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1장. 누굴 원하나?
‘아우씨!’
손유리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욕을 다급히 삼켰다.
얼마만에 만나는 님이던가.
밤마다 높게 뜬 하늘의 달과 별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다.
바쁜 님이 어서 빨리 와 주기를.
한국대 재학 중에도 얼굴 보기 힘들었던 장태산이다.
프랑스 생활을 하면서 애써 잊어보려 노력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만난 이후에도 운명처럼 사건 사고는 연속됐다.
부득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도망쳐왔다.
가끔씩 문자를 주고받고 어쩌다 목소리 한번 듣는 게 전부인 생활이 이어졌다.
악마같은 존재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직후 확실히 깨달았다.
장태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물론 아빠 역시 장태산과 관계가 좋지 않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는 상황.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혼자 끙끙거렸다.
그래도 아빠와 태산은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줬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아빠는 자신을 과감하게 태산에게 맡겼다.
우려했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유리도 집안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인생을 살 권리가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해 가고 있다.
친일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할아버지의 삶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 삶이 태산과 아빠가 만들어 준 지금의 자유로운 삶이다.
사하 공화국에 있는 장태산의 고풍스러운 별장에서 손유리는 온전히 자신의 꿈을 키웠다.
님이 보고싶을 때마다 그만큼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숙명처럼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경호원들과도 좋은 관계로 지냈다.
그림 그리고 수다를 떨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그래도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다.
아무도 그 자리를 대신 매울 수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퍼즐의 한 조각이 돼 줄 수 있었고 전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런 존재인 장태산을 보자마자 손유리는 자신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심 부끄러웠다.
급한 마음에 배고픔을 핑계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의 품에 당장 안겨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밝은 태양 아래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사이 시간이 무르익었다.
요리 솜씨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장태산의 실력.
그가 만들어 내놓은 음식으로 한껏 배를 채웠다.
그렇게 시작된 핫한 분위기.
손유리는 속으로 한껏 기대했다.
장태산은 못 보던 사이 더할 나위 없이 멋있어졌다.
더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롯이 둘만 남은 별장 성.
장태산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와 야수 같은 눈빛에 손유리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첫사랑이자 첫 남자.
손유리는 숨을 죽이며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그려지는 장면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은 미칠 듯 날뛰었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갑자기 둔중한 프로펠러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장태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은 손유리도 마찬가지.
차마 욕을 내뱉지는 못했지만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님일까?”
손유리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은 경호원들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됐다.
이런 식의 불청객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차르가 온 것 같아.”
“차르라고 하면…… 그 남자?”
손유리는 크게 당황하며 놀랐다.
러시아 땅에서 차르라 불릴 만한 존재는 단 한 명.
“응.”
“…….”
장태산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인맥이 어디까지야?’
어느 정도 권력층과 연관이 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타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장태산은 준군사조직을 운용했다.
이 정도 조직은 권력층의 허락 없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눈치가 없는 분이야.”
장태산이 고개를 내저었다.
손유리는 대꾸하지 못했다.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이도 아니고 찾아온 손님이 차르다.
“나가봐야겠지?”
“아마도.”
장태산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손님의 등장.
“하아.”
손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후훗.”
장태산이 그 모습을 보다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보내고 올게.”
“어? 어…….”
금방 손유리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쪽.
장태산이 손유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늘 밤……. 기대하고 있어.”
“!!!”
손유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콩닥콩닥.
주책없이 멋대로 뛰는 심장.
밖을 향해 걸어가는 장태산의 뒷모습을 보며 손유리는 두 손으로 뜨거워진 뺨을 감싸 식혔다.
***
두두두두두두두둣.
차르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처음 보는 헬기들이 여러 대였다.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는 스텔스가 적용된 러시아 공격 헬기.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각종 미사일과 발칸포가 장착된 상태다.
한 대도 아니고 무려 일곱 대가 넓은 성 마당에 사뿐히 내렸다.
경호원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들도 눈앞에 실체가 보이고 나서야 비행기의 정체를 알았을 거다.
여기 있는 군사 시스템으로도 감지가 안 됐을 테니까 말이다.
“회장님…….”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씨큐리티 직원이 다가왔다.
얼굴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차르입니다. 경호원들 물리십시오.”
“넵!”
