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7장. 광룡 샨트리아(2)
“광룡 샨트리아……!”
아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드래곤을 입에 올리는 일 자체가 마법사들에게는 금기어였다.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
그들은 중간계의 수호자이자 지배자였다.
함부로 입에 담으면 마법사들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설이 돌았다.
드래곤 일족들은 주로 유희 중일 때가 많다.
중간계 각 종족에 섞여 무한한 삶을 즐겼다.
평범한 인간처럼 상인이 되거나 마부, 용병, 학자가 되어 사는 드래곤도 많았다.
유희에 따른 제약은 없었다.
다만 직접적 현신은 제한됐다.
워낙 강대한 힘을 소유하다 보니 신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는 말이 있기는 했다.
그런 드래곤들 중에도 괴짜가 섞여 있는 건 당연했다.
드래곤들 중에 대대로 로드 자리를 차지한 골드 일족보다 더 강력한 마나를 소유했다는 레드 일족.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일족의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워낙 강하다 보니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 힘을 발산하기 위해 마계에 들어가 깽판을 치는 레드 일족도 생겨날 정도였다.
평안한 일상을 거부하고 거친 파괴를 사랑하는 레드 드래곤.
강한 존재로 태어났어도 로드가 될 수 없는 성품을 가진 그들은 중간계의 골칫덩이였다.
개중에 근래 가장 문제됐던 드래곤이 샨트리아였다.
중간계 인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희를 빙자해 엄청난 살인과 파괴를 일삼았다.
역사서에 기록된 희대의 살인마와 파괴자가 저지른 사건 대부분이 샨트리아의 짓이었다.
결국 당대 드래곤 로드였던 골드 일족 하르케우스가 샨트리아를 소멸시켰다.
장장 100년간 이어진 혈투.
특별히 아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싸웠던 전투로 중간계 일반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간도 다르게 흘렀다.
철저히 감춰진 드래곤들의 비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르케우스의 보호를 받던 제국은 그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샨트리아의 가죽 갑옷을 하르케우스가 제국 마탑에 맡겼기 때문이다.
당시 로드였지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하르케우스였다.
하르케우스는 일족도 믿을 수 없었다.
샨트리아의 갑옷을 착용하는 순간 남아 있는 오염된 의식에 전염될 수 있었다.
죽었다 해도 그것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소멸과 동시에 마나로 돌아갔을 테지만 샨트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전투 시작 전에 둘은 마나의 이름으로 내기를 걸었다.
샨트리아는 자신이 죽게 되면 의지가 담긴 가죽은 인간 세상에 남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힘을 다해 중간계를 소멸시키겠다고 로드를 협박했다.
당시 상황으로 하르케우스는 샨트리아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샨트리아는 강했다.
전투는 쉽지 않았고 힘들게 끝이 났다.
하르케우스는 남은 수명을 소진해가며 샨트리아를 제압했다.
예상대로 샨트리아는 죽었고 맹약대로 가죽은 남겨졌다.
그리고 어느 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제국 황실에서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지만 역시 영원한 건 없었다.
황제의 입을 통해 새어나갔을 샨트리아의 갑옷에 대한 비사.
그러나 누구도 감히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크로얀 제국은 대륙 제일의 가문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패망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샨트리아 가죽 갑옷.
그때 사라졌던 갑옷이 갑자기 등장했다.
‘위험해!’
아린은 정신이 혼미해져 미칠 것 같았다.
베커의 적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었다.
8서클 마법사도 벅찬데 샨트리아의 가죽 갑옷까지 나타났다.
‘마탑이 제국의 소멸과 관련 있어!’
아린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샨트리아의 가죽 갑옷은 제국 황실 특별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르케우스의 마법에 의해 황제만 열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제국 멸망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
황실 마탑 서고의 운명과 달랐다.
그리고 지금 그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샨트리아의 가죽 갑옷이 등장했다.
그것도 마탑주 데오드란과 함께 말이다.
“베커……. 꿇어라! 네가 항복하면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하마! 너를 내가 세울 마법 제국의 공왕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데오드란 탑주가 베커를 유혹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회유였다.
샨트리아의 가죽 갑옷을 착용한 마탑주는 무적 중의 무적이다.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에게 최상급 정령을 소환 가능한 베커가 합류한다면 어렵지 않게 마법 제국이 완성될 수 있었다.
“…….”
모두의 시선이 베커를 향했다.
누가 봐도 둘의 전투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신성한 정령의 힘이 담겨 있는 무기도 소용없었다.
자칫 잘못 판단해 여기서 개기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자초하는 꼴이 된다.
이성이 존재하고 목숨이 소중하다는 걸 알면 누구든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씨익.
베커 공작이 웃는다.
“어이 데오드란 마탑주.”
친밀한 단어지만 다분히 싸가지 없는 어투로 데오드란을 부르는 베커 공작.
입가에 비웃음이 진하게 걸렸다.
“이노오오옴!”
데오드란은 가죽 갑옷을 착용하면서 더욱 포악해졌다.
가슴에서 들끓기 시작하는 살육의 본능에 덩달아 동요했다.
인내심 따위는 사라지고 눈앞의 모든 걸 모조리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샨트리아 갑옷이 갖고 있는 부작용인 셈이다.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활성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커의 태도에 분노가 끓어오른 데오드란은 마나를 불어 넣었다.
‘빨리 끝내야 해!’
