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9장. 공항의 그녀
“부회장님……. 사건이 커질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말입니까?”
“민주연대를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에서 고발장을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검찰 수사가 깊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못 막아요?”
“……정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을 비롯해 검찰 쪽에서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묻잖아요. 못 막느냐고요!”
“……죄송합니다.”
오정 그룹 부회장실.
임성철 회장이 와병 중인 관계로 지금 현재까지 부회장이 전권을 행사 하고 있다.
가문에서 발생했던 작은 다툼들은 정리됐다.
온전히 임준형을 중심으로 힘이 집중됐다.
오정 그룹 계열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부회장의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우려했던 사건이 점점 커졌다.
주순자와 관련한 사건의 여파가 오정까지 영향이 미쳤다.
시민들이 들고 나온 촛불로 인해 검찰은 물론 사법부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자칫 민중혁명으로 의해 정권이 뒤집어질 수도 있는 상태다.
“하아……. 정말 밥값 못 하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임준형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과거 아버지도 뇌물죄로 수감된 적 있다.
그 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이후 상당한 노력을 들여 장학생들을 키워왔다.
검찰과 법원, 언론과 고위 관료들 중 상당수가 암암리에 오정의 입김 영향을 받았다.
장학생들끼리 어려운 순간이면 서로 밀어주고 당기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했다.
지금 직면한 문제는 임준형이 온전히 그들 장학생들을 지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룹 2인자라 할 만했던 장한수 실장과 너무 일찍 척을 진 게 문제였다.
장한수 실장의 이탈과 함께 상당수 장학생 라인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위기가 닥치니 그들의 부재가 남긴 문제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자 가장 먼저 장학생들이 등을 돌렸다.
주순자의 말대로 따랐다가 사달이 났다.
당시 비서실에서 극구 말렸지만 섣부른 판단에 오정의 힘을 믿고 밀어붙였다.
그때 선택한 일에 대한 대가가 너무 컸다.
푼돈이나 진배없는 그깟 몇백억에 임준형의 이름이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주순자를 통한 뇌물뿐만 아니라 과거 승계 작업 중에 건드렸던 계열사 주식 교환까지 일파만파 커졌다.
얼렁뚱땅 대충 눈 감아 주고 넘어가던 시절이 아주 지나 버렸다.
특히 시민단체들 쪽이 똑똑해졌다.
게다가 SNS를 통해 정보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정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터넷 신문사가 앞장서고 그들을 중심으로 일이 확대되고 있었다.
급기야 별 관심 없던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졌다.
덩달아 여론이 안 좋아지고 있다.
방패막이가 돼 줘야 할 권력층 기반이 흔들리자 주변 모든 게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아버지만 계셨어도…….’
임준형은 최대한 본인 선에서 막아보려고 노력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부회장 자리를 꿰차고 권력을 잡자 그 말뜻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안 되는 일이 없었다.
하물며 대권주자들도 그의 전화 한 통에 몸을 낮추고 굽신거렸다.
총리와도 심심치 않게 통화하는 사이가 됐다.
당연히 고위 법관들과의 사적인 만남은 물론 비즈니스 골프 모임도 가졌다.
문제는 평소 맺어왔던 관계의 기류와 다르다는 것.
평소 듣기 좋은 말들로 알랑방귀를 뀌던 놈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조용해졌다.
먼저 연락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건재하게 이 자리를 지켰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담배.”
임준형이 편하게 말을 놓았다.
가식을 벗어버린 모습이었다.
“넵!”
딸깍.
측근 오광연이 담배를 건네고 곧바로 라이터를 켰다.
평소에는 담배를 멀리하지만 심사가 복잡할 때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는 임준형.
사태가 흘러가는 모양새가 괴로운 건 오광연도 마찬가지다.
오정 비서실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 될 거라 굳게 믿었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자리는 아무나 유지하는 게 아니었다.
사업 부문이나 정치, 언론, 문화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자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삐끗삐끗하는 소리가 들렸다.
첫째는 언론사들이 그간과 달리 말을 듣지 않았다.
국민들의 타오르는 분노를 분산시키기 위해 그 한복판에 오정까지 끌어들였다.
“장태산이 뭐 해?”
“해외에 체류 중입니다.”
“어디?”
“러시아에 있습니다.”
“뭐 하는데?”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들어 실망이야.”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오광연을 향해 연기를 내뱉는 임준형.
그가 무척 화가 났다는 간접표현이다.
“…….”
이럴 때는 죄송하다는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알아봐. 그리고…… 시간 잡아.”
“넵!”
“나가.”
“쉬십시오.”
오광연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장태산이 조심하라고 했지……. 그 새끼 무당이라도 되는 거야?”
