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장. 우롱당하다!
“항복하셔야 합니다! 더 버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마지막으로 왕국 연합에서 자비를 베풀어 항복을 권유할 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왕성 방어막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애꿎은 백성들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제국의 임시 황성으로 사용되는 팰트론 왕국 왕성.
회의장에서 여러 귀족들의 목소리가 큰소리로 울려퍼졌다.
황좌에 앉아 있는 아린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파르르 온몸이 떨렸다.
모든 상황이 치욕스러웠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한때는 자신 앞에 엎드려 온갖 아부를 해대던 이들이 연합군에 항복하자며 열변을 토했다.
왕국 연합군이 다시 결성됐다.
2년 전 황실수호공작의 손에 의해 부서졌던 왕국들의 연합.
공작의 부재를 틈타 귀신같이 전쟁을 개시했다.
팰트론 왕성까지 오는 길이 뻥 뚫린 상황이다.
제국의 요새나 중간에 끼어 있는 영지들이 속속 항복했다.
빠른 기동력을 소유한 기사들과 기마병, 마법사, 정령사들이 대거 투입됐다.
마탑도 그런 연합군과 합류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전쟁이었다.
자연스럽게 항복 권유가 이어졌다.
멸망한 황실 직계를 사칭한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항복하면 목숨이야 구하겠지만 크로얀 제국의 직계가 아니라는 걸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일전을 다짐했지만 귀족들이 먼저 겁을 먹었다.
대부분 항복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린을 압박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내려주십시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 상당수가 강요와 협박을 했다.
간간이 비웃음을 머금은 자들도 보였다.
과거의 영화로웠던 제국 시절과 달리 진실로 충성스러운 자들이 없었다.
대부분 귀족 스스로가 목적을 갖고 신하가 된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제국의 개국공신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더 컸던 자들이다.
그러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순간 곧바로 변절자로 돌아섰다.
“무엄하다! 지금 경들은 폐하를 겁박하는가!!!”
참고 있던 카이루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엄한 눈빛으로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나무랐다.
“…….”
카이루 후작의 한마디에 모두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황실수호공작이 일인군단이라면 카이루 후작은 실질적인 제국의 병력 제공자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기사와 병사들을 다 합쳐도 카이루 후작군만 못했다.
“가, 각하! 화를 내실 게 아니라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괜히 어설픈 자존심을 내세웠다가는 우리까지 모두 죽습니다!”
“맞습니다! 제국의 부흥도 우리가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동의합니다!”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 중 진정 카이루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위기가 닥치자 알맹이와 쭉정이가 명확하게 갈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카이루 후작은 그들의 선동질에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국의 부흥이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대신 생각보다 사건은 일찍 터졌을 뿐이다.
제국이 기틀을 잡기 전에 수호공작이 사라져 버렸다.
그 뒤 불시에 닥친 시련들은 생각보다 맛이 더 고약했다.
카이루 후작은 연합군으로 불리는 다른 왕국과 대귀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만 들이닥쳐도 패배할 수준이다.
카이루 후작은 베커 장 공작이 사라진 뒤 크게 고심했다.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를 빼돌려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까지 품었다.
여기 있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걸 진작 알았다.
손 하나가 아쉬워 받아들인 자들이 대부분이다.
어중이떠중이 기사들도 지금 와서는 대부분 제 발로 도망쳤다.
이제 남아 있는 군 수준은 과거 전력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상황이 그렇게 되니 카이루 후작가의 기사들도 동요했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었다.
“경들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아린 황제의 목소리가 장내에 차갑게 울렸다.
스윽.
감정을 배제한 시선으로 귀족들을 바라보는 아린 황제.
“그동안 수고했어요.”
“???”
“떠나셔도 됩니다. 왕국 연합군에 합류해 저에게 칼을 겨눠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아린의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폐하!!!”
카이루 후작이 비통한 목소리로 폐하를 외쳤다.
“…….”
반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알을 굴리는 귀족들.
“성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시간은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아린이 최후 결단을 통보했다.
마법사이기도 한 아린에게 성문 통제권이 있었다.
팰트론 왕국이 멸망할 때 수호공작이 마법진을 손본 뒤 주어졌다.
한마디로 아린만이 마법 성문을 작동할 수 있었다.