한편으로 데오드란은 불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광룡의 광증이 자신을 영영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맹약에 의해 아직 한 번의 공격을 더 막아내야 했다.
“쏴라! 어서 쏴!”
데오드란이 소리쳤다.
“재촉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지금 쏘려고 했으니까!”
끼릭.
말과 함께 시위를 당기는 베커.
파아아앗!
마지막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
- 야! 오빠 신 미쳤어? 쏘면 안 돼! 생각 잘해! 방금 전 내가 말한 그거 엄청 특혜야. 이계 쓰레기가 마족이 되는 게 쉬울 거 같아? 한 마디만 뱉어! 마신을 주신으로 받들겠다고 말이야!
알파닥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귀가 아플 정도로 맹렬했다.
알파닥…….
그녀를 불렀다.
- 결정했지? 그래 잘했어. 오빠 신이 좋아하는 미녀도 마계에 엄청 많아. 나도 그중에 하나야. 그러니까 마족 되자! 그럼 저딴 거지 같은 8서클 마법사에게 희롱당하지 않아도 돼. 마신에게 복종하면…… 기념으로 저 마법사 박제해 줄게.
알파닥이 인심 좋게 선심을 썼다.
미녀를 팔아 날 유혹했다.
알파닥은 그녀의 말대로 대단한 미녀였다.
마계에 미녀가 많을 거라는 건 느낌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난 인간이 좋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 인간이 뭐가 좋아! 수명도 마족 꼬리만 못하잖아.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쓸데없는 감정의 노예로 일평생을 살잖아!
알파닥이 인간의 단점을 나열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그게 장점이다.
몸이 약해서 서로 돕고 산다.
마음이 약해서 불우한 이웃을 돌볼 줄 안다.
감정 때문에 웃고 울며 세상이 주는 온갖 감정적 맛을 느낀다.
육신이 없는 신과 달랐다.
짧게 살아도 진하게 내려진 육수 맛과 같은 인간의 삶.
- 미친……. 그게 뭐가 좋아!
인간이 아닌 마족은 절대 모른다.
인간의 삶은 신들도 부러워한다는 걸 말이다.
- ……맞아요. 어쩔 수 없이 정령이 되었지만 인간으로서 삶이 그리워요.
비비안이 나의 말에 동조했다.
- 언니! 애 헷갈리게 하지 마.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뭐가 좋아? 고작 한 방이면 쓰러져 죽을 허깨비들인데…….
알파닥 한 가지만 묻자.
- 뭐?
데오드란을 향해 화살을 겨눈 채 대화는 이어졌다.
나름 진지한 순간이다.
너 안 죽냐?
- 뭐라고???
마족은 안 죽냐고!
꼭 필요한 질문으로 짧고 명확하게 물었다.
- 당연히 죽지. 하지만 인간보다는 엄청나게 길게 살아. 하급 마족은 3000년, 중급은 5000년, 상급은 10000년 정도 살아. 그리고 최상급 마족은 몇만 년이나 살 수 있어. 어때? 대단하지?
알파닥이 자랑스럽게 답했다.
피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 지금 비웃는 거야?
그렇게 길게 살면 뭐가 좋은데?
보아하니 철저하게 계급 사회 구조를 띠고 있는 것 같은데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 강해지잖아! 싸워서 상대의 능력과 수명을 흡수하면 짜릿해.
그거 저주야.
- 뭐라고 저주? 말 다했어! 왜 그게 저주야! 축복이지!
애하고 말을 주고받다 보니 입만 아프다.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사는 묘미를 몰랐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고 매 순간 마음을 나누며 웃을 수 있는 자유.
싸워서 빼앗는 건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기 쳐 돈을 쓸어 담아 펜트하우스에 살고 좋은 차 타면 행복할까?
돈이 주는 기쁨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내가 땀 흘려 번 돈만이 행복의 원천이 된다.
그것도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무의미하다.
좋은 집과 호화 침대도 살다보면 질린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회장이나 갑부도 하루 세끼 먹는 일은 벅차다.
그야말로 산해진미도 먹다 보면 질린다는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린 후 배고플 때 가볍게 먹는 빵과 우유 한 잔은 배부를 때 먹는 특급 호텔 뷔페보다 그 기쁨이 크다.
- 패배자들의 변명이야! 어설픈 자기 위안이고!
너 죽어 봤어?
- ???
그럼 말을 말어.
- 그럼 넌 죽어 봤어! 죽어 봤냐고!
어.
- 뭐라고???
어이없어하는 알파닥의 반응.
그러나 진실이다.
- 저 말이 맞아요.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한 이와 함께할 수 있는 삶. 그게 바로 신이 주신 진짜 행복이랍니다…….
비비안이 다시 한 번 동조했다.
- 난 인정 못 해! 강한 자만이 모든 걸 갖는 거야! 그리고 마음껏…….
알파닥이 큰소리를 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던진 말의 의미가 가볍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흐흐흐흐. 어서 쏴라! 쏴!”
눈동자가 점점 더 빨갛게 변해가는 데오드란 탑주.
상태가 좀 이상해 보였다.
광룡의 가죽 갑옷을 착용하더니 진정 미친 모양이다.
파스스스슷.
놈의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강렬한 붉은 기운도 불길했다.
위험이 더 증폭되고 있었다.
그냥 놔두면 더 큰 사고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죽엇!!!”
- 안 돼! 그걸 날리면…….
핑!!!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