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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2장. 십시일반 (1,257/1,284)

1282장. 십시일반

‘운명 공동체…….’

마족 여인은 꽤 충격을 받았다.

마족, 그것도 마신을 직접 섬기는 최상급 마족이자 성녀.

베커에게는 알파닥이라는 저급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은 라쉬모르 카르얀 아르티아다.

부모 모두 최상급 마족이다.

태어날 때부터 마력이 남달랐다.

마족계의 금수저.

그러나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마족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강한 건 아니다.

하급 마족은 마계에서 하인급에 속한다.

그런 마족들도 중간계 흑마법사들에게 소환당하면 막상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름을 떨치게 된다.

마계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화장실 청소나 하던 녀석들이 대단한 놈들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상급 마족부터는 중간계에 함부로 갈 수 없다.

중간계 수호자인 드래곤들과의 약속 때문이다.

게다가 상급 마족부터는 파괴력이 남달랐다.

자칫 두 차원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최상급 마족은 더더욱 중간계 방문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도 초대받지 않는 한 마계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샨트리아처럼 광룡급이나 되어야 가능한 정도다.

샨트리아 같은 광룡들의 방문은 마족들도 환영했다.

마족들이 타고나기를 광룡과 다르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강함과 전투 본능이 뼈에 각인되어 있고 멈추는 일 없이 피를 타고 흘렀다.

강한 자만이 모든 걸 누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계에서는 힘이 법인 셈이다.

마신은 약한 자를 사랑하거나 배려하지 않았다.

기회만 닿으면 광룡들과 피 튀기며 싸웠다.

상당수 드래곤들이 마계에 찾아왔지만 뼈도 추리지 못했다.

드래곤들은 광룡들에 대해서는 일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생사가 갈린다 해도 탈이 없기에 마족들은 대놓고 광룡들을 사냥했다.

그런 일은 중간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티아가 중간계에 나타났다는 걸 알면 드래곤 일족들이 사냥에 나설 것이다.

제아무리 존재를 감추려 해도 최상급 마족의 힘은 중간계에 파장을 만들어 낸다.

장애를 없애기 위해 마신이 도움을 주었다.

아르티아를 준 영혼체로 만들었다.

드래곤도 발견할 수 없는 영혼체.

마족과 신의 중간 정도 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모습을 바꾼 후 카르마 포인트의 비밀을 낱낱이 알게 됐다.

비밀에 속한 내용이지만 마신께 포인트를 직접 하사받기도 했다.

마족들 사이에서 성녀로 불렸다.

매우 중요한 카르마 포인트를 가볍게 빌려 달라고 말하는 인간.

오늘따라 태도가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봐왔던 마계 마물보다 한참 뒤떨어졌던 인간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아무리 마력이 탁월한 마족들도 눈앞의 인간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르티아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최상급 마족도 베커라는 인간에게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질투로 몸서리를 쳤다.

마신의 보호를 받으며 대놓고 쑥쑥 성장했다.

그에게서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신들의 기운까지 감지됐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특혜였다.

툭툭 싸가지 없는 말을 내뱉으며 갈궜다.

자존심 강한 마족들의 정신도 붕괴될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인간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수시로 반격을 가했다.

마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대꾸가 어이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 과정이 어느 정도 이어지면서 정이 들었다.

주먹질하다 눈맞는다는 마계 속담이 제대로 적중했다.

인간이 살던 차원으로 넘어가면 가끔 그 싸가지 없는 인간이 그리웠다.

뭔가 넘치는 듯했지만 부족한 마족들과는 다른 그 무엇 때문이었다.

마족 못지않게 강했지만 또 부드러웠다.

인간들 중에서는 절대 강자라 할 수 있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강자에게는 더 강하게 나갔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따지고 보면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강자존 마계 율법과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대놓고 바보 멍청이라고 약을 올렸지만 인간은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능력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진화했다.

특히 오늘은 그 수위가 더했다.

위기의 순간에도 기지와 인연의 활용으로 어렵지 않게 극복했다.

그는 놀랍게도 신의 영역에 이른 자임이 확인됐다.

드래곤 신인 하르케우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말을 섞었다.

마족과는 절대 말을 안 섞는 정령과도 놀라울 정도의 친밀감을 보였다.

인간 제국 여자 황제는 그에게 아주 푹 빠졌다.

그리고.

‘내 지참금인데…….’

아르티아는 최상급 마족이었지만 분명하게 여성체다.

마계 혼인 방식은 독특했다.

강한 남자 마족의 씨앗을 받기 위해 여성체 마족은 지참금을 지불했다.

남자 마족의 씨앗과 성을 하사받기 위해 치르는 금액.

대부분 마력석으로 지불했지만 아르티아는 포인트를 준비했다.

상대 남자 마족이 준신급이기를 바랐다.

최상급 마족들 중에서도 상위급은 카르마 포인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짝이 될 것이다.

아르티아는 포인트를 착실하게 모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인간에게 빌려주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고민스러웠다.

