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장. 마탑주(3)
‘건방진 놈! 감히 나를 상대로…….’
데오드란 탑주는 분노했다.
근본도 모르는 검은 머리칼의 마족 놈이 무례하게 자신을 무시했다.
게다가 마탑 소속 마법사들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 생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발생했다.
탑주로서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
그런 상황에서 겁도 없이 반말을 지껄이며 항복 운운하는 베커 공작 놈.
8서클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손길로 숨구멍을 움켜잡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마나의 순수한 능력을 각성해야 펼칠 수 있는 마탑의 비술이다.
놈의 숨이 느껴졌다.
공간을 넘어 전해져 오는 놈의 숨.
한 줌 숨이라도 토하고 싶어 헐떡거렸다.
방금 전까지 나불거리던 주둥이가 막혔다.
‘죽여 버리겠어!’
한동안 잠잠하니 드러나지 않았던 살인 본능이 깨어났다.
새하얀 백발의 선한 마법사 같은 인상과 달리 데오드란은 무척 잔혹했다.
그래서 마탑의 탑주는 아무나 맡는 게 아니다.
뛰어난 마법 실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완벽하게 속일 줄 알아야 한다.
잔혹한 손속은 기본.
친분 있던 동료나 선후배들도 앞길에 방해된다면 과감하게 죽일 수 있어야 한다.
데오드란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이 자리에 올랐다.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다스리는 마탑의 주인은 그렇게 탄생한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항복?”
목을 틀어잡고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적응하기 힘든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에 누구 하나 따지고 드는 자가 없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8서클 마탑주는 무적이었다.
“크으.”
뭔가 말하려 했지만 목줄이 잡힌 베커 공작은 가래 끓는 신음만 뱉었다.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이 같은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눈빛으로 보아 뭔가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반지만 빼앗을 수 있다면…….’
그 와중에도 데오드란의 눈동자는 베커 공작의 손가락을 향했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골드 드래곤 하르케우스의 마법이 담긴 절대반지.
저 반지 덕분에 크로얀 제국은 대륙 역사상 가장 길게 국가와 국력을 유지했다.
모든 마법사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절대반지에 담긴 드래곤의 힘.
‘9서클 비밀이 담겨 있지. 흐흐흐.’
우연히 얼마 전에 마탑 서고에서 발견한 내용이었다.
절대반지에 9서클에 대한 비밀이 감춰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신중한 데오드란이 이곳에 직접 나선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여황제의 목숨을 움켜쥐면 베커 공작으로부터 반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자리에 직접 강림했다.
베커 공작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놀랐지만 한편 흥분됐다.
“흐흣.”
데오드란은 승리자의 미소를 흘렸다.
스으으읏.
마나를 조금 더 더하자 베커 공작이 가까이 끌려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이미 사색이 된 베커.
이대로 숨을 끊어버려도 누구도 할 말이 없었다.
손에 힘을 더 줬다.
콰드득.
마나로 목을 보호하고 있긴 했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베커 공작의 목뼈가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뼈가 부러질 것이다.
“멈춰요!!!”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고 마법 가죽으로 된 갑옷을 착용한 여인이 앞에 나타났다.
데오드란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존귀한 황제 폐하가 어인 일인가?”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아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다.
아린 황제와 베커 공작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다.
그 사실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잔인하게 물었다.
여인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했다.
젊은 시절 한때 데오드란도 여인을 사랑한 적 있었다.
마탑에서 관리하던 여자 마법사.
그녀는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마법을 전수하는 스승 역할을 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감정이 싹텄다.
점차 두 사람은 남녀 간의 애정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그 당시 데오드란은 여인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낌없이 마법 지식과 물품들을 제공하는 건 당연했다.
데오드란은 의심 없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상대 여자 마법사는 그렇지 않았다.
서클을 높이기 위해 다른 선배들과도 스스럼없이 불장난을 저질렀다.
데오드란은 그 일로 눈이 돌아 사랑했던 여인과 불장난에 가담한 선배들을 죽였다.
그 이후 절대 여자, 아니 사랑을 믿지 않게 된 데오드란 탑주.
황제와 공작의 사랑 타령에 배알이 뒤틀렸다.
아무리 8서클 대마도사가 되어도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끊어내지는 못했다.
“고, 공작을 놔주세요.”
아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8서클 마법사가 두렵긴 했지만 용기 내어 걸음한 여 황제.
“놈은 마탑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놈이 죽인 마법사들은 사르칸 마탑의 미래다. 그런데 죄인을 살려달라고?”
데오드란은 진심으로 어이없어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청이었다.
만약 여기서 아린의 청을 들어준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제국 황제 명령에 굴복한 마탑주로 낙인찍히는 건 두말할 나위 없다.
“……공작을 살려준다면…… 황실 마탑 서고를 드리겠어요.”
“뭐, 뭐라고!!!!”
황실 마탑이라는 말에 데오드란은 경악을 터트렸다.
마탑 이상의 진귀한 마법서와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던 황실 마탑.
제국 황실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황실 마탑주만 알고 있다는 마탑 서고.
그곳에는 하르케우스가 하사한 9서클 마법서가 있다고 전해져 온다.
과거 제국 시절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황실 마탑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하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믿을 수 없다.”
데오드란은 100년을 넘게 살아온 마탑의 노물이다.
확인하지 않고 위험한 자를 놓아줄 수 없는 노릇이다.
“서고가 들어 있는 아공간 열쇠에요.”
아린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놓여 있는 황금 열쇠.
드래곤이 머릿장식을 이루고 있었다.
‘마법 열쇠!’