“떠나십시오.”
아린의 단호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
“허 참.”
귀족들이 슬슬 눈치를 봤다.
그러면서 하나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혀를 차거나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다수였다.
저벅저벅.
스무 명이 넘던 귀족들 대부분이 아린 앞에서 사라졌다.
남아 있는 수는 겨우 다섯.
제국과 생사를 같이하려는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경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아린이 남아 있는 다섯 명의 귀족에게 물었다.
“신 카이루 드 드보르 후작! 크로얀 제국과 폐하를 위해 목숨을 다할 것입니다!”
“목숨을 다할 것입니다!”
카이루 후작이 충성 맹세를 읊자 뒤를 이어 나머지 귀족들이 따라 외쳤다.
빙긋.
아린이 초연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직 희망이 있어!’
여전히 아린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베커 장 황실수호공작이 사라진 뒤 수많은 밤을 괴로움으로 보냈다.
그래도 오늘까지 아린은 기다렸다.
말없이 떠났지만 베커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제국과 자신을 수호하는 황실수호공작이었다.
***
“2년이 넘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군! 2년하고도 몇 달이 지났습니다.”
“!!!”
말문이 턱 막혔다.
믿기지 않았다.
6개월 전에 방문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2년이 넘는 시간으로 늘어났다.
알파닥!
다급히 알파닥을 찾았다.
- 흐흐. 이제야 뜨거운 맛을 봤군.
알파닥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목소리에서 다분히 고소해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마법사들을 모조리 때려잡았다.
성으로 돌아와 영지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기사들과 회포도 풀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듣게 된 충격적인 사실.
갑자기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야?
알파닥에 묻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초심자도 아닌데 과도한 특혜는 사라져야지. 그게 공평한 우주 법칙 아니겠어?
“!!!”
알파닥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거 알파닥이 언급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초심자 특혜가 심히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 다른 건 못 느껴?
알파닥이 얄밉게 입을 놀렸다.
다른 거?
도저히 짐작되지 않는 다른 거.
불길함이 등골을 스쳤다.
- 포인트 이벤트도 끝났어.
그게 무슨 말이야?
포인트 이벤트가 끝나다니?
- 차원 이동이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아?
차원 이동?
그럼 설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포인트를 살폈다.
“허억!”
비명이 절로 터져나왔다.
상급신이 된 이후 포인트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알아서 차곡차곡 쟁여지는 카르마 포인트.
그 양이 대폭 줄어든 게 느껴졌다.
- 포인트가 차원 이동 비용으로 대폭 지급되었습니다.
- 초심자 보호 예수 기간이 끝났습니다.
- 차원 이동 가산세가 붙습니다.
- 포인트 환율이 자동 계산되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들려오는 알림음.
그동안 조용하다 갑자기 한꺼번에 울렸다.
누군가 날 우롱하는 것 같다.
- 우롱은 무슨. 본래 차원 이동하면 시차가 발생하는 거야. 흐흐흐흐.
알파닥도 한패인 게 분명하다.
저 웃음이 특히 미치도록 얄밉다.
제대로 당한 걸 이제야 알았다.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는 나를 지금껏 노린 게 확실하다.
누구인지 몰라도 절대 고수다.
- 뭘 노려? 드래곤도 마음대로 차원 이동이 가능한 줄 알아? 걔들도 목숨 걸고 시도하는 게 차원 이동이야.
믿기지 않았다.
지구에 이곳 차원에서 넘어간 자들이 존재했다.
- 쿠아란? 걔는 좀 특이한 케이스야. 드래곤도 아닌 드래곤이라고나 할까?
드래곤 아닌 드래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알파닥.
- 그리고 내가 경고했지. 네가 살던 곳에서 쓰레기 적당히 끌고 오라고 말이야. 모두 다 네가 쌓은 카르마야.
알파닥이 화를 내며 나에게 던지던 경고.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었다.
“으음.”
신음이 멈추질 않았다.
과거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동안 지구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차원 이동도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됐다.
차원 이동에 포인트를 써대다가는 급기야 신 레벨도 떨어진다.
“주군?”
“무슨 고민 있습니까?”
기사들이 나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 벌써 여러 번 말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 있어?
“……아린!”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