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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장. 협상의 기술(2) (1,259/1,284)

1284장. 협상의 기술(2)

‘선착순?’

쥬셉 대신관은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착순이라는 말이 확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가 된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이런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

신전 소속 사제들은 마탑의 마법사들보다 어느 면에서나 더 대접받았다.

신을 모시는 거룩한 자들은 황제 앞에서도 신의 대리자로 통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상대로 선착순?

“대신관님이 1번이십니다. 자비의 신께서 운이 좋으십니다.”

씨익.

베커 공작이 너스레를 떨며 웃는다.

신에게 운이 좋다고 말하는 모독을 저질렀다.

미쳤다!

쥬솁이 품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온전한 정신을 소유한 자가 아닌 게 분명하다.

신이라는 존재는 절대로 어떤 거래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사제들은 타락해도 신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오만한 인간 베커 공작은 신에 대한 경외심마저도 없어 보였다.

“지금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쥬셉이 의지를 다지며 다소 강하게 나갔다.

신성모독은 누구 앞을 막론하고 큰 죄다.

신전 측에서 모독죄라 판단하면 전 신도들이 책임을 묻기 위해 나설 것이다.

자비의 신을 섬기는 신도가 무척 많다.

과거 황제들 역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대형 신전은 건들지 않았다.

그러나.

“1순위 포기하시겠습니까?”

공작이 쥬셉의 말을 무시하는 듯 담담하게 묻는다.

“각하. 제가 지금 찾아온 이유는 갑작스런 황제 폐하 포고령에 대한 각 신전의 의견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의견요?”

“……신전의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대륙 역사상 신전에 기부금을 강요하는 정치가는 없었습니다.”

“폐하가 지금 강요한다 여기십니까?”

“물론입니다.”

“기부를 명하셨지만 강요는 없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지금 대륙에서 크로얀 제국 황실을 무시할 자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제 눈앞에.”

쥬셉을 바라보는 공작의 짐작할 수 없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가, 각하! 전 대신관이라 불리는 사제입니다!”

쥬셉이 한 번 더 대신관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래서요? 대신관께서는 밥 안 먹습니까? 화장실은 안 갑니까?”

“네???”

베커 공작의 황당한 질문에 쥬셉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질문 자체가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소리였다.

“황금 안 좋아하십니까?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공작의 표정이 무척 진지해졌다.

“전 자비의 여신 에레카 님의 종입니다. 당연히 재물을 멀리하고 자비와 궁휼의 마음으로 신도들을…….”

“정보에 의하면 요즘 자비의 신전에서 각종 고급 가구와 물건들을 구입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다 돈 아니겠습니까.”

“신께 바칠 신물들입니다.”

“에레카 님이 과소비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각하!!!”

“황실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최고급 포도주와 음식 재료, 엘프목으로 만든 가구를 신전에서 구입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레카 님이 그걸 모두 사용하십니까?”

베커 공작의 미소가 은근히 짙어졌다.

‘다 알고 있어. 젠장.’

쥬셉의 등판이 식은땀으로 촉촉해졌다.

신전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구입하는 물건도 세금이 면제된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신전은 온갖 명목으로 사치를 즐길 수 있었다.

위기는 기회였다.

자비의 신전에 안식을 얻기 위해 찾아온 신도들이 거액을 내놓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제들은 그런 신도들이 많이 찾아올수록 돈맛에 젖어 들었다.

제국이 멸망한 뒤 더욱 성황을 이룬 신전.

성수 가격도 최고로 뛰었다.

모든 것들이 신의 은총으로 가득한 이때.

베커 공작이 신전을 향해 창끝을 겨누는 형상이 됐다.

쥬셉은 확실히 알아챘다.

베커 공작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그런 공작이기에 아무리 신의 이름으로 협박해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부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국 부흥을 위해 일조하기 위해 에레카 님도 마음을 내셨습니다.”

“역시 자비의 신 에레카 님 답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기부하면 될지…….”

사론은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 해보고 끝이 났다.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이제는 적정 수준의 기부 액수를 정할 때였다.

실질적인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먼저 말씀해 보십시오.”

‘선수다!’

쥬셉은 빈틈없는 베커 공작을 살피며 속으로 긴장했다.

그야말로 밀당의 고수를 만났다.

대신관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전에서 눈칫밥을 상당히 먹어야 한다.

신전도 보통 인간들의 사회 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성력보다는 눈치와 아부 말빨이 더 중요했다.

“수입의 1할을 앞으로 10년 동안 황실에 기부하겠습니다.”

엄청난 출혈을 감수한 적정 금액이다.

말이 1할이지 어지간한 영지 총수입보다 많은 액수다.

“그래요?”

속을 드러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묻는 베커 공작.

전혀 만족한 표정이 아니다.

‘도둑놈!’

속으로 욕을 퍼붓는 쥬셉.

“부족하면 2할까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신전 재물을 다 바쳐야 할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륙의 강자 면모다웠다.