무장한 채 대기 중인 경호원들.
“모두 은신.”
무전으로 짧게 내려진 명령.
거짓말처럼 경호원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푸슈슈슛.
요란하게 돌아가던 헬기 프로펠러가 멈췄다.
타다닥.
일단의 경호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차르를 경호하는 러시아의 특수 요원들.
눈빛만으로도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가늠됐다.
저벅저벅.
차르의 기운이 발산되고 있는 헬기로 다가갔다.
띠리릿.
헬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터억.
가볍게 뛰어내리는 한 남자.
“형님!”
차르를 확인하고 반겼다.
“오! 다니엘 내 동생!”
밤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차르는 날 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덥석.
거친 러시아 남자가 나를 껴안았다.
피할 수 없는 포옹.
차르는 이곳의 땅 주인이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갑의 행위에 적극 동조하는 게 올바른 자세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지. 동생 덕분에 요즘 아주 편해.”
러시아에 알게 모르게 투자한 자금의 규모가 크다.
오는 편의가 있으면 가는 자금이 존재해야 서로 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저녁은요?”
“그건 됐고. 술이나 한잔해.”
러시아 상남자에게 뭘 바라겠나.
“안으로 들어가시죠.”
“됐어. 다니엘 피앙새에게 예의가 아니지.”
정보가 안 들어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준비해놨어.”
타다다닥.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좌관을 비롯해 일단의 경호원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달과 별이 휘영청 밝게 뜬 사하 공화국.
이곳은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 왔지만 차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앉아.”
금세 탁자와 의자, 술이 준비됐다.
안주는…….
치이이익.
고급 전투용 헬기에서 고기용 불판까지 꺼내 왔다.
러시아에서나 가능한 군용 헬기 사용법이다.
착탄이 되고 불길이 화르르 치솟자 요리사로 보이는 군인이 샤슬릭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려 작정하고 나타난 차르.
“한잔하지.”
“넵!”
철갑상어 표식이 보이는 러시아 고급 보드카가 등장했다.
끼릭.
병마개가 개봉됐다.
꿀럭 꿀럭.
큼지막한 유리컵에 보드카를 듬뿍 채워주는 러시아 형님.
나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넘친다는 걸 의미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나만 죽을 수 없는 노릇.
차르의 잔에도 보드카를 넘치게 따랐다.
경호원들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다른 국가 경호원들이라면 날 죽일 듯 노려봤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보고 싶었네. 내 동생.”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티잉.
간지러운 대사와 함께 잔이 부딪쳤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씨이익.
둘 다 강렬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러시아서도 첫잔은 원샷이 예의다.
목젖이 화끈했다.
알코올에 취하지 않지만 맛은 그대로 전달됐다.
“맛있습니다!”
“하하. 동생이랑 마시니까 술맛이 사는 것 같아.”
차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타닥 타다닷.
덩달아 불판 위에서 화톳불이 타올랐다.
달과 별을 안주 삼아 보드카를 본격적으로 마셨다.
분위기에 취했다.
차르는 진심으로 이 시간을 즐겼다.
“다니엘 덕분에 극동 지방이 빠르게 개발되고 있어.”
자본의 힘은 위대했다.
블라디보스톡에 건설된 공장은 본격적 제 역할을 하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농장들도 씨를 뿌려 수확물을 생산해냈다.
고속철도 공사도 착착 진행됐다.
“형님 덕분입니다.”
공을 차르에게 돌렸다.
“동생은 너무 착한 게 탈이야.”
나 안 착하다.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인다.
다만 일반인의 상식과 노선을 정하는 게 다를 뿐이다.
크게 보고 투자하면 이건 푼돈에 불과하다.
러시아 개발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자원의 보고.
미래 지구에서 이만한 자원 부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절 아껴 주시는 형님의 사랑에는 부족합니다.”
“러시아 국민을 대표해 고마움을 전하네.”
러시아 차르의 진심이 그대로 전달됐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파바밧.
다시 눈이 마주쳤다.
티잉.
보드카가 채워진 잔이 또 한 번 부딪쳤다.
꿀꺽.
단숨에 다시 비워진 잔.
“다니엘.”
차르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넵! 형님.”
친근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누굴 원하나?”
“???”
“고르게. 다음 대 미국 대통령.”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