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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장. 협상의 기술. (1,258/1,284)

1283장. 협상의 기술.

“이 포고령은 무도합니다! 세상에! 신을 모시는 신전을 상대로 재산등록이라니요!”

“말은 기부라지만 이건 갈취입니다!”

“인간이 신의 일에 관여하다니 이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열변이 터졌다.

열성 신도가 많기로 소문난 황금과 부의 신 듀에라 신전, 그 심처 지하 기도실.

대형 신전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관계자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 임시 황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신전들의 관리자들.

대신관급 사제들의 얼굴에 불쾌함이 진하게 번졌다.

갑작스럽게 황제 포고령이 내려졌다.

종교와 관련된 신전과 시설 일체는 황제 직속 신전과에 재산을 등록하라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환란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한 일이니 황실에 기부하라는 명령까지 더해졌다.

명령의 형태를 띠었음에도 모순적인 건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번 기부를 통해 앞으로 제국 신전들에 대한 각종 허가 범위가 결정될 것이라고 포고령에 명시되었다.

“줄 세우겠다는 거 아닙니까? 기부야 각자 신전 재정 형평에 맞게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걸 황실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신전은 신을 모시고 가난한 자를 구휼하는 전문 기관입니다. 그런데 왜 황실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겁니까!”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 모두 포고령에 맞서야 합니다.”

사제들이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렸다.

하지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노를 양껏 터트려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베커 공작이 계획한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면을 세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를 내는 일은 잠깐.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와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대륙은 완벽하게 크로얀 제국 부흥군이 휘어잡았다.

라든과 사르칸 마탑이 황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갈기오 마탑은 20년 동안 폐쇄를 결의했다.

갈기오와 사르칸 마탑은 이번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왕실 연합군에 참가한 결과 엄청난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전력을 복구하는 데 몇십 년은 걸릴 터였다.

왕국과 귀족들도 한껏 움츠린 채 자라목이 됐다.

연합군에 참전한 왕들과 고위 귀족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협상 중이다.

베커 공작이 보여준 위엄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

여기 있는 사제들도 그 사태를 직접 목격했다.

광룡에 오염된 마탑주를 처리한 베커 공작.

최상급 정령도 베커 공작의 편에 섰다.

드래곤신인 하르케우스의 가피도 확인된 마당에 감히 베커 공작에게 맞설 자는 대륙에 없었다.

대륙 삼대 권력 중 하나인 신전도 입장은 마찬가지다.

과거 제국 시절에도 이 정도 수준의 핍박은 없었다.

신들의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이단이나 악신이 아닌 이상 권력자들은 신전의 일에 어느 정도 신경을 껐다.

신전은 철저하게 기부금으로 운영됐다.

세금이 아니다 보니 권력자들도 관여하기 모호했다.

신전과 친분을 유지해야 정권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신전 사제들의 치료와 성수 공급은 권력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제국 부흥군에 무법자가 포함돼 있었다.

황제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하는 황실수호공작.

마탑과 왕국 연합군이 잔뜩 찌그러졌다.

그리고 이제 목표는 신전으로 선회했다.

혼란한 와중에도 신전은 더욱 부흥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인간의 정신은 나약해지게 마련이다.

신에게 의지하는 인간들에게 설교 몇 마디 던지면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럼 결정을 내립시다. 다른 신전들과 발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비의 신 에레카를 섬기는 대신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적당히 기부하죠. 남는 하급 성수와 적당한 기부금이면 황실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가장 기부금을 많이 취득하는 듀에라 신전 대신관이 방법을 제시했다.

언제나 계산이 빠른 인물이다.

“강하게 나갑시다! 지금 밀리면 끝입니다!”

전쟁과 풍요의 신 카빌라를 섬기는 대신관이 강력 투쟁을 주장했다.

“흐음…….”

듣고 있던 에레카 신전 대신관이 신음을 흘렸다.

모두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안 좋은데…….’

다만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당장 이중 누구라도 배신자가 나오면 무너지고 말 전선.

대신관이라는 자리가 신성력보다 정치력에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과거처럼 치료 은사가 빵빵하게 내리는 대신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고지식하고 신의 일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성전기사들과 치료 담당 사제들이면 충분했다.

신들도 말 잘하고 정치력 좋은 이들을 선호했다.

신도 수가 늘면 신들에게 돌아가는 포인트가 그만큼 높아진다.

사제들이 성수를 제조하는 데 신들도 힘을 써야 그마저도 가능한 일이다.

그게 다 포인트와 직결됐다.

투자 대비 마진율을 높일 수 있는 정치력 좋은 사제들을 신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일단……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자비의 신 에레카 신전이 요즘 잘나가고 있긴 하다.

전쟁 중에는 특히 사람들이 신들의 자비를 많이 갈구했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저도 같이 동행을…….”

두 대신관의 반응이 살짝 달랐다.

