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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3장. 날 믿어. (1,238/1,284)

1263장. 날 믿어.

‘다 끝났어! 크크크.’

데오드란은 크게 만족했다.

베커 공작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 직후 얼이 빠져 있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여황제의 상태도 마찬가지.

기회를 엿보고 있던 데오드란은 순간이동마법을 펼쳐 단박에 아린 황제를 붙잡았다.

8서클 마법사의 완벽한 기습공격!

여황제의 목을 잡았다.

“큭!”

마나의 손아귀에 잡힌 아린이 짧은 비명을 토했다.

무지막지한 마탑주는 인정사정없이 아린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 뒤를 공격당한 아린은 단숨에 사지가 마비됐다.

마나 사용은 물론 자신의 육체 통제권까지 잃었다.

“헉!”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베커 공작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소환된 최상급 정령이 무심한 시선으로 공격을 감행한 데오드란을 바라봤다.

지상에 운집한 인간들의 시선도 마찬가지.

마탑주씩이나 되는 8서클 마법사가 비겁하게 기습을 감행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대마법사도 아니고 무려 마도사라는 칭호를 받는 존재가 바로 마탑주였다.

함부로 허언을 뱉어도 안 되는 자리였다.

왕 못지않은 위엄을 지키는 존재가 마탑주다.

그런데 오늘 비열하게 기습공격을 강행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천박하고 비겁한 행보였다.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으로 인상을 쓴 얼굴이 좋지 않았다.

시선을 받은 데오드란은 뻔뻔함으로 묵묵히 버텼다.

자존심 따위가 위기에서 구명해주거나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기록된다.

오늘의 수치는 훗날 영광으로 각색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베커 공작 놈을 반드시 무릎 꿇려야 한다.

앞으로 최상급 정령을 부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수치스러운 짓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그러고도 마탑주라 할 수 있나!!!”

베커 공작이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크크크크.”

데오드란의 입가에는 비겁한 미소가 걸렸다.

“항복하라. 그러면 황제를 살려주마.”

단단한 철판을 얼굴에 깐 데오드란은 도리어 협박을 가했다.

‘조금만 버티면 돼!’

정령은 소환사의 마나량에 따라 중간계에 강림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진다.

최상급 정령이라면 머무는 데 소요되는 마나가 적지 않을 것이다.

데오드란은 여러 계획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세웠다.

“비겁한 놈……. 으드득.”

베커 공작이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런 눈빛은 여러 번 겪었다.

그들 모두가 다 패배자가 되어 사라졌다.

- 그놈과 똑같군.

최상급 정령 비비안이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데오드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와 같다는 말이야?’

최상급 정령이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정체가 노출된 상황은 아니다.

마탑에서 관리하는 정령 목록에는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은 비비안.

데오드란을 누군가와 비교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 마탑 놈들은 언제나 비겁해.

비비안은 데오드란의 태도에 마법사들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다.

어차피 정령과 좋은 관계에 있는 마법사는 없었다.

“말이 심하구려.”

데오드란은 최상급 정령과 벌써부터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정령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마법사들도 대놓고 적이 되는 건 두려워했다.

정령들과 한 번 관계가 어긋나면 평생 고생하게 된다.

마법도 사대 원소를 기본으로 해서 운용된다.

정령과 관계가 틀어지고 틈이 벌어지면 그 정령에 속하는 원소 마법에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아직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령 친화력과 연관된 것만은 확실하다.

- 네 행동이 부끄럽지 않나?

“…….”

비비안의 물음에 데오드란은 입을 굳게 다물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친화력이 높기에 정령이 저렇게 나오는 거야?’

정령사들과 정령이 가깝다지만 대부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존재하는 환경과 차원이 달랐다.

정령계에서 정한 규칙이 따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

중간계에 강림하되 일정 이상 선을 넘지 않도록 정령왕이 정한 행동 규칙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을 보니 뭔가 달랐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비비안은 스스럼없이 정령사와의 친밀한 감정을 드러냈다.

데오드란은 그런 베커 공작의 정령 친화력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포섭하지 못하면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다!’

정령사가 죽으면 정령은 더 이상 마음대로 중간계에 나타날 수 없다.

소환자가 없는 정령의 출현을 중간계가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고위급 정령들에 대해서는 더욱 강도 높은 제재가 적용된다.

“폐하를 놔줘라.”

베커 공작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잘도 내뱉는다.

“네놈이 항복하고 나의 종이 되겠다고 한다면 놓아주지. 흐흐흐.”

데오드란은 오늘 밑바닥까지 본심을 드러냈다.

비웃음을 입에 걸고 한껏 이죽거렸다.

“결투를 청한다.”

갑자기 베커 공작이 결투를 청했다.

‘결투?’

자신의 마나 손길도 막지 못한 놈이 감히 결투를 언급했다.

“패배하면…… 네 종이 되겠다.”

‘마지막 발악인가?’

