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5장. 그깟 양보
지금 이게 무슨…… 장면이야?
정신이 멍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 순간 나타샤가 먼저 모든 상황을 지배해 버렸다.
갑자기 되지도 않게 언니라고 부르며 아린을 끌고 사라졌다.
침을 뱉지 않겠다는 엄청난 말을 내뱉고서 말이다.
- ……대, 대박! 나타샤 진짜 무섭다!
알파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흉포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마족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인 것이다.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나타샤가 진짜 괴물이라는 것을.
-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타샤 무섭다고 말입니다!
샨트리아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 나타샤는 베르니체를 쏙 빼닮았습니다. 오래 묵은 남성체 드래곤들 털어먹는 일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당했으면서 누구도 베르니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지극한 기술의 경지입니다!
샨트리아가 흥분했다.
인정이다.
지구에 살면서 워낙 막장 드라마를 많이 봐 내성이 생겼음에도 충격이 적잖이 컸다.
이 정도 반전은 역대급 수준이다.
나타샤는 내가 상대할 레벨이 아닌 것을 인정한다.
아린도 마찬가지다.
- 이러다 제국을 삼키고 황제되는 거 아냐? 남자 첩들 몇 명씩 거느린 파멸의 여황제 말이야.
파멸의 여황제?
알파닥이 나타샤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듣기만 해도 부르르 몸이 떨렸다.
드래곤을 제외하고 나타샤를 막을 존재는 없다.
이 정도면 엘프들도 드래고니아를 두려워할 것이다.
- 전 죽이자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말 하기 쪽팔리지만…… 제가 레어를 버리고 도망쳐 나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일찍도 알려준다!
레드 드래곤도 도망쳤을 만큼 기술이 뛰어난 나타샤.
“호호호호. 언니! 여기 너무 경치가 좋아. 같이 살아도 되는 거지?”
“어? 어어…….”
밑에서 들려오는 사악한 나타샤의 목소리와 비교되는 아린의 순진무구한 음성.
“하아아……. 내가 지금 잘하는 거 맞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 아니! 오빠신 완전 똥 밟았어!
- 똥은 아니고 독을 밟았습니다.
양쪽에서 들려오는 똥과 독.
그래 나 똥독 밟았다!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사건은 터졌고 남은 건 현명한 수습뿐이다.
- 수습이 되려나 몰라? 흐흐흐.
- 꿀에 훈제한 오우거 홍두깨살 찍어 먹는 맛입니다.
관전자들은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들과 상관없다는 듯 막말을 내뱉는다.
그 점에서 둘이 죽이 잘 맞는다.
입에 침 튀기며 싸울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무식한 드래곤과 마족 소녀.
거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드래고니아 나타샤까지 합류했다.
골치 아프지 않는다 말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 오빠신 인상 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알파닥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맞는 말이다.
나타샤의 등장은 예상 못 했지만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득이 더 많다.
그녀가 소유한 엄청난 드래곤 보물들은 제국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나타샤의 8서클 마법 실력도 마찬가지다.
빙긋.
그렇게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말했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고.
- 어? 그 말 우리 엄마가 자주 하던 건데?
알파닥이 아는 체했다.
- 베르니체도 말했습니다. 진짜 남자는 여자 주머니를 털어먹을 수 있는 능력자라고 말입니다.
샨트리아……. 그건 바람둥이 제비들한테나 해당하는 말이야!
난 여자 등쳐먹는 그런…….
- 딱 어울리네! 나타샤 보물 털어먹으려는 이계 제비 오빠신!
“…….”
알파닥의 말에 입이 다물어졌다.
- 우리 솔직하게 살자. 흐흐흐.
음흉하게 웃는 알파닥.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을 뱉지 않는다고 했지만 시한폭탄이나 매한가지인 나타샤.
알파닥이 했던 말이 재차 떠올랐다.
아린을 암살하고 황제가 되는 파멸의 드래고니아!
향기는 달달하지만 독을 품은 독사과 같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아린을 지켜야 하는 순수한 황실수호공작.
- 공작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돈 많은 실력 좋은 드래고니아를 첩으로……. 흐흐흐.
샨트리아! 닥쳐!
나 그렇게 인생 막사는…….
- 그래서 나타샤 싫어? 물고 빨던 거 잊었어?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알파닥.
“끙.”
짧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
“언니 피부가 어쩌면 이렇게 고와? 따로 바르는 거 있어?”
“아침에 마나로 정화한 물을 사용해 세수하는 거 말고는 없는데…….”
“와아! 타고난 피부 미인이네. 부드러운 거 봐. 완전 꿀피부야!”
갑자기 나타나 베커 공작의 동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나타샤.
주저없이 아린의 팔에 팔짱을 끼고 연신 팔을 매만졌다.
화를 내거나 불쾌한 내색은 할 수가 없다.
마나가 보내주는 위험 신호.
강자!
나타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보이지 않는 마나의 묵직함.
감히 측정이 안 될 수준이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눈빛 깊은 곳에는 차가움이 일렁거렸다.
언뜻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이가…….”
“18세. 부담 갖지 말고 말 편하게 놔. 예쁜 언니 갖는 게 소원이었거든.”
“……어.”
부담 갖지 말라고 했지만 역시 부담스러웠다.
황실 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아린이다.
형제들이 살아있지도 않다.
제국 황실은 완벽하게 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여동생이 생긴 것이다.
“고쳐줄까?”
“???”
“가면 뒤에 상처 말이야.”
“가, 가능해?”
“그럼! 치유 마법 한 방이면 싹 나을 거야.”
“!!!”
스승이 남겨준 상처다.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서는 8서클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나타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8서클 마법사라는 뜻이다.
“진짜 농담 아니야. 나 언니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어. 절대 침 뱉지 않는다고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할게.”
“무……슨 의미야?”
“흐흐흐. 그런 게 있어.”
나타샤가 비밀스러운 눈빛을 하고 웃는다.
“오빠 사랑해?”
그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
나타샤의 눈동자가 무척 반짝였다.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아린이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진짜?”
“응.”
“바로 이거야!”
“???”
“혹시 언니 황제 뭐 그런 거야?”
“……응.”
“와아아! 완벽해!”
나타샤가 탄성을 터트리며 좋아했다.
아린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 이런 이야기 좋아했거든! 책 제목이 ‘여황제의 여동생이 남주를 사랑했어요.’ 여황제의 동생이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흐흐흐.”
나타샤가 뒷말을 하다 끊었다.
아린은 얘기를 듣다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알 것 같았다.
의문의 나타샤는 베커 공작과 평범한 사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공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음이 확실했다.
아린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나타샤.”
덩달아 아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응! 언니!”
나타샤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세상 순진한 18세 소녀 같은 모습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정말?”
“어.”
“황제 자리도?”
나타샤가 생글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말을 멈춘 아린이 나타샤의 두 눈을 직시했다.
파바밧.
짧게 튀는 불꽃.
“베커는…… 안 돼.”
아린이 굳은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남자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베커다.
“……자신 없어?”
“???”
“걱정 마. 빼앗지 않을게.”
“그게 무슨…….”
“보아하니 오빠도 언니를 사랑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힘내.”
“…….”
“비운의 여주인공도 멋있는 거야.”
나타샤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씨익.
급기야 나타샤는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는다.
그리고.
“어차피…… 언니는 기껏해야 100살밖에 못 살잖아. 그때까지는 내가 양보해 줄게.”
“!!!”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