믿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

벌써부터 치열하게 신경전이 벌어졌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협상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다른 신도 아니고 자비의 신을 섬기는 대신관이다.

얼굴에 자애로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시죠.”

떨떠름한 듀에라 신전의 대신관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다녀오십시오!”

결정은 내려졌다.

임시 황도에서 가장 큰 신전을 소유한 대신관들의 회동.

오늘의 결정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황실수호공작이 어떤 자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이곳 대륙 신들도 몰랐다.

***

- 감히 신들을 협박해? 오빠가 준 신급이라 해도 이 문제 심각해. 신들이 얼마나 욕심 많은지 모르는 거 아니지? 그분들이 화나면…….

마신님도 그래?

- 그야 물론 우리 자비로우신 마신님은…….

마신이 자비롭다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인할 수 있다.

치고 패고 싸우는 마족들을 다스리는 신이다.

자비로움이라는 말의 기준이 달랐다.

- 황제도 그래. 애인 말에 포고령을 그렇게 쉽게 내려도 돼? 자칫 신전들과 척질 수도 있는데 휘둘리다니…….

아린까지 싸잡아 물고 늘어졌다.

상관없다.

- 신전 사제들이 누구야? 다 선수들이야. 과거처럼 순수한 사제들은 드물었어. 다들 힘없는 신자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려 혈안이야. 그런 놈들이 얼마나 약아빠졌는데 포고령 가지고 되겠어? 자칫 이단이라고 몰아세워 대륙에 선포하는 순간 제국은 끝나.

반대는 생각 안 해?

- 반대? 뭐?

그들이 먼저 이단이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단이라고 선포하면 돼.

- 미친! 신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물론 신들이 들고 일어날 거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신들의 습성을 잘 안다.

인간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신들 사이의 비리는 입 밖에 꺼내기도 힘들 정도다.

몰론 이 동네는 아직도 순수한 면이 많이 남아 있다.

아직은 덜 오염되고 덜 타락했다.

그래서 포고령을 내린 것이다.

- 마신께 귀의해. 우리 마신님 엄청난 재력가셔. 가끔 신들이 오셔서 급하게 빌려 가기도 해. 오빠 빚 정도는 바로 탕감해주고도 남을 거야.

조폭 두목 버금가는 마신이다.

영업 직원 알파닥은 아직도 나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오늘 하루를 살아도 자유인으로 사는 게 나의 목표다.

영달을 누리고 편하게 살려고 했다면 차라리 지구에서 악신과 손잡았을 것이다.

- 쳇! 고집불통 바보 멍청이 오빠신! 내가 투자한 포인트가 얼만데…….

알파닥이 연신 투덜댄다.

난 기다리고 있다.

월척을 잡기 위해서는 밑밥을 충실하게 뿌려야 한다.

이 동네 신들은 그동안 내가 뿌린 밑밥을 충분히 지켜봤다.

이제 남은 건 타이밍!

느긋하게 신들의 반응을 기다리면 된다.

그 순간.

똑똑.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

“각하. 에레카 신전의 대신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무실을 수비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관 정도 되면 약속 없이 찾아와도 된다.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 ……아오! 멍청한 것들!

알파닥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씨익.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통통한 체격의 대신관.

나이는 오십대 중반 정도로 짐작됐다.

대신관은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이 대륙의 권력자라 할 수 있다.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른다.

“황실수호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에레카 님을 섬기는 신실한 종 쥬셉이라고 합니다.”

눈이 마주치자 쥬셉 신관이 손을 모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신전마다 인사법이 달랐다.

나도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 뻣뻣하기로 유명한 대신관 치고는 유연했다.

내가 요즘 핫하게 잘나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끝내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자 당황하는 대신관.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기다렸다는 말을 먼저 깠다.

협상의 자리인 만큼 선수를 잡아야 했다.

다른 신전 사제들을 대표해서 왔을 것이다.

“앉으십시오.”

푹신한 마수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네…….”

포커페이스에 벌써 말려들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난 지구에서 살다 온 현대인이다.

그것도 강대국 지도자들이나 중요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심리전과 대화 기술이 그만큼 농익은 상태다.

“차는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미리 세팅된 찻잔 세트.

또로록.

향이 진하고 맑은 차가 잔에 채워졌다.

최상급 차다.

이번 왕국 연합군 몰수 품목에 좋은 것들이 꽤 많았다.

“축하드립니다.”

“네???”

차를 따르면서 쥬셉 대신관에게 기습적으로 말을 건넸다.

당황하는 쥬셉.

“모르셨습니까?”

“그게 무슨…….”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신이 계획한 것들을 하나하나 뒤집게 될 연이은 공격.

“전 알고 온 줄 알았습니다.”

낚싯대 줄을 강하게 당겼다.

“???”

“이번 기부…… 선착순입니다.”

“!!!”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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