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장. 쥐 잡는 날(3)
파삭!
“!!!”
전혀 문제없던 마법 시약병이 갑자기 깨졌다.
힘을 강하게 준 것도 아니고 평소 하던 제조법 그대로 시현했다.
게다가 강화 마법진을 이용해 제조한 시약병은 특별했다.
8서클 마법사가 실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인 만큼 거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그런 병이 일반 유리병처럼 쉽게 박살났다.
“음…….”
사르칸 마탑의 탑주 데오드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나가 주는 경고였다.
8서클에 이른 마법사만이 받는 혜택들 중 하나다.
이는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일에 큰 사달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설마 그깟 제국 부흥군을 상대하는데 고전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체면 때문에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제국 부흥군의 기세가 쉽게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8서클 마법사에게는 어린아이 다루듯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과거 제국 황실과의 인연도 있어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왕국 연합군의 부름에 탑주가 즉시 반응해 움직이게 되면 마탑의 위상이 그만큼 떨어진다.
그건 갈기오 마탑의 탑주도 같은 입장이다.
그런 이유로 부탑주와 장로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사르칸에서는 다섯 명의 장로가 파견됐다.
거기에 100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대거 동행했다.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기 위해 질 좋은 마력석도 사용됐다.
누가 뭐라 해도 데오드란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유는 절대반지 때문이다.
하르케우스의 은총이 가득 담긴 절대반지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저주다.
그걸 황실수호공작인 베커 장이 사용했다.
클로얀 장로가 벌벌 떨며 보고한 내용이었다.
베커 공작은 그만큼 강했다.
홀로 왕국에 나타나 공격을 퍼부을 정도로 배짱도 좋았다.
그가 없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흔쾌히 공격에 동참했다.
그러나 내심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던 이번 공격.
“아닐게야……. 베커 공작이라는 놈이 다시 나타나도 절대 이길 수 없어. 나도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야.”
이번에 투입된 마법사와 기사들의 전력은 가히 엄청났다.
과거 제국도 이 정도 전력 앞이라면 무너졌을 것이다.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거야?”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찝찝한 기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데오드란은 마법 통신구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승전보가 전달되고도 남을 시점이다.
그러나 묵묵부답인 마법 통신구.
언짢음과 불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머릿속에는 스멀스멀 불길한 생각들이 차올랐다.
저벅저벅.
마법 통신구 가까이 다가선 데오드란.
마나를 주입했다.
그리고.
“라피터.”
차기 탑주 후보 중 한 명인 부탑주를 호출했다.
이번 제국 부흥군 공격에 있어 선봉에 서있다.
갈기오 마탑에서 그 자리를 양보했다.
왕국들도 마탑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그에 동조했다.
- …….
응답이 없다.
데오드란의 이마가 여러 겹의 주름을 만들며 꿈틀거렸다.
자신의 부름에 당장 답하지 못한다는 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설마…… 그놈이?”
데오드란은 황실수호공작을 떠올렸다.
그 이름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몹시 기분 나빴다.
멸망했던 황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자.
“흐음…….”
데오드란은 깊은 근심에 잠겼다.
마나의 경고가 가볍게 생각되지 않았다.
자존심과 경고 사이의 작은 갈등.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데오드란은 결정을 내렸다.
마탑에 앉아 매일같이 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실증나는 일이었다.
한 번쯤 전장에 나가 콧바람을 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황실 마탑에 실마리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9서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총력전이 필요했다.
제국 부흥군의 여황제는 황실 마탑의 탑주의 제자가 확실했다.
마탑에 버금가는 제국 황실의 마탑.
데오드란은 머리를 굴려 이번 전쟁에 대한 참전 명분을 확고히 했다.
파아앗.
그때 마법 통신구에서 반응이 일었다.
- 타…… 탑주님!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
수우욱.
위태로운 방어 마법진을 통과했다.
부서지기 전에는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는 방어 마법진.
아린과 나만이 마법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방어 마법진을 수정할 때 나와 아린이 마나를 주입했다.
부모를 따르는 아이처럼 마법진은 마나 제공자를 기억한다.
- 다시 한 번 말해봐! 주접 맛집? 와아! 그동안 내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주접 맛집? 너 말이면 다야!
알파닥이 유난히 시끄럽다.
주접 맛집이라는 말이 제대로 심금을 울린 것 같다.
나 말고도 알파닥에게 이전에 누가 이런 소리를 뱉은 게 확실했다.
저렇게 발끈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 낯선 세상에 떨어져 고생하는 널 위해 이것저것 신경 써줬더니 사람이 이렇게 배신을 때리네……. 이래서 붉은 피 흐르는 것들은 믿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 거야.
