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7장. 거북아 간을 내놓거라!(2)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요?”
오정그룹 부회장실.
회장이 병상에 누워있어 아직은 회장직에 정식으로 오르지 못했지만 임준형은 충분히 회장 대우를 받고 있다.
모친 황라현 여사의 전폭적으로 지지를 등에 업었다.
승계 문제도 어느 정도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
순환출자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오정의 힘으로 어느 정도 무마가 가능했다.
하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시민단체들이 고소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저기 라인을 움직여 아직까지는 잘 막아내고 있지만 찝찝함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던 중에 터진 주순자 딸의 입학 비리.
스스슥.
마지막 결재 서류에 사인한 임준형이 측근 차현태 전무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이미지에 감춰진 매서운 눈빛.
차현태 전무는 바짝 긴장했다.
강한 의사 표현이 터질 때마다 보였던 시선이다.
“별일 아니겠지만 혹시…….”
“차 전무님.”
“넵! 부회장님!”
군기가 바짝 든 차현태가 다시 긴장하며 대답했다.
“회장님이 그러셨습니다. 별일 아닌 사소한 걸 놓치다 보면 생각보다 큰 결과와 맞닥뜨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세계적 그룹을 이끌고 있는 만큼 그동안 임준형은 많이 변했다.
내적으로 갈무리된 카리스마가 묵직하게 외부로 발산됐다.
제왕의 길을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인재들이 차고 넘치는 경쟁터에서 살아남은 오정의 임원진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사자는 사자 새끼를 낳는 법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더욱 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현태 전무가 고개를 90도로 꺾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첫 번째 질책은 가볍게 끝날지라도 두 번째나 세 번째로 넘어가면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야 할 수도 있다.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오정이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명확하게 짚었다.
그리고 그의 빈 자리를 채워 줄 만한 인재는 오정에 넘쳤다.
“최선보다는 결과로 대답해 주십시오.”
“넵!!!”
‘주순자……. 이 멍청한……!’
임준형도 이미 눈치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식하게 대놓고 뇌물을 요구했다.
현찰도 아니고 딸이 타고 다닐 말을 언급하며 거기에 투자를 해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주순자의 말도 안 되는 무식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품목을 일일이 정해 명확하게 지시했다.
속 좁은 아녀자의 전형적인 갑질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비서팀은 물론 법무팀에까지 경고를 보내왔다.
자칫 말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권력 비리로 변질시킬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최측근의 움직임을 통제해야 할 대통령이 도리어 주순자의 조종을 받았다.
어떤 점에서는 기업가 입장에서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정부가 기업의 애로사항을 즉각 해결해 주는 만큼 바로 이익 창출과 연결됐다.
하루가 뒤처지면 한 달, 심지어 몇 년 정도씩 기술격차가 벌어지는 시대였다.
매일같이 회의가 열렸다.
기업의 나갈 방향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로 경영 수업 중이던 임준형이 본격적으로 선장 역할을 맡았다.
사인 하나에 작게는 수백억에서 많게는 수십조가 움직였다.
한국형 재벌 기업 구도에서는 특히나 오너가 모든 걸 책임졌다.
임직원들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오너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절대왕권 시절의 장군 역할에 불과했다.
똑똑.
임준형이 책상을 오른쪽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고민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는 버릇이다.
왼손으로는 안경을 매만졌다.
‘최대한 법적 문제에서는 자유로워야 한다. 공소시효만 넘기면…….’
그룹 법률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승계 문제.
최병박과 주순자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처리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꼬투리가 남았다.
뇌물죄를 비롯해 여러 건이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상태다.
과거처럼 더는 협박이나 권력을 이용해 입막음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언론사야 지금도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기자들과 즉각 반응이 나타나는 SNS가 문제다.
국민 대부분이 이미 상급 교육을 받은 학력자들이다.
분별과 시시비비를 가릴 정도의 충분한 교육을 받은 터라 과거처럼 매사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저 부회장님…….”
그때 임준형을 지켜보던 차현태 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임준형이 짧게 대꾸했다.
“부탁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부탁요? 누구한테 뭘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차현태의 말에 임준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정이 무엇을 부탁할 만한 상대는 많지 않았다.
“……임윤아 사장님과 교제하시는…… 장태…….”
어렵게 상대의 이름을 밝히는 차현태 전무.
“차 전무님!!!”
임준형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사자 후가 터졌다.
“네, 넵!”
차현태 전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임준형의 반응에 화들짝 놀랐다.
“이런 문제도 해결할 자신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 등산이나 다니세요.”
강력한 경고.
“죄…… 죄송합니다!”
차현태 전무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꺾였다.
임준형이 대단히 분노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차현태 전무는 임준형의 반응에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임준형과 장태산은 요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
왕래가 잦았고 사위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다.