“좋습니다. 2할 받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락하는 베커 공작.

“감사합니다! 각하!”

쥬셉은 순순히 수락한 베커 공작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황제 폐하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기부금은 제 이름으로 받겠습니다.”

“물론입니다.”

‘흐흐. 욕심도 많구나.’

어려운 승부가 될 것이라 여겼다.

최대 3할까지 염두에 두었다.

요즘 황도로 사용하는 이곳 신전이 가장 끗발이 좋았다.

여러 대신관들이 협의체로 운영하는 에레카 신전.

협상 내용은 사정을 설명하면 된다.

베커 공작의 태도로 보아하니 신전에 크게 우호적일 것 같지 않다.

이럴 때는 도리어 깔끔하게 거래를 트는 게 좋다.

“이 기부 약조도 에레카 신께서도 허락하겠죠? 신도들의 피땀 흘려 쌓은 선한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에레카 신을 섬기는 대신관 아니겠습니다. 신전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2할은 제국, 아니 공작 각하 앞으로 기부될 것입니다. 하하하.”

쥬셉이 안도의 마음에 호탕하게 웃었다.

찌릿.

그때 쥬셉은 분명하게 느꼈다.

요즘 기도해도 자신에게 응답이 없던 에레카 신의 기운.

몹시 차가웠다.

갑자기 신의 기운이 강림했다.

목덜미가 더없이 서늘했다.

그리고.

- 에휴.

신의 진한 한숨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

- 와아…… 이 천하의 몹쓸 사기꾼! 세상에 등 처먹을 게 없어 신의 포인트를…….

알파닥이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으로 잠잠해진 그녀의 말에서 존경심이 팍팍 느껴졌다.

엄연히 사기가 아니라 기술이다.

누가 봐도 완벽한 협상이었다.

난 전혀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제국 부흥과 백성들을 위해 신전에서 기부한 거다.

- 그럼 황실 창고로 들어가야지! 왜 오빠신 이름으로 먹냐고!!!

큼큼.

바로 그게 핵심이다.

우리 아린 황제는 깨끗한 일들로 역사에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이런 명성에 흠집 나는 기부들은 황실수호공작인 내가 다 안고 갈 생각이다.

- 그걸 알고도 포고령을 발표한 거야? 사랑을 이용해먹는 나쁜 제비 오빠신!

나 잘되려고 하는 일 아니다.

막말로 내가 마이너스 포인트 어서 갚아야 알파닥 네 이자도 정상적으로 지불할 거 아냐.

내가 잘되면 그냥 입 싹 씻을 거 같아?

알파닥에게 던진 먹을 만한 미끼 가득한 물음.

- 끄응……. 그래 당하는 신이 바보지.

알파닥이 항복을 선언했다.

계약은 기분 좋게 마무리됐다.

쥬셉 대신관이 기부를 약속한 직후 알림음이 들렸다.

- 자비의 여신 에레카 님에게 지급되는 신도 포인트 중 2할을 획득하셨습니다.

- 최우수 고객으로 선정되셨습니다.

- 각종 수수료가 대폭 할인되었습니다.

나의 짐작이 맞았다.

대신관이 약속하자 신께도 그 구속력이 바로 미쳤다.

이게 바로 인과(因果)다.

주신도 피할 수 없는 우주 운영의 규칙.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함께 엮이는 법!

그동안 신전을 통해 꿀 빨던 신들도 계약 내용이 곧바로 적용됐다.

사제들은 이 사실까지는 몰랐다.

자신들의 말 한마디가 신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말이다.

여기 있는 알파닥도 나의 기막힌 선견지명과 깊은 생각을 짐작하지 못했다.

사기가 아닌 진정한 협상의 기술.

오늘 또 대박을 터트렸다.

- 감당할 자신 있어? 여기 신들 완전 깐깐해.

알파닥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괜찮다.

신들 상대로 하루 이틀 장사하는 내가 아니다.

- 한 수 배웠습니다.

여태 조용하던 광룡 샨트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죽 갑옷으로 연결된 샨트리아의 영혼.

진심으로 탄복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 자존심 안 상해? 그래도 한때 잘나가던 드래곤이었잖아.

알파닥이 샨트리아에게 묻는다.

- 자존심이 밥 먹여줘? 그리고 난 꿈이 생겼어!

샨트라아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신이 되고 싶은 열망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하르케우스와의 대결.

말 잘 들으면 확실히 밀어줄 생각이다.

- 감사합니다! 

드래곤이 진짜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다.

이제 진심을 확인해 볼 순간.

“이동 마법진 활성시켜 봐.”

- 넵!

“좌표는 알지?”

“물론입니다!”

샨트리아는 나의 둘도 없는 충실한 종이 됐다.

파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동 마법진을 통해 공간이 열렸다.

9서클은 안 되지만 8서클 마법까지 무난하게 사용 가능한 샨트리아.

나를 위해 자신의 레어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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