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0장. 쌈마이 공작
‘뭐가 이렇게 복잡해?’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광룡 샨트리아.
맹세를 통해 완벽하게 베커 공작에게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레어에 대한 비번까지 넘겨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자신을 차지한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리라 마음도 먹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가죽에 기생하는 샨트리아의 의념은 무한했다.
잘 버티면 결국 승리자는 자신이 될 터였다.
드래곤의 정신력은 인간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다.
놀라운 건 과거보다 정신이 더 맑다는 사실.
9서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마나가 제한되면서 광기가 많이 걷혔다.
한 차례 정화된 샨트리아는 그만큼 맑은 정신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집중했다.
폭력으로써 자신을 굴복시킨 최초의 인간.
짐작했던 것보다 신분이 엄청났다.
죽어서 신이 된 하르케우스와 대등하게 상대했다.
마신의 종인 최상급 마족도 인간을 대하는 데 조심스러웠다.
그뿐 아니다.
정령왕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최상급 정령도 인간을 무척 아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특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마 포인트를 알고 있는 인간이라니…….’
자신도 살아생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카르마 포인트의 비밀.
그 비밀을 알았다면 치솟는 광기는 적당히 부리고 곧장 신이 됐을 것이다.
하르케우스가 신이 된 모습은 배가 아팠다.
인간 베커와 동화되면서 그를 통해 모든 걸 함께 느꼈다.
지금은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내복 수준에 있지만 이렇게 사용되다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신이 될 거야!’
드래곤으로는 살 만큼 살고 즐길 만큼 즐겼다.
죽음 이후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자 살아있을 때보다 더 강한 희망이 샘솟았다.
문제는 스스로 포인트를 적립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뿐.
자신을 굴복시킨 인간 베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모든 상황이 좋았다.
마족은 인간 베커에게 앵벌이를 하라고 추천했다.
몹시 당황하는 인간 베커.
- 할 말이 있습니다.
의념을 통해 의사를 타진했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인간과의 소통 방법.
나 지금 신경 예민해.
인간이 대놓고 반말이다.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꾹 눌러 참았다.
더럽고 치사해도 칼자루는 인간이 잡고 있었다.
- 앵벌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줘? 뭘?
인간이 묻는다.
그의 물음에 호기심이 진하게 배었다.
‘좋았어!’
이런 식의 내복 운명으로 사용되고 사라질 수는 없는 법.
- 이 모든 상황이 무능력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내친김에 과감하게 질렀다.
지금 나 까는 거야?
인간의 내적 음성이 까칠하게 변했다.
과거 같았다면 감히 드래곤인 자신에게 이 같은 망발을 하는 인간이 있다면 당장 찢어 죽여 씹어 먹었을 것이다.
인간 고기를 맛본 적은 없지만 다른 일족들 중에는 특히 별미로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 강해져야 합니다.
누가 몰라?
-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샨트리아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입장에서 말을 건넸다.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알리는 방법이었다.
그래?
인간 베커가 강한 흥미를 보였다.
‘흐흐흐. 걸렸어!’
- 마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마법?
인간이 진심으로 놀라며 재차 확인해 왔다.
- 저 드래곤입니다.
특히 드래곤임을 강조했다.
비록 의념체로 9서클 마법을 온전히 펼치지는 못했지만 해당 지식은 차고 넘쳤다.
내 현재 마나 수준으로는 8서클도 버거워.
인간 베커가 자신의 수준을 잘 알고 있다.
서클 확장이 쉬운 게 아니다.
- 다 방법이 있습니다. 몇 년만 고생하시면……. 마법의 끝을 보실 수 있습니다.
끝? 설마…….
- 맞습니다. 9서클!
9서클을 은근히 강조했다.
드래곤으로서 인간을 9서클로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샨트리아는 가능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소요 시간은 필요했다.
정말? 그게 가능해???
인간 베커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차 묻는다.
‘이제 마무리!’
샨트리아도 유년 시절에는 꽤나 눈칫밥을 먹고 컸다.