데오드란은 순순히 대답하는 베커 공작의 태도에 의구심을 품었다.

충분히 상대의 실력을 파악한 뒤다.

그의 도발과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최상급 정령의 도움을 받으려고?”

“……내 순수한 힘만을 사용하겠다.”

‘멍청한 놈!’

데오드란은 반가운 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약하라.”

기회가 주어질 때 빠르게 잡아야 하는 법.

계산을 끝낸 데오드란은 맹약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조건.

자신이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나의 이름으로 맹약한다. 나 베커 황실수호공작은 데오드란 탑주와의 결투에 순수한 나의 능력만을 사용할 것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뱉은 맹약.

몇 마디 말에 불과했지만 마나의 맹약을 입에 담는 순간 영혼에 깊이 각인된다.

바로 죽거나 서클이 무너지지는 않지만 마나의 맹약을 어기면 그 대가로 마법은 자동적으로 퇴보하게 된다.

마나와 반응하는 언령의 보이지 않는 규칙과 제약의 효력이다.

“미쳤군……. 크크크.”

데오드란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쉬릭.

잡고 있던 여황제를 베커 공작에게 던졌다.

이것으로 결투는 체결됐다.

쉬이이잇.

여황제가 베커에게 날아갔다.

덥석.

여황제를 받아 안는 베커.

“……왜…….”

아린이 슬픈 눈으로 베커를 바라봤다.

무능한 자신으로 인해 여러 번 고생하게 된 연인의 운명이 안타까웠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날 믿어.”

베커는 이번에도 두려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아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의 맹약까지 마무리된 일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순간.

스윽.

베커는 그녀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덤벼라. 마나의 거짓 추종자여!”

먼저 데오드란을 자극하는 베커 공작.

“흐흐흐흐흐. 네놈의 입을 반드시 찢어주마!”

데오드란 역시 지지 않고 살기를 풀풀 날렸다.

파바바밧.

강하게 부딪치는 두 사람의 눈동자.

“…….”

눈이 있는 자들 모두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본격적인 결투를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이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 오빠 너 완벽하게 미쳤지? 와아아! 결투? 실력도 쥐꼬리만 한 오빠님이 사고 한번 거하게 치셨네요! 

마신 이름으로 맹세한 알파닥은 무슨 심사인지 꼬박꼬박 오빠라 부르면서 할 말 다했다.

그래 미쳤다!

저 가증스러운 마법사 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박살내 버릴 것이다!

- 그런 선언은 능력되는 분들이나 뱉는 거고! 오빠 너는 감정만 앞세우는 멍청 용자잖아!

멍청 용자…….

팩트에 충격이 밀려왔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 계획이 있나요?

비비안이 물었다.

그녀의 도움까지 마나의 맹약으로 거절한 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 언니. 저 오빠 자식 무계획이 계획인 인간이잖아요. 아우! 내가 돌아버리겠네. 괜히 저런 인간 오빠를 담당해서…….

알파닥이 후회 가득한 말을 쏟아냈다.

괜찮다.

난 나를 믿는다.

“아린 안전한 곳으로 피해.”

“……베커 조심해요.”

나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으려 했던 아린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제는 이판사판 막판이다.

아린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 스스로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비안 아린을 부탁해.

- ……알겠어요.

- 뭘 부탁해! 여성체 마음은 쥐뿔도 모르는 나쁜 제비 새끼 오빠 같으니라고!

감정을 팍팍 담은 알파닥의 막말.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현장에서는 아린이 가장 약한 존재였다.

“용기가 가상하니 선공을 양보하마. 능력껏 재주를 보이거라.”

데오드란은 멍청한 놈답게 깔아 놓은 지뢰를 알아서 밟았다.

“내 공격을 세 번만 막아라. 그걸 막아낸다면…… 네 종이 되겠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도 덤으로 훅 던졌다.

“……세 번?”

혹할 만한 조건으로 미끼를 던지자 살짝 물어보는 데오드란.

“왜 자신 없나?”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며 다시 한 번 미끼를 흔들었다.

“허락한다.”

“너도 나처럼 마나에 맹세하라.”

“……의심이 많은 놈이군.”

누가 할 소리!

“맹세하면 비겁하게 기습 공격한 것도 용서해주지.”

“……좋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 사르칸 마탑의 주인 데오드란은 네놈의 공격을 세 번 막아내겠다!”

걸렸다! 요놈!

- 진짜 대책은 있는 거야?

포부도 당당한 내 모습에 알파닥이 당황해 물었다.

기다려봐! 이제부터 시작이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아공간 개방!

의지를 담아 속으로 외쳤다.

파앗!

활짝 열리는 아공간.

스윽.

손을 집어넣었다.

턱!

손에 잡히는 물건 하나.

천천히 아공간에서 그것을 빼냈다.

파아아앗.

눈앞에 보이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물건.

- 헐! 이, 이건 또 뭐야!!!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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