언젠가 장태산이 자신을 향해 주순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장태산이 오정의 보이지 않는 대주주가 되었지만 자존심이 그에게 허리 숙이는 것까지는 용납하지 못했다.
“……젠장.”
임준형이 끓어오르는 짜증을 내뱉었다.
총선은 몰라도 대선은 지금 현 여당 쪽에서 잡는 게 비즈니스 면에서 상대하기 편하다.
말 많은 시민단체에 휘둘리지 않는 여당.
법무부 장관과 검찰 쪽만 꽉 잡아도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언론이야 지금처럼 자금을 풀어 관리하면 간단하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있어 편하지 않지만 어차피 뇌물은 비밀리에 전달되니 큰 문제는 없었다.
대신 문제는.
“차기 대선주자 중에 누굴 밀어야 해…….”
골치가 아파 왔다.
비서실에서는 조기 대선이 실시될 거라고 예상했다.
설마 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현재까지는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지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민중의 힘은 무서울 수밖에 없다.
여론이 형성되면 정치인들 누구나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장태산. 너라면 알겠지. 너라면…….”
임준형은 암암리에 장태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그가 무심하게 툭툭 던졌던 모든 말들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비유와 은유가 적절히 섞여 있었던 그의 말을 임준형은 분명 알아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장태산이 필요한 때.
“후우우우.”
임준형은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았다.
아직도 무릎 꿇기 싫은 자존심.
임준형에게 깊은 번뇌가 몰려왔다.
***
- 비……결이 뭡니까!
말했잖아.
비결 같은 게 딱히 없는 게 비결이라고.
- 아닙니다! 전 봤습니다. 형님이 여자 후리는 솜씨는…… 역대급입니다!
자존심도 사라진 드래곤 의념체 샨트리아.
형님이라는 말을 잘도 남발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여자 후리는 비법을 물었다.
알려줄 수 없다.
농담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 중 하나일 뿐이다.
돌아가면 전문가 소개시켜 줄게.
- 형님만 한 분이 또 있습니까? 나타샤를 굴복시킬 남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저도 제법 유희를 즐겼지만 진심으로 인간 여자의 사랑을 받아본 것은 드뭅니다. 그것도 여황제라니…… 형님은 진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아부성 발언인 줄은 알지만 듣기 좋다.
몸에 안 좋지만 시원해서 찾게 되는 콜라와 사이다 같은 느낌이다.
지금이 딱 그렇다는 말이다.
그그그그그그극.
자가용 비행기가 착륙했다.
예린 선배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돌아오는 한국행.
대낮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 그런데…… 이 비행기라는 비행체 마음에 듭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와이번보다 빠르고 조용합니다.
자못 샨트리아는 어떤 면에서 아이 같다.
과학 문명의 이기를 샅샅이 살피며 감탄하기를 여러 번.
아직 문명 탐험은 시작도 안 했다.
-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의외로 레드 드래곤이 겸손하기까지 하다.
- 레드 일족 알려진 것보다 착합니다. 무식한 살육자라는 소문은 다 편견입니다.
그런 분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어요?
- ……피에 각인된 숙명일 뿐입니다. 오래 사는 게 생각보다 좋은 일이 아닙니다.
드래곤도 치매에 걸리나?
- 네…….
“…….”
드래곤들이 가진 그러나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하나 알아 버렸다.
딸깍.
“보스. 준비됐습니다.”
자가용 비행기 내에 탑승했던 스튜어디스 두 명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금발 미녀들도 영업용 미소를 지을 줄 안다.
스윽.
팁을 건넸다.
미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표.
“감사합니다.”
미소가 진해졌다.
- 종이 따위를 받고 왜 저렇게 좋아라 하죠? 마법 아이템입니까?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샨트리아의 의문에 답하지 않은 채 김포 공항에 내렸다.
가져온 물건 같은 건 없다.
여행은 언제나 가볍게 다녀야 한다.
여권 한 장 들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대낮임에도 공항은 분주했다.
제주와 가까운 해외여행이 인기를 끌었다.
VIP 전용 출구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 ……현란합니다! 비싼 마법 영상구가 이렇게 많다니! 저보다 더 부자인 것 같습니다!
공항 곳곳에 설치된 영상 광고물과 대형 TV를 보며 샨트리아가 감탄을 터트렸다.
집집마다 비싼 영상장치가 한 대 이상씩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더 놀랄까?
- 진짜요?
샨트리아가 놀라서 묻는다.
이계 촌놈 드래곤 같으니라고.
피식 웃으며 출구 쪽으로 걸었다.
그때.
“태산 오빠?”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