고룡이 되면서 사고를 쳤지만 청소년 시절에는 평범하게 어른들에게 구박도 받고 동네 일족 형들에게 얻어터지며 보통 드래곤처럼 성장 과정을 거쳤다.
- 저만 믿으십시오. 확실히 9서클 마법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공짜로?
꽤 의심 많은 인간이다.
제대로 맥을 짚었다.
이쯤 되자 솔직하게 나가라고 본능이 반응해 왔다.
-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
예상했다는 듯 말하는 인간.
- 저를 신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자존심 높은 드래곤이 하찮은 인간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내심 쫀심은 상했지만 신이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하르케우스도 신이 됐지 않은가.
기회가 된다면 그를 다시 만나 경쟁하고 싶었다.
그거 쉬운 부탁 아닌 거 알지?
인간이 한 박자 쉬고 물었다.
-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약삭빠른 인간이 추가 조건을 원했다.
이럴 줄 알고 차선책을 하나 더 생각해 둔 샨트리아.
- 저만 알고 있는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욕망의 포인트를 잘 알고 있던 샨트리아.
보물 창고?
- 멸족한 옛 드워프 일족의 비밀 창고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확실한 한 방.
콜!!!
인간이 미처 알아듣지 못한 말로 대꾸했다.
그러나 샨트리아는 말투만으로도 긍정적인 대답인 것을 알아챘다.
그 한 마디로 인간과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걸 알았다.
- 콜!!!
***
아! 세상은 역시 살 만한 곳이다.
쥐죽은 듯이 가만있던 샨트리아가 따뜻한 금융치료로 날 보듬어줬다.
그깟 신 만드는 거 일도 아니다.
포인트 좀 떼주면 된다.
문제는 지금 내 포인트가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살던 동네 지구와 체계가 많이 달랐다.
아는 신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타국인을 상대하는 것처럼 시스템은 몹시 불친절했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지구 알림음이 그리울 정도다.
신맥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여차하면 여러 신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만 이곳은 여건이 그렇지 못했다.
물론 답은 존재했다.
샨트리아의 말처럼 내가 강해지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기준점이 너무 높다.
지금 수준으로는 본 게임에서 바로 사망할 각이다.
마법 수준과 서클을 서둘러 늘려야 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안전을 언제까지 맡긴다는 건 미련한 짓이다.
튜토리얼 종료가 지금까지 겪어온 일을 두고 한 말인 것을 보면 다음 판은 꽤 클 것이다.
쫄렸다.
하늘 위의 또 다른 하늘의 등장과 같다.
- 뭘 그렇게 생각해? 오빠신 앵벌이 알바 안 해봤어?
알파닥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목소리가 무척 거만해졌다.
고서클 레벨자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알파닥. 내가 생각보다 곱게 컸다.
- 곱게 커? 그 말을 믿으라고?
믿어라! 나 쌈마이 공작 아니다!
- 믿어줄게.
알파닥이 의외로 쉽게 믿음을 내비쳤다.
- 포인트 통장에 꽂혀 있는 숫자만큼만.
나쁜 놈!
언젠가 복수하고 말 테다.
- ……다음에 볼 때까지 안녕.
그 틈에 비비안이 굿바이 인사를 전했다.
아직 내 품에 안겨 있는 아린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
왠지 살짝 찔렸다.
고마워. 나의 정령.
고개를 끄덕이는 비비안.
팟!
주저함도 보이지 않고 빛과 함께 사라졌다.
- 포인트 정산을 받았으니 나도 이만 사라져 주마. 클클.
이자 받은 사채업자 같은 음흉한 웃음을 날리는 하르케우스.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나의 인사도 받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괜히 쫀심이 상했다.
지구에서는 신들도 부러워했던 내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라니!
- 오빠신 앵벌이 시작해야지. 이러다가 거지꼴 못 면해.
알파닥이 빚쟁이처럼 채근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빚이 늘어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 포인트 갚다가 죽을 수도.
그때.
파아앗!
느닷없이 빛이 터졌다.
그리고 등장한 한 존재.
- 도, 동생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전혀 생각지 못한 그가 나타났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