알파닥, 너도 피가 흐르긴 흘러?
- 당연하지! 감히 허접한 인간들과 달리 우리 마……, 음.
‘마’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알파닥이 황급히 입을 닫는다.
벌써 이런 적이 몇 번째다.
‘마’에서 말을 끊어버리는 알파닥의 태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깊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더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하늘에 별처럼 둥둥 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속속 도착하는 기사들도 지상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수고롭게 많이도 모였다.
마력석을 얼마나 때려부었는지 이동 마법진이 계속 번쩍거렸다.
- 이제 좀 쫄리냐? 겁대가리 상실한 무지한 인간 같으니라고!
아니. 전혀.
다른 인간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다.
도리어 마법사들을 보며 전투 욕구가 활활 타올랐다.
7서클 마법사가 다수다.
그 이하 마법사들도 수백 명에 달한다.
파바바밧.
놈들의 시선이 레이저처럼 뿜어져 꽂힌다.
다시 봐도 많이 모였다.
이 정도라면 각 마탑과 왕국 마법사들이 다 모였다고 할 만큼의 정예다.
제국의 과거 위상이 이 정도 규모로 대적해야 할 만큼 대단했던 것 같다.
얼마 되지도 않는 부흥군의 씨를 말리기 위해 작정한 모양이다.
- 도와줘?
알파닥이 약을 판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안 도와줄 걸 안다.
인간 세상에 개입할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 칫! 도와준 거 기억도 못 하면서!
도와줘? 날?
알파닥이 이상한 소리를 뱉었다.
알파닥이 날 도와준 기억이 전혀 없다.
만날 때마다 이계 쓰레기를 비롯해 각종 욕과 저주만 퍼부었다.
- 내가 말을 말아야지. 얘들아 뭐 해! 당장 이놈에게 뜨거운 마법을 날리거라!
알파닥이 마법사들을 향해 자기 수하 부리듯 명령을 내렸다.
“초대하지 않은 곳에 많이들 찾아오셨습니다.”
알파닥과 대화를 종료했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겼다.
마나를 한껏 담아 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입가에는 넉넉한 미소를 가득 베어 물었다.
쫄림은 1도 없다.
한 번 죽었다 회귀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이다.
죽음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는 걸 이미 알아 버렸다.
“…….”
마법사들은 아무 대꾸도 없다.
“다들 처음 뵙는 분들인데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대 크로얀 제국 아린 하르케우스 크로얀 황제 폐하를 섬기는 베커 장 황실수호공작이라 합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도 했다.
솔직히 저들 모두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맞다.
냉정하게 말해 내 봉들이다.
- 봉? 지금 쟤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하하하. 이 인간 간덩이 큰 것 보소.
알파닥이 짖어대도 내 눈에는 봉으로 보인다.
마법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각종 마법 복장과 아이템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전쟁터에 나온다고 최대한 좋은 걸 두르고 나온 거다.
마법 지팡이들에 박혀 있는 마력석도 싱싱하게 번쩍거렸다.
이들만 때려잡아도 제국 부흥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흐흐흐.
- 미친놈. 쯧쯧.
급기야 알파닥이 혀를 찬다.
누가 봐도 미친놈으로 보인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나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다.
- 비장의 한 수? 뭐?
알파닥이 궁금한 듯 물었다.
대꾸하지 않았다.
“네놈이 베커 장이더냐?”
둥둥 떠 있는 마법사 무리 중 앞줄에 서 있던 자가 소리쳐 물었다.
“누구신지?”
“갈기오 마탑의 드레이븐 장로다.”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바짝 마른 마법사였다.
“오! 드레이븐 마법사님!”
한 번 감탄사를 터트려 주고 아는 체를 해줬다.
“그래, 날 아는 놈이라면 멍청이는 아닐 터이니 냉큼 항복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준엄하게 훈계질을 시작하는 그.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뭐, 뭐라고!”
마법사 놀리는 건 쉽다.
특히 고서클 마법사들은 허영덩어리에 오만한 종자다.
말장난 대상으로 삼기에는 저만한 장난감이 없다.
“다들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다.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줬기에 고통은 짧게 끝내주마.”
어깨를 당당히 펴고 마법사들을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네놈이 실성했구나! 우리가 눈에 안 보이더냐?”
드레이븐이 발끈했다.
씨익.
입가에 보기 드문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너희들은 보이나?”
“뭐가 말이냐!”
“저거.”
손으로 지상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그 순간.
우르르릉.
때를 맞춰 진동하는 방어 마법진.
“!!!”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