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5장. 고집불통 아저씨(3)
“다른 부지로 옮겨주십시오. 중국에서 불기 시작한 불매 운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삼청동에 위치한 회원제 요정.
잘 차려진 술상을 앞에 놓고 성동민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사드 문제가 랏데에 직격탄을 날렸다.
처음에는 자제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던 중국이 난리를 쳤다.
당 기관지부터 시작해 전 언론이 연일 사드에 대해 불만을 토해냈다.
홍위병 시절처럼 그들은 이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인민들을 동원했다.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랏데는 물론 한국 제품 전부에 대한 불매 운동에 돌입했다.
공산당이 즐겨 사용하는 선동질의 전형적인 행태다.
먹고살 만한 중국 인민들은 기세 좋게 주변국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과거 중국 이외의 주변국 모두를 조공국으로 여기던 못된 버릇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곳곳에서 한국 제품들이 불태워졌다.
그런 현장을 여과 없이 방송하며 인민을 자극하는 중국 언론.
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여론을 대대적이고 체계적으로 확산시켰다.
평소 한국인들에 대해 열등감이 컸던 중국인들이 들불처럼 일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중국의 일개 성만 한 분단국가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대국으로서 자부심이 남달랐던 중국인들에게 있어 한국은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과거처럼 눌러 짓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한강의 기적 이후 무섭게 성장한 한국.
개방 이후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한껏 응축되어 있다가 이번에 제대로 터졌다.
중류가 아닌 한류가 세계를 휩쓸자 그 질투를 감추지 못했다.
오정 반도체를 비롯해 조선과 같은 대형 일류 기업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안 돼요.”
성동민의 말에 차갑게 거절 의사를 밝히며 고개를 젓는 남자.
“왜 안 됩니까? 실장님. 잘못하다가는 중국 사업 다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성동민이 남자를 향해 실장님이라 호칭했다.
70대 초반으로 안경을 끼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 공길춘이었다.
“요즘 뉴스도 안 봅니까? 지금 각하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공길춘이 도리어 화를 냈다.
여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연일 약속이나 한 듯 언론들이 번갈아 가며 불을 질렀다.
하나를 막으면 하나가 꺼지기는커녕 두 군데서 다시 일이 터졌다.
“저희 그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부지만 옮겨주십시오. 군사 부지들도 많지 않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실장님!”
성동민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성경호 회장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형님을 제치고 그룹 전권을 행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 순간이 위태로웠다.
특히 중국 사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과거부터 형 성동국은 중국 사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애초 중국은 믿을 만한 사업 파트너가 못 된다고 여겼다.
차라리 일본과 한국에서 다른 사업을 시작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성동민은 성동국의 자세를 두고 배포가 작아서 그런 거라 여겼다.
지금 돌아보면 랏데를 세계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은 욕심이 과했었다.
중국에서의 유통사업은 성장이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내심 자신 있었다.
랏데가 가진 장점이 꽤 많았다.
이사들 상당수도 성동국과 같은 의견으로 중국 진출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아버지 성경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사업이다.
그렇게 추진됐던 사업인데 사고가 터졌다.
일본과 한국 기업이라 낙인 찍힌 랏데.
중국 언론들은 심심하면 랏데를 소환해 악질 기업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특히 이번 사드 배치가 제대로 도화선이 됐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아시면…….”
성동민이 최후의 협박 카드를 꺼냈다.
공길춘은 위기의 순간을 아버지의 도움으로 넘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아버지가 그의 뒤를 봐줬다.
‘뭐야? 이 새카맣게 어린놈의 새끼가!’
공길춘의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사방에서 불길한 신호가 감지되어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다.
청와대의 권력이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다.
눈치 빠른 공길춘은 내뺄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려던 참이다.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더구나 지금은 주순자도 자라목이 됐다.
철이 없는 대통령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랏데 그룹의 어린 사자가 겁 없이 협박을 해왔다.
가소롭고 우스웠다.
공길춘 입장에서는 가진 패가 꽤 많다.
특히.
“성동민.”
공길춘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나직하게 깔렸고 눈빛은 차가웠다.
“…….”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는 성동민.
“너 내가 우스워?”
공길춘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아니라…….”
“야! 나 공길춘이야!”
타앙!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치는 공길춘.
와장창.
몇 개 그릇이 요란하게 튀었다.
“과거 같았으면 넌 바로 남산행이야! 어디서 혼종 새끼가 국가 대사에 끼어들어! 아버지? 치매 걸린 노인을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공길춘은 겁날 게 없었다.
목소리가 문밖까지 새어나갈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와득.
성동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면 분위기는 최악이다.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아버지 성경호가 중증 치매에 걸렸다는 걸 공길춘이 모를 리 없었다.
한일 양국 기업에 속하는 랏데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
“지금 뭐?”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푸하하하하. 웃기지 마 새끼야. 그리고 너 조심해. 건물 세우고 사업하느라 주순자 뒤로 찔러준 뒷돈 모를 줄 알아?”
