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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장. 순수한 복종. (1,267/1,284)

1292장. 순수한 복종.

복종?

나타샤는 복종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곱씹었다.

과거 주인 행세를 하던 샨트리아에게도 복종했다.

아니, 하는 척했다.

한 세계에 눈을 뜨고 사고라는 것을 하는 순간부터 보아왔던 드래곤 샨트리아.

강력하게 풍겨오는 기운에 숨이 막혔다.

가끔 보이는 본체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가 지시한 것들 대부분 묵묵히 해냈다.

양에 차지 않는지 가끔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나타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드래곤이 마음만 바꿔 먹으면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어느 순간에 다다르자 샨트리아가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레드 드래곤의 머리 쓰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어르고 달래면 화를 내다가도 금세 멈췄다.

한 수 더 떠 애교를 부리면 마법도 자세히 가르쳐줬다.

익숙해져 가던 드래곤 길들이기.

간간이 샨트리아를 골려 먹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당연히 샨트리아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러 남녀 이야기책을 통해 기술을 세밀하게 습득한 나타샤.

야금야금 샨트리아를 물들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샨트리아의 힘을 빼앗을 생각까지 품었다.

샨트리아는 여성체의 유혹에 매우 약했다.

맹세 주문도 나타샤가 준비했다.

누가 들으면 멍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부끄러운 맹세 주문.

샨트리아는 얼토당토않은 요구인 것을 알면서도 계약을 맺어줬다.

나타샤의 수법에 거의 넘어온 것이다.

나날이 갈수록 나타샤의 기술은 더욱 성숙해졌다.

교묘하게 기술을 사용했지만 절대 드러나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샨트리아가 나타샤의 수법에 거의 넘어왔을 때였다.

주인님에서 오빠로 호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순간을 남겨놓고 샨트리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색하게 흘러버린 긴 세월.

그만큼 오랜만에 복종이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꿈틀.

나타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과거 안 좋았던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기껏 동맹을 맺어줬더니 뒤통수 치며 복종하라고 말하는 인간.

‘흐음.’

나타샤는 고민에 빠졌다.

이 인간은 강하다.

쇠붙이도 녹이는 강력한 독에도 내성을 보였다.

8서클 마법도 버텼다.

독이나 마법을 사용해 죽일 수는 없지만 도망치는 건 가능했다.

파밧.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했다.

솔직히 아까웠다.

세상에 나가도 이만한 남자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야기책 속의 인간들은 생각보다 약했다.

기껏해야 마족 하나 물리치고 용자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진짜 강하다.

드래고니아인 자신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여기서 놓치면 후회할 게 뻔했다.

“싫어?”

남자가 물었다.

웃음기 띤 눈으로 물었지만 눈빛이 차갑다.

위험한 신호였다.

1000년은 그냥 살아온 세월이 아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보이는 갈등.

결정을 내려야 한다.

순간 떠오른 기막힌 생각 하나!

씨익.

나타샤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번졌다.

***

- 순수한 복종? 복종이면 복종이지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알파닥이 중얼거리듯 묻는다.

최상급 마족은 이해 못 할 말이긴 하다.

마계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강자존이 통한다.

강한 자에게 약한 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원하는 건 마계 방식이 아니다.

온 마음을 다한 순수한 복종!

- 오빠신. 쉽게 설명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야!

- 저도 궁금합니다. 순수한 복종이 무슨 의미인지…….

무식한 마족과 드래곤 같으니라고!

비유와 은유를 모르고 오직 직유만 사용하는 종자들이다.

말에 내포된 순수하고 진정한 뜻과 그 의미를 몰랐다.

복종은 생각보다 쉽게 얻어낼 수 있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강하면 인간들도 복종한다.

얻어 낼 게 있고 상대가 두려운 존재이기까지 하다면 당연히 고개 숙이는 게 순서다.

개중에서 복종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아주 소수다.

동물들 역시 강자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꼬리를 말며 고개를 숙인다.

지금껏 드래곤과 마족들은 그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난 다르다.

대단히 이성적이며 지적인 데다 감성이 풍부하기에 나타샤에게 새로운 제안을…….

- 풋! 오빠신이?

- 크크크크. 참으로 웃기는 소립니다.

둘이 죽이 아주 잘 맞는다.

