???”
보좌관이 그의 예측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김현재 후보는 누가 봐도 6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IMF를 당하고도 박빙의 승부로 정권을 잡았어. 최병박의 매국에도 야당은 밀렸어. 그게 정치 현실이야.”
“맞습니다.”
보좌관이 남자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드러난 수치는 정확했다.
“드러나지 않은 표심이 최소 20%를 좌우해. 세상에는 똑똑한 척하지만 생각 없이 사는 인간들이 많아. 중간자라고 불리는 부동층. 그들을 움직여야 대권을 움켜쥘 수 있는 거야.”
“그렇군요…….”
“김현재는 인간적으로 상당히 매력 있어. 하지만 그게 한계야. 너무 착한 인간은 정치판하고 어울리지 않아.”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시면…….”
“일단 숨죽여야 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손이 존재하는 게 확실해. 김현재가 병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그 손과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 손이라면…….”
“깊이 알려고 하지 마……. 생각보다 무섭고 강한 놈이야.”
누군가를 염두해 말을 잇는 남자.
그의 눈동자가 사특함으로 번득였다.
***
“통화 가능해.”
- 와아아아아! 진짜 목소리 한 번 듣는 거 어려운 거 알지?
다분히 투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다.
- 뭡니까? 이번에도 여자???
샨트리아가 서둘러 묻는다.
이 정도 되면 말해 봐야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 어디야?
“사무실.”
- 한국에 언제 왔어?
“오늘.”
- 그래도 다행이네. 내일 통화했음 확 삐쳤을 거야.
“바쁜 거 아냐?”
- 나도 사람이야. 퇴근 후에는 재충전해야지.
“오늘은 약속 있어. 내일 만나.”
토라진 척하지만 대범한 여자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룹 오너가의 핏줄다운 면모다.
- 내가 한가한 줄 알아?
살짝 튕겼다.
“제발 만나줘. 보고 싶었어.”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흐흐흐.
단박에 기분이 풀렸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 몇 마디로 생길 뻔한 서운함도 사라졌다.
- 이게…… 진짜 기술이군요.
샨트리아가 경탄을 터트렸다.
“점심 먹자.”
- 좋아! 앞뒤로 빵빵하게 2시간씩 도합 4시간 비워둘게.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준 인연.
그녀와의 추억도 적지 않다.
- 부모님께 연락했어?
“……아니.”
- 에휴. 이래서 자식 낳으면 다 소용없다고 하나 봐. 가끔 안부 인사 드릴 때마다 걱정이 크셔. 빨리 전화해!
“어…….”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에 조신하게 대답했다.
- 내일 맛집은 내가 예약할게.
“기대할게.”
- 보고 싶어……. 사랑해.
띠릭.
부드러운 속삭임 뒤에 통화는 짧게 끝났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른 듯했다.
- 반전에 반전입니다……. 하아아. 여자의 마음이 이렇게 복잡하다니…….
추궁했다가 사랑한다는 말로 통화를 끝내자 샨트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 물러나라! 물러나라!
- 방 빼! 방 빼!!!
그 와중에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거대한 함성.
- 저런다고 왕이 내려옵니까?
“아마도.”
- 후훗. 이 동네 재밌는 곳입니다. 마나도 쥐꼬리만 하고 오염도 됐는데 인간들 각성 수준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처럼.
샨트리아는 제법 똑똑했다.
하나만 보고도 몇 가지나 추리해 내는 수준이 가히 놀랍다.
“때로는 너무 똑똑해 도리어 문제가 되기도 해.”
- 네?
“……인생은 직접 살아봐야 그 진한 맛을 아는데……. 다들 넘쳐나는 정보에 지레짐작하고 아는 척하거든. 타인의 인생을 자기 인생처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말이야.”
-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려운 거 아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난 뒤 몸소 깨달은 진실만 진짜라는 뜻이다.
거짓 정보와 거짓 진리가 넘치는 세상.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전진하면 된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는 대전제 하에 짜여 있는 판 위에 살고 있다.
그 위에서 어느 순간이든 조연이 아닌 주인공으로 살면 된다.
도시 옥탑방의 월세 세입자여도 당당하다면 강남 파워팰리스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행복할 수 있다.
타인의 것을 욕심내지 않고 내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인생을 개척해 나감에 주저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비극이 아니라……
모두 다 희극일 뿐이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