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장. 동맹의 조건
엄마와 성격이 똑같아!
샨트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나타샤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광룡이라 불리던 시절, 철없을 때 한눈에 반했던 베르니체.
몇천 살이나 더 많은 연상이었다.
마법이나 품고 있는 마나 양은 샨트리아가 더 강했다.
그러나 말빨이나 삶의 지혜에서 한참 밀렸다.
인간들이나 타 종족들은 드래곤이 만년을 넘게 살아가니 그만큼 지혜로울 거라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대부분 홀로 살아가는 드래곤은 하나같이 외골수에 고집 불통들이다.
특히 남성체 드래곤들은 오만한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성체가 되면 중간계에 두려운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갔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었다.
대자연에 흐르는 마나가 알아서 굴복했다.
9서클 마법은 언령으로 대체됐다.
부모가 준 마법만 해도 엄청났다.
마법으로 수많은 마법 지식이 전달됐다.
특히 레드 일족은 힘과 마나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대대로 드래곤 로드에 임명되는 골드 일족들에게만 한 수 밀렸다.
신의 교묘한 안배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 잘난 레드 일족도 종족 번식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힘으로 누를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여성체 드래곤은 귀했다.
만약 남성체 드래곤이 강제로 여성체를 취하게 되면 모든 일족이 나서서 처단했다.
더욱이 드래곤 여성체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셌다.
긴 세월 동안 알을 낳아봐야 고작 한두 개.
남성체 드래곤들은 그런 이유로 여성체 드래곤 앞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드래곤도 무성 생식할 수는 없는 노릇.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죽기 전에 일족을 남길 의무가 주어졌다.
문제는 자존심 강한 남성체 드래곤들은 여성체 드래곤에 대해 그만큼 무지하다는 것이다.
가끔 바람둥이 드래곤들이 나타나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여성체들을 휘어잡고 알을 생산해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세상 이치와 같았다.
광룡 샨트리아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힘은 강맹했어도 여성체들의 드래곤 하트를 감동시킬 만한 감성이 부족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냥저냥 넘어갔다.
힘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신이 주신 의무는 무엇보다 신성했다.
짝을 맺지 못하자 어느 순간 정신적인 문제를 발생시켰다.
강했던 만큼 더욱 더 신들의 섭리 역시 강하게 작용됐다.
레드 일족이 결국 광룡이 되는 이유 대부분이 그 이유 때문이었다.
긴 세월 동안 총각 드래곤으로 살다가 머리가 도는 것이다.
유희 중에 생산해내는 드래고니아는 별 의미가 없다.
일족을 배출하고 힘을 나눠줘야만 광룡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샨트리아도 그때 눈이 돌아갔다.
여성체 드래곤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다.
이유는 단 하나.
미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레드 일족은 여성체 드래곤들에게 한참 후 순위로 취급받았다.
태어나는 자손들 중 상당수가 문제가 많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레드 일족과 결합하면 레드족이 태어날 확률이 확실히 높았다.
그것도 남성체로.
자발적으로 결혼하기 힘든 무식한 레드 일족 남성체를 생산하고픈 드래곤 여성체는 없었다.
과거 신들의 전쟁 시절에나 남성체 드래곤의 인기가 많았을 뿐이다.
강한 드래곤들은 당시에 왕처럼 군림했다.
그러나 요근래 세상이 평안했던 만큼 강한 드래곤보다 부드럽고 뇌가 섹시한 남성체 드래곤들이 먹혔다.
그런 변화 속에서 샨트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동료 여성체 드래곤들에게 보란 듯이 무시를 당했다.
버티고 싶었지만 서서히 꼭지가 돌았다.
순간순간 울컥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더럽게 치사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 가진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알맹이가 없었다.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세상을 다 부숴버릴 거라는 분노와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때 만난 여성체가 블랙 드래곤.
소문은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감정 사치의 여왕 베르니체.
짝을 이루지 못한 남성체 드래곤들을 전문적으로 유혹해 탈탈 털어먹었다.
남성체 드래곤들을 휘어잡아 각종 보물들을 알아서 조공하게 만들기도 했다.
샨트리아도 베르니체에게 푹 빠졌다.
수천 년을 더 살아온 베르니체는 샨트리아를 그만큼 쉽게 요리했다.
몇 번의 웃음과 몇 번의 꼬리 흔들림이면 숫총각 남성체 드래곤들이 팍팍 쓰러졌다.
그리고.
- 그래도 당신을 사랑했소!
샨트리아는 진정으로 베르니체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했던 짧은 수십 년의 시간.
중간계 맛집과 경치 좋은 곳들을 함께 유희하며 경험했다.
사막 같던 샨트리아의 감성을 소나기처럼 적셔주었던 베리니체와의 추억.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베르니체와 이제 알만 생산하면 됐다.
날짜도 잡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베르니체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나 버렸다.
당시에는 미칠 것 같았다.
그녀를 찾아 중간계뿐만 아니라 정령계와 마계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야말로 폭주했다.
막아서는 자들을 모조리 때려잡았다.
광룡이라는 호칭을 제대로 얻게 된 때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꼭지가 돌아버린 샨트리아는 결심했다.