“!!!”
“한 방에 간다. 그러니까 닥치고 살아. 그리고 랏데 정도면 중국에 꽌시 있잖아. 그거 사용해. 그것도 아니면……. 정리해. 그룹 잇겠다는 회장 새끼가 그깟 몇조 가지고 쪼잔하게…….”
공길춘이 경멸의 시선으로 성동민을 바라봤다.
“…….”
성동민이 입을 다물었다.
약점이 너무 많았다.
사업 확장을 위해 뿌린 뒷돈이 너무 많았다.
공길춘의 말대로 불똥이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50줄을 넘어선 성동민은 아버지의 큰 그늘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늘 대범했던 아버지 성경호 회장.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해줄게.”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공길춘이 나가려다 멈추고 성동민을 내려다봤다.
“그놈을 잡아.”
“???”
“장가 놈.”
‘장가 놈?’
스르륵. 탁.
장가 놈이라는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 공길춘.
‘장가 놈이라면……. 설마!’
***
귀가 간지럽다.
누가 내 욕을 하는 것 같다.
지금 앞에 있는 고집불통 아저씨는 아닌 것 같은데…….
“후후훗.”
잠시간의 침묵 뒤에 오바마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냉소적이다.
가면 뒤에 감춰진 얼굴 하나가 더 드러났다.
입으로는 인권을 부르짖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미국의 대통령 자리는 선과 악을 대변한다.
떠올려보면 오바마 시절 결정적으로 전쟁도 벌어졌다.
테러 위협분자들로 분류된 자들이 수시로 제거됐다.
그 살생의 최종 허가권자가 오바마였다.
미국의 이익 앞에 그는 악마의 선봉장이 될 수도 있는 자였다.
“역시 다니엘은 내 예상을 언제나 벗어난단 말입니다. 존경해요.”
오바마가 나를 유심히 본다.
눈빛에 감정을 싹 뺐다.
진짜 정치꾼이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가끔 존경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진심 칭찬이다.
분노를 절제할 줄 아는 남자는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하는 법이다.
“고마워요.”
오바마가 거부감 없이 받아줬다.
“별말씀을요.”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도 꾼, 나도 꾼이다.
“다니엘 우리 오늘은 솔직하게 얘기합시다.”
솔직히 웃기는 분이다.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솔직하게 말하잖다.
서로가 썸 타는 사이도 아니고.
“저희 집 가훈이 정직입니다.”
“…….”
오바마의 농담 센스가 빵점이다.
대한민국에서 한때 유행어처럼 번졌던 말이 그에게는 안 통했다.
“말해보십시오.”
상대가 원할 때는 그대로 응대해 줘야 하는 법.
목소리를 무겁게 깔았다.
눈빛도 깔맞춤으로 세팅했다.
스륵.
오바마가 두 손을 깍지 꼈다.
TV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선물은 잘 받았나 모르겠군요.”
선물? 후후후.
일단 웃었다.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퇴임 전에 주고 싶어 한국에 큰 선물을 보냈는데 모르시는군요.”
“네.”
“사드라는 미사일 말이죠. 방어 능력이 아주 탁월해요. 가격이 비싼 만큼 제값을 하죠.”
“그래요? 전 군사적으로 문외한입니다.”
모르는 척했다.
오바마가 예상한 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
“애국자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애국도 방법이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알아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오바마가 물고 늘어진다.
유치하다.
“분단국가에 비싸고 좋은 미사일을 배치해 주셨다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감사는 드립니다.”
원하니 듣고 싶은 답은 돌려줬다.
“주변국들도 좋아라 할 겁니다.”
“그럴 겁니다. 워낙 한반도가 민감한 곳이니까요.”
싱겁게 웃는다.
“제 의도와 달리 중국 공산당 정부가 예민하게 여긴다 들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방의 대통령으로서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 말은 제가 아니라 한국 대통령이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에서 밀리지 않았다.
사실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중국과는 언제가 되었든 한 번은 터질 일이다.
미리 매 맞는다고 나쁠 게 없다.
나중에 가서 당하면 감당하기 더 벅차다.
“다니엘이 원한다면 거두어 줄 수도 있습니다.”
“됐습니다. 이사 비용도 만만찮은데 그냥 사용하는 게 좋겠죠.”
국제관계가 여러모로 얽히고설킨 한반도다.
여기서 사고 터지면 핵미사일 날아다닌다.
“……아쉽군요. 난 다니엘이 원할 줄 알았는데.”
“청와대에 아는 분이 계신데 말해볼까요?”
“…….”
순자 누님이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서 문제지 좋아할 만한 일이다.
“각하.”
오바마를 불렀다.
선물 공세가 통하지 않자 시름에 빠진 오바마.
그 정도의 약한 미끼는 구매할 의사가 없다.
“더 세고 좋은 녀석 없습니까?”
“???”
오바마를 똑바로 쳐다봤다.
씨이이익.
입가에 번지는 굵은 미소.
“예를 들어…….”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