임준형이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낼 만한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
‘장태산! 장태산! 장태산!’
임준형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의 심리상태를 보였다.
정재계를 비롯해 사방에서 장태산에 관한 얘기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대한민국 상류층 중심으로 장태산은 거론하지 말아야 할 인물 1순위가 됐다.
잘못 건들면 집안 뿌리까지 뽑힌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집안에서도 장태산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다.
덩달아 임윤아까지 사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주식 배분이 어느 정도 끝난 상태라 계열사 문제도 별 이상이 없다.
하지만 기분이 왠지 모르게 나빴다.
재계의 황제로서 걸음을 내딛게 되자 이상 기류가 확실히 감지됐다.
권좌에는 둘이 아닌 단 한 명만 앉아야 한다.
그 점에서 장태산은 경쟁이 불가피한 인물이었다.
외부로 드러난 낮의 황좌는 임준용의 몫이지만 어둠 속 재계의 황제는 장태산이었다.
임준형은 그 자리까지 욕심났다.
낮과 밤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재계의 황제여야 그게 진짜였다.
오직 자신만이 그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
와락!
오바마는 다니엘의 마지막 외침에 힘껏 왼손 주먹을 움켜쥐었다.
파르르 몸이 떨렸다.
자제력이 강하지 않았다면 주먹부터 먼저 나왔을 것이다.
명백한 도발이자 모욕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대통령에 대한 도발.
으득.
입을 꾹 다문 채 이를 깨물었다.
동화를 꺼낸 이유와 비유, 그리고 의도는 명확했다.
본인에게 무엇을 요구하려면 자신부터 까라는 의미다.
‘건방진 놈!’
다니엘을 만나러 오기 전부터 다짐했다.
오늘은 절대 먼저 동요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패다.
다니엘은 특유의 사람 속을 박박 긁은 재주가 탁월했다.
“어릴 때부터 동화를 통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이솝 우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평소처럼 밝게 웃는다.
얄밉다.
오바마는 치솟는 살의를 극강의 인내로 참아내고 있었다.
“간이 준비되셨습니까?”
“……뭘 더 원하나.”
오바마의 말투가 변했다.
많이 까칠해졌다.
인내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진실하고 솔직한 간.”
다니엘이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오바마의 말투를 따라하는 듯한 뉘앙스다.
저 또한 의도는 명확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똑같이 하겠다라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명함 따위는 다니엘에게 있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오바마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울고 싶은 마음을 박장대소로 바꿔 승화시켰다.
1차전은 완벽하게 패배다.
“항복.”
오바마가 양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니엘이 생글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해보게.”
스으윽.
오바마가 와인 잔을 들고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항복하긴 했지만 마지막 자존심까지 꺾이고 싶지 않았다.
“부탁이라……. 가진 게 많은 자는 뭐가 필요할까요? 돈? 여자? 명예? 그것도 아니면 권력?”
다니엘이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욕망을 나열했다.
“내가 아는 너에게는 무의미하겠지. 그래도 필요한 게 있을 거야.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퇴임 전까지 유지되고 막강하다네.”
“그럼 핵무기 하나 주시겠습니까?”
“농담 말고.”
“핵 재처리 시설 풀어주십시오.”
“다니엘 좀 더 현실적으로 부탁해줘. 내가 허락해도 중국과 러시아, 일본, 유럽이 반대할 거야.”
오바마는 냉정했다.
담판을 보기 위해 왔을 뿐 진짜 항복한 게 아니었다.
오고 가는 이익은 공평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
씨이익.
다니엘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웃는다.
이런 난해한 상황을 즐기는 게 확실했다.
“절 유혹해 보십시오.”
“!!!”
“간과 간이 서로 대등한 가치라면 들어드리죠.”
다니엘이 제대로 대화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음.”
오바마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패를 꺼내기 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말장난이나 눈치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힐러리를 당선시켜주게.”
“와우!”
다니엘이 다소 오버스러운 탄성을 터트렸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네. 그전에…… 뿌리를 뽑아줘.”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트럼프는 약점이 많네. 가령……. 뇌물죄의 유효한 증언 같은 것.”
“설마 제가 고발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죠?”
“……로버트 라이언이면 충분하네.”
“제 영혼 같은 친구입니다.”
“사면령을 내려주지.”
미국 대통령이 소유한 절대 권한 중 하나.
연방법 안에서 형사 소추를 면할 수 있는 사면령은 대단한 힘이었다.
대상에 특별한 제한도 없다.
“전 친구를 팔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알겠네. 그럼 진짜 마지막 조건을 걸지.”
예상했던 대답이다.
오바마가 진지한 시선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대 한국 대통령……. 다니엘이 원하는 자를 당선시켜주겠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