세상을 무너트려서라도 베르니체를 찾아내겠다고 말이다.
그때 거짓말처럼 베르니체가 다시 나타났다.
드래고니아 나타샤를 임신한 채로.
그때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아빠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았다.
베르니체는 눈물을 흘리며 나타샤를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멍청한 샨트리아는 베르니체의 눈물에 또다시 속았다.
순수 총각이었던 샨트리아는 급기야 그 자리에서 보모가 됐다.
비록 자신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타샤를 나름 훌륭하게 조련하고 키워냈다.
그러나 채울 수 없는 신의 섭리.
어느 한날 결국 머리가 돌아버린 샨트리아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결국 하르케우스에게 붙잡혔고 오늘날 이렇게 가죽만 남았다.
‘세상을 위해서는…….’
샨트리아는 나타샤를 보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베커라는 인간에게 얻어터진 후로 광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드래곤의 또 다른 의무 중 하나인 중간계 수호.
나타샤가 중간계에 출현하는 순간 큰 파란이 일 게 확실했다.
- 죽일 거지? 그래! 한 방에 확실하게 처리하자!
마족 성녀가 재촉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샨트리아도 동조했다.
만약 나타샤가 9서클을 각성한다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 확실하게…… 동맹을 맺을 거야.
- 뭐야? 너 미쳤어? 쟤 위험한 짐승이라니까!!!
베커라는 인간이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또 한켠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괜찮아. 나도 만만치 않게 위험한 짐승이니까.
- 뭐라고???
***
재밌어!
나타샤는 이 순간이 너무 짜릿했다.
긴 세월을 레어에서만 지냈다.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레드 드래곤 샨트리아가 어느 날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백 년간 홀로 상상 속을 유영하며 성장했다.
처음 자신의 신분을 알고 나서는 좌절하기도 했다.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라는 드래고니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체성에 혼란의 시기를 무려 100년이나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이렇게 창조한 엄마와 아빠를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면서였다.
중간계라 불리는 인간 세상에 대한 궁금증도 그만큼 증폭됐다.
상상은 더욱 커졌다.
다행히 레어에는 이야기 책들도 많았다.
샨트리아가 모아온 책들은 수백만 권이 넘었다.
물론 레드 일족답게 책과는 거리가 먼 샨트리아였지만 말이다.
골드 일족들이 책을 많이 본다는 이유로 자신도 책을 모았을 뿐이다.
그중에는 모험이나 용병, 영웅들의 이야기도 많았다.
나타샤는 긴 시간 동안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지냈다.
마법 공부도 시들해지던 차였기에 상상을 채우는 재미로 시간을 더 잘 보냈다.
주인공으로 변신해 마족과 싸우고 멋진 남자와 뜨겁게 사랑도 했다.
그때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나타샤였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레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샨트리아가 죽었다는 걸 분명하게 확인해야 맹세와 맹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며 세상에 대한 갈증이 커져가고 있을 때 눈앞의 인간 남자가 나타났다.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이들처럼 잘생겼다.
더욱이 자신과 같은 흑발에 검정 눈동자를 소유했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착한 마족 같은 인상이었다.
게다가 강하기까지 했다.
독을 뿌리고 마법을 사용해도 맥없이 죽지 않았다.
세상을 같이 활보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됐다.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상상만 하던 영웅의 등장이었다.
짝으로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다.
거기에 샨트리아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가져왔다.
인간 베커를 유혹했다.
책에서 배우기를 남자는 미녀와 재물에 약하다고 했다.
야한 이야기 속 여인들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아낌없이 레어 창고를 열어줄 마음도 먹었다.
금세 마법 같은 사랑에 빠진 나타샤.
자신의 뜨거운 제안을 남자가 뿌리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이야기 책에 묘사된 어떤 여인도 자신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도도하고 매력 넘치는 드래고니아.
8서클 마법사에 이제 드래곤 레어도 차지한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어서 대답해! 나와 동맹을 맺겠다고!’
나타샤는 끝도 없는 자신감을 표출했다.
남자들의 마음을 모조리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결정했어?”
나타샤가 촉촉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몸은 완벽하게 밀착된 상태.
뜨거운 기운이 남자에게서 풍겨 나왔다.
씨익.
남자가 웃는다.
스윽.
허리를 강하게 안아오는 손길.
“하아.”
나타샤는 순간 신음을 토했다.
손길을 통해 전달돼 온 강한 수컷의 힘.
그리고 코끝을 자극하는 거부할 수 없는 체취.
“동맹…… 허락할게.”
귓가에 들려오는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
‘허락? 감사가 아니라?’
나타샤는 그 순간에도 의문이 들었다.
그가 선택한 말에서 이질감이 감지됐다.
“허락은 아니잖아?”
나타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 순간.
“나타샤.”
남자가 불렀다.
나타샤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봤다.
그 순간.
“조건이 있다.”
“조건?”
남자가 다시 웃는다.
차갑고 뜨거운 미소가 해석하기 난해하다.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갑고 이상한 섬뜩함.
“순수한 복종. 그게…… 조건이야.”
“!!!”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