비웃음이 듣기 좋게 찰지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중요한 순간이다.

쉽지 않은 제안이고 결정이다.

나타샤는 그들이 우려하는 대로 몹시 위험한 생물체다.

드래곤은 아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절대 강자라 할 수 있다.

블랙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아 피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거기에 마음만 먹으면 왕성 하나쯤은 독으로 박살 낼 수도 있다.

지금에 와서는 제약도 없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나타샤를 제어하지 못하면 난 불을 보듯 죄인이 된다.

나타샤가 도망이라도 치면 잡을 자신도 없다.

아직 난 7서클 마법사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기회는 지금뿐이다.

“순수한 복종? 그게 뭐야?”

몸에 착 달라붙은 채로 나타샤가 묻는다.

누가 봐도 아찔한 유혹의 자세다.

말할 때마다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

온몸의 피가 뜨겁게 데워지고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남성체를 유혹하는 강력한 호르몬도 같이 작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몸과 달리 의식적 이성은 냉철하다.

나를 바라보는 나타샤의 눈빛이 복잡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서로에 대한 탐색이 짧게 이루어지면서 또 복잡했다.

- 탐색? 이건 교미를 위한 구애야!

교미…….

알파닥의 표현이 참으로…… 예리했다.

- 성스러운 처녀 마족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 아무리 원래 방탕하게 살았다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지!

알파닥의 말투가 뾰족하게 날이 섰다.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연애 한번 못 한 자신의 탓은 전혀 하지 않는다.

- 보기에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샨트리아가 지극히 일반적인 남성적인 시각으로 한마디한다.

- 닥쳐! 너도 저질이야!

- 저, 저질? 이래 보여도 나 완벽하게 순결한 동정 드래곤이야! 어디서 망발이야!

- 그게 자랑이야? 알도 못 낳아본 씨 없는 드래곤 같으니.

- 씨 없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 난 마신을 섬기는 성녀야! 함부로 막 몸을 굴리지 않아!

- 능력은 되고?

- 베르니체에게 삥이나 뜯긴 주제에!

- 니가 베르니체를 알아?

- 뭘 알아야 하는데?

- 넌 베르니체와 비교도 안 돼.

샨트리아의 시선이 알파닥의 가슴을 향하는 듯했다.

- 어딜 봐! 예의를 모르는 음탕 도마뱀아!

- 미성숙한 마족 주제에. 내가 지금껏 봐온 여자 마족 중에 네가 제일 작아!

- ……야! 이 저질 도마뱀 새끼야! 만년 동정 드래곤 주제에 어디서 남의 가슴을 품평해! 네가 봤어? 봤냐고!!!

- 흐흐흐. 그걸 꼭 봐야 아나? 딱 봐도 견적이…….

- 다, 닥쳐!!!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장립 귀신이 자리를 비우니 만만치 않은 드래곤 귀신이 붙었다.

드래곤이나 마족이나 둘 다 애들 같다.

유치함의 극치.

“꼭 복종해야 돼?”

나타샤가 묻는다.

고품격 애교가 좔좔 흐른다.

음성 역시 천박하지 않다.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순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유혹의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

“……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단단하게 마음먹었다.

나타샤가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도망칠 수 없다.

“아!”

나타샤가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약간의 고통이 담겨 있는 음색이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나타샤가 결정을 내린 듯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나타샤.

중요한 순간이다.

동맹의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 순간 그녀와 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이다.

“내 대답은…….”

스르륵.

나타샤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 조심해! 저 악녀가 얼굴 잡고 침 뱉을 것 같아!

-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비하십시오!!!

안구에 침을 맞으면 장님이 될 것이다.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서로의 속을 감추고 단단하게 몸과 몸이 밀착했다.

치명적이고 유혹적이면서 다분히 위험한 자세.

꿀꺽.

마른침이 제멋대로 넘어갔다.

여차하면 나타샤의 허리를…….

“순수하게 복종할게.”

나타샤가 양손으로 내 귀를 만지며 속삭였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

네 방식? 어떤…….

쪽!

그때 순식간에 입술에 느껴진 뜨겁고 부드러운 느낌.

“!!!”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리고.

- 지, 지금 둘 다 뭔 짓 하는 거야! 떨어져! 당장 떨어지라고!!!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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