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5장. 드래곤 레어
“서, 선착순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미친 거 아닙니까! 우리는 신을 모시는 대신관들입니다! 해괴망측하게 선착순이라니요!”
“신들께 불경을 넘어 전쟁을 하자고 달려들다니……. 진짜 무식한 인간입니다.”
“근본 없는 자가 귀족이 되더니 돌아가는 꼴이 엉망입니다!”
쥬셉이 듀에라와 카빌라 신전의 대신관들을 소환했다.
방음 마법이 펼쳐진 신전 비밀 회의실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쥬셉을 제외한 두 대신관이 전해 들은 내용에 열변을 토했다.
대놓고 황실수호공작을 힐난하기에 이르렀다.
자칫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두 대신관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두 대신관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껏 당해본 적 없는 개무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아닌데 대신관들을 상대로 선착순이란 말이 나왔다.
“…….”
분노한 두 대신관과 달리 쥬셉은 분노하는 그들 사이에 끼지 않았다.
조용히 바라보며 경청하는 쥬셉.
“쥬셉 대신관님……. 설마?”
눈치 빠른 황금과 부의 신 듀에라의 대신관이 쥬셉을 향해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음…….”
두 눈을 감고 낮게 신음을 흘리며 침묵을 이어가는 쥬셉 대신관.
“뭐, 뭡니까! 지금 배신입니까?”
카빌라 신전의 대신관이 그 모습을 보고 울분을 토했다.
급기야 대신관들 사이에 배신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쥬셉은 자신들에게 믿어 달라고 했지만 베커 공작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왔음이 분명해 보였다.
“배신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 그림이 맞습니까? 그런데도 배신이 아니라니요!!!”
전쟁을 주관하는 카빌라 신의 대신관이 쥬셉의 태도에 버럭 소리질렀다.
그의 두 눈에서 활활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신께서도 직접 허락하셨습니다.”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쥬셉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두 대신관.
쥬셉 대신관의 성력이 다소 약하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대신관 신분임에도 지금껏 이렇다 할 치료 은사도 못 일으킨 인사였다.
그런 자가 신께 직접 허락받았다는 말로 이 순간을 넘기려 했다.
“믿으십시오. 오늘 신께서 직접 제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쥬셉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다만 신이 들려준 그 음성이란 것이 긴 한숨뿐이었다는 게 문제다.
“그럼 에레카 님께서…….”
듀에라 신전의 대신관 디아논이 말을 아꼈다.
평소 그의 언어습관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다 말아도 함축적 의미는 다 들어 있었다.
“맞습니다. 베커 공작과 기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팔아 쥬셉은 좀 더 당당하게 뜻을 전했다.
첫 번째로 계약했다.
다른 신전보다 앞선 탓에 조건이 훨씬 좋았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카빌라 신전의 대신관 푸쉬코도 맹렬한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전투의 신을 대변하는 대신관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도 얼마나 눈치를 봤는지 모른다.
“제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분에게 먼저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쥬셉의 태도가 다소 뻔뻔스럽게 나갔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몸을 낮춰봐야 의미가 없었다.
“허어.”
급기야 탄식을 터트리는 디아논 대신관.
“음.”
신음과 함께 분위기상 눈치를 보는 카빌라 대신관.
두 사람의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선착순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존심을 앞세우기에는 이미 늦었다.
“베커 공작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 보였다가는…….”
쥬셉이 분위기를 더욱 자극하며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
베커 공작은 그들이 상대할 만한 수준의 인물이 아님을 간파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분이 필요했다.
“이런 야간 기도 시간이군요!”
디아논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특별 기도회가 있다는 걸 깜박했습니다!”
초를 다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
“지금 가셔도 만나 뵙기 힘들 겁니다.”
“???”
“저에게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는 급한 약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쥬셉이 이미 베커와 친분을 쌓았음을 은근히 드러내며 과시했다.
“성의를 본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선착순. 황실 정문 앞에서 먼저 기다리는 분에게…….”
우당탕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을 뛰쳐나가는 디아논 대신관.
“같이 가요! 먼저 가면 배신입니다! 배신!!!”
그 뒤를 황급히 따라 나가는 푸쉬코 대신관.
“흐흐흐흐흐흐.”
사라지는 두 대신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쥬셉.
“앞으로 공작 각하와 친하게 지내야겠어.”
이번 일로 확실히 노선을 정한 쥬셉이었다.
포고령 하나로 단박에 신전을 휘어잡은 황실수호공작.
앞으로 친분을 쌓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순식간에 100가지가 넘게 떠올랐다.
***
팟!
“읏!”
이동 마법진은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다.
엄청난 마나 흐름에 속이 뒤집혀 울렁거렸다.
공간과 공간을 압축해 이용하는 마법 기술.
8서클 이동마법은 마법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공간을 직접 열었다.
신기했다.
아쉽게도 7서클 마법사에게는 요원한 마법.
반드시 배우고 말 것이다.
- 이곳은…… 여전하군요.
샨트리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건물 내부다.
무척 시원하다.
마치 물가에 있는 것처럼.
- 맞습니다. 제가 한 성질 하지 않습니까. 평소 화를 다스리기 위해 협곡 호수 지하에 레어를 마련했습니다.
좋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 레어.
동굴이 아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건…….
“뭐가 이렇게 크고 넓어?”
왕실 대형 연회장보다 몇 배는 더 크다.
지구에서도 보기 힘든 실내 모습이다.
대형 전시장을 몇 개나 합친 것보다 더 넓고 크다.
- 본체로 거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드래곤 본체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이 동네에서는 함부로 볼 수 없는 사회지도층 인사다.
“창고도 넓겠지?”
- 물론입니다! 다른 일족보다 두 배는 큽니다!
제대로 교육받은 샨트리아는 일체 반항하지 않았다.
모범생으로 변했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분노조절장애보다 큰 것 같다.
“직진하면 돼?”
- 넵!
건축물은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게 확실했다.
강남대로 옆에 비싼 건물들에서나 흘러나오는 돈 냄새가 났다.
현대 건축 기술은 돈에 의해 좌우된다.
디자인부터 재료와 인부들의 기술, 숙련도까지 자본이 투입되어야 잘 빠진 건물이 나온다.
지금 이곳 장관이 그랬다.
- 황금 도끼 일족 드워프 1000명이 100년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당시에 드워프 일족들 중에 가장 잘나가는 놈들이었죠.
회상에 젖는 드래곤.
머릿속에 거짓말처럼 그 당시 장면들이 그려졌다.
성질 더럽고 악독한 광룡 샨트리아에게 잡혀 레어를 건축해야만 했던 불쌍한 드워프들.
유노동 무임금의 지옥 같은 노동 실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저 당당한 말 봐라.
공짜로 100년이나 부려먹고 죽이지 않았다는 말로 다 갚는다.
저벅저벅.
드래곤과 함께 레어 내부를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등장한 거대한 문.
높이만…… 200미터쯤 될 것 같다.
- 이곳이 창고입니다.
“어떻게 열면 돼?”
황금으로 떡칠을 한 문이다.
샨트리아로 보이는 흉악한 드래곤의 얼굴이 양각됐다.
그냥 열릴 것 같지가…….
- 툭 치면 열립니다.
툭?
이렇게?
손으로 문을 톡 쳤다.
그르르르르르르르르륵.
거대한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파아아아앗!
그 순간 두 눈을 파고드는 엄청난 금빛 광채.
“오!!!”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때.
“화씨! 너 뭐야!!!”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