데오드란은 한눈에 알아봤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놈을 죽이고 열쇠를 빼앗으면…….’
그 순간에도 사악한 생각을 품는 데오드란.
“이 열쇠는 내가 직접 넘겨줘야만 효력이 있어요. 날 죽여서 빼앗아가면 그냥 금덩이에 불과해요.”
아린이 데오드란의 시커먼 속마음을 알아채고 소리쳤다.
“음.”
속내를 들키자 데오드란이 짧게 신음했다.
나이 어린 여황제라 우습게 봤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단 열쇠를 받고 난 다음에……. 흐흐.’
베커 놈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놈은 8서클에 오르지 못할 몸이다.
언제라도 다시 찾아내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황실 마탑 서고는 그렇지 못하다.
아공간에 철저히 봉인되어 있다.
드래곤이 제작한 까닭에 여황제의 말처럼 함부로 열 수도 없다.
계산을 빨리 끝냈다.
“황제가 부탁하니 이번 한 번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데오드란은 인심을 쓰는 척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하세요. 앞으로 베커 장 공작을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절대?”
‘지독한 것!’
데오드란은 치밀한 아린 황제의 언약 조건에 악독한 눈빛을 드러냈다.
자신의 마음속을 다 꿰뚫고 있는 여황제.
‘그래 다음에는 저놈이 아니라 네년을 죽여주지!’
둘 중 하나만 죽여도 제국 부흥군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
그리고 언제든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더욱이 여황제가 실수한 게 있다.
조건 세부사항이 부족했다.
놈을 살려주기만 하면 된다.
“좋다! 그 부탁을 허락한다.”
흔쾌히 데오드란은 아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작의 몸부터 풀어주세요.”
스윽.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커 공작을 움켜쥐었던 마나의 손길을 거두었다.
“커억! 크으으으.”
막혔던 숨이 통하자 베커 공작은 목을 감싸고 가쁜 신음을 흘렸다.
휘청.
마나 공급이 끊겨 몸이 제멋대로 휘청였다.
“베커!”
아린이 황급히 추락하는 베커를 향해 달려갔다.
“어딜!”
데오드란이 다시 손을 뻗었다.
둥!
달리던 아린의 몸이 무형의 마나벽에 막혔다.
동시에 베커의 몸뚱이는 허공에 결박됐다.
8서클 마법사의 상상을 넘어선 마나 응용력.
“…….”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 앞에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지금껏 최강이라 여겼던 황실수호공작이 오늘은 너무 무력해 보였다.
“어서 내놓거라! 어서!”
데오드란이 아린을 향해 재촉했다.
열쇠를 손에 쥐어야 만사에 안심할 것 같은 조급증이 일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아린.
그동안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진짜 황실의 보물이었다.
부흥군이 멸망하면 같이 사라져 버릴 황실 서고.
스승께서 절대 누구에게도 건네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더는 지킬 수 없게 됐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것도 아깝지 않았다.
아린은 열쇠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황금빛을 뿜어내는 마법 아이템.
“크로얀 제국 황실, 제국의 황제 아린 하르케우스 크로얀의 이름으로 이 아공간 열쇠를 데오드란 탑주에게 양도…….”
“안 돼! 그건 절대 안돼애애애애애애!!!”
그 순간 베커 공작이 귀청을 찢을 듯한 큰 목소리로 결사반대 의사를 밝혔다.
***
- 미친놈! 뭐가 안 돼!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저깟 도마뱀의 아공간 열쇠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
알파닥! 닥쳐!
네가 죽지 않는다고 헛바람 집어넣어서 진짜 죽을 뻔했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린이 지금껏 나에게도 말하지 않은 보물 곳간 열쇠.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던 건 상관없다.
그러나 내가 무능해 핍박을 받고, 또 아린의 도움을 받게 된 게 미칠 듯한 분노를 일으켰다.
지금껏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
강자라 여겼지만 8서클 마법사에 비하면 범 앞에 새끼 고양이였다.
- 저깟 열쇠 아무것도 아냐. 이 누나가 마계에 가면 수십 개 구해 줄게. 일단 살고 보자. 죽지 않겠지만 저 자식이 마음먹으면 너 사지 죄다 부러진다.
죽지 않는다는 말도 이제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속이 시커먼 마탑주에게 드래곤의 유물을 넘길 수는 없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엄청난 비밀이 저 열쇠에 있는 게 분명하다.
확실한 건 착한 아린이 나에게 주려고 했을 내 물건이다.
눈 뜨고 마법사에게 빼앗기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
- 이 상황에서도 욕심이 나? 와아아……. 슬라임보다 더 착착 붙는 욕망덩어리는 처음 본다.
알파닥이 그런 나를 비웃었다.
상관없었다.
똑똑히 들었지만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열쇠에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만이 발휘할 수 있는 절대 촉.
- 8서클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 당연히 있지.
드디어 알파닥이 듣고 싶었던 말로 대꾸했다.
뭔데?
- 엘프 장로들을 끌어들이거나 친한 드래곤에게 부탁하면 돼.
“…….”
알파닥이 또 나를 놀린다.
엘프들은 절대 맹약으로 인간 세상 전쟁에 관여하지 못했다.
특히 친한 드래곤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말에서는 살의마저 느꼈다.
두 가지 다 불가능한 일이다.
- 아!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
알파닥이 막 생각난 듯 다급히 말했다.
그게 뭔데?
- 정령왕을 부르거나 그 후계자인 최상급 정령을 소환해. 그러면 8서클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어.
정령왕? 후계자인 최상급 정령?
지금 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어?
그 순간 갑자기 퍼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존재.
갑자기 먹빛이었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