이자가 짜다는 말은 거짓이다.

진실은…….

“하아.”

당당하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인간을 보며 아르티아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지참금이었던 카르마 포인트.

빌려줘야 할 것 같다.

부정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말.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며 얼굴이 붉어졌다.

“……빌려줄게.”

“고마워. 알파닥.”

“알파닥이 아니라 아르티아야! 아 르 티 아!”

이름을 강조하는 아르티아.

씨익.

인간 남자가 웃는다.

“아르티아라니 이름 예쁘네.”

“…….”

예쁘다는 말에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아르티아.

“성격과 전혀 안 어울리지만.”

“뭐라고!!! 이 바보 멍청이 코트노 썩은 똥 같은 XXX!”

찰지게 욕을 퍼붓는 아르티아.

그래도 좋았다.

저 인간에게 포인트를 빌려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

“포인트 거지라…….”

창밖을 내다봤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패배한 연합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반항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광룡까지 제압한 나였다.

미친놈이 아니고서 감히 크로얀 제국에 검을 겨눌 놈은 없었다.

이번 전투로 수확이 엄청났다.

떼로 몰려왔던 마법사들은 지상으로 추락해 피떡이 됐다.

그들이 남긴 아이템들만 해도 장난 아니게 비싼 물건들이었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과 기사들에게서 수집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마법무구에 마력석까지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넘칠 지경이다.

사기도 하늘을 찔렀다.

눈을 뜬 모든 자들이 나의 무력을 직접 확인했다.

사르칸 마탑의 탑주가 충성 맹세를 뱉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무적(無敵).

이 대륙에서는 이제 인간으로서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무슨 일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황제 아린.

현명한 여인답게 나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챘다.

“통장이 텅장이 됐어.”

“텅장요?”

막상 아린은 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응.”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대화 상대 정도는 되었다.

급한 대로 알파닥에게 포인트를 빌렸지만 양에 차지 않았다.

노바 형님을 이용해 엘프 여왕에게 빌릴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기분 좋을 리 없다.

마이너스 통장은 엄연히 빚이다.

부자로 살다가 빚쟁이가 된 기분은 아주 더럽다.

“……땡겨요.”

“???”

“베커가 말했잖아요. 부족하면 땡기라고요.”

아린이 배시시 웃는다.

예쁘다.

땡기라는 말도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아직 가면을 착용하고 있는 아린.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린은 가면을 벗지 않았다.

제국을 온전히 되찾는 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공개될 것이다.

“쉽지가 않아.”

“제가 돕겠어요. 베커가 원하면…… 뭐든지 할게요.”

무한 애정이 담긴 말이다.

스윽.

다가온 그녀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녀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하고 고마웠다.

좋은 여인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은 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에요.”

마음대로…….

아린의 말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

번개처럼 기발한 계획이 떠올랐다.

“베커…….”

내가 몸을 가볍게 떨자 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고맙다.

진심으로.

“당신은 현명한 조언자야.”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더없이 활짝 웃는 아린.

붉은 입술이 앵두처럼 달콤해 보였다.

가볍게 입맞춤…….

- 적당히 해라. 오빠신…….

알파닥의 짜증 섞은 목소리가 들렸다.

퇴근 안 해?

- 네가 내 포인트 갚을 때까지 옆에서 다 지켜볼 거야!

강렬한 각오의 의지가 감지된다.

악덕 채권자 모드다.

사생활도 전혀 존중해 주지 않는다.

- 그런데 어떻게 갚을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출 금액이 커.

알파닥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괜찮다.

방법이 생각났다.

-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신들도 버거워.

신도 버거워할 정도로 무거운 채무를 안긴 그 어떤 분!

낯짝이 보고 싶다.

- 내가 아는 최상급 마족들 중에 포인트 좀 가진 분들이 있는데……. 이자가 세. 혹시 급할 때 필요하면 말해.

싫다.

딱 봐도 최상위 포식자 사채업자다.

“아린.”

황제를 불렀다.

“네.”

“포고령이 필요할 것 같아.”

“포고령요???”

“응. 포고령.”

“갑자기 포고령은 왜…….”

“제국 재건을 위해 각 신전에 포고령을 보내.”

“신전에요???”

아린이 크게 놀랐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여러 신들의 관심 가득한 시선.

“가장 많은 포인트, 아니 기부한 신전이 제국의……. 중요한 신전이 된다고 말이야!”

하늘에 대한 선전포고.

지금껏 놀고먹던 신들에 대한 경고이자 조건을 던졌다.

- 오빠신 미쳤어! 지금 신들에게…….

낌새를 알아챈 알파닥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안 미쳤다.

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회인.

이제 이쪽 신들도 땅 짚고 헤엄치던 시대가 지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경쟁이 필요했다.

나에게 십시일반 포인트를 나눠줄 신.

그 신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신이자 제국의…… 핵심 신전의 주인이 될 것이다!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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