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4장. 고집불통 아저씨(2)
“멀린이라니…….”
야훼바트 로리아나는 전달된 보고에 할 말을 잃었다.
야훼를 모시는 종인 동시에 차일드 가문의 수장인 로리아나.
대대로 남자만이 수장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특별히 야훼의 선택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녀의 삶은 대체로 평탄했다.
감히 누가 야훼의 신실한 종이자 차일드 가문의 주인을 건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살면서 요즘처럼 골치 아팠던 적이 없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흑마법을 사용하는 아사신으로 인해 성전이 자취를 감출 뻔했다.
성전이 오염된 것은 물론 로리아나 역시 죽음의 목전까지 갔다 왔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왔던 성전이 목숨을 보장하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야훼도 충격을 받은 듯 과거보다 조용했다.
이런 상황에 알게 된 새로운 마법사의 등장 소식.
중세시대 대마법사로 활약하던 멀린의 부활 소식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 오염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중요한 파트너 집단 중 한 곳이 붕괴할 뻔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직접 당해본 그녀로서는 마법사들의 무서움이 절절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잊혀져 가던 마법의 부활……. 야훼시여, 이 또한 당신의 뜻이옵니까?”
로리아나가 간절한 마음으로 신께 물었다.
야훼는 여전히 말이 없다.
로리아나는 야훼가 어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나마 다니엘이 있어 이 정도 선에서 막아낸 거야.”
로리아나는 다니엘을 많이 의지했다.
야훼의 종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사랑에 빠진 그녀.
무슨 일인지 야훼도 그에 대한 감정을 질투하지 않았다.
인간이면서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친 이가 다니엘이다.
“그런데 오바마는 왜…….”
로리아나가 올라온 보고 내용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차일드 가문의 정보력은 백악관을 한참 앞섰다.
세상 모든 곳에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단한 가문의 정보력.
미국의 한 와이너리에서 회의 중이던 다니엘을 오바마가 찾아가 귀찮게 한 사실까지 보고됐다.
그가 다니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이번에 그는 한국에 사드라는 악성 선물을 뿌렸다.
누가 봐도 다니엘을 괴롭히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오바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로리아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제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로리아나였다.
당장 한마디 명령만 내려도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 수 있다.
다만 다니엘의 의중을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다.
다니엘이 요청만 한다면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다니엘을 건들면…….”
로리아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야훼의 성전과 자신을 지켜준 은인이다.
그 빚은 도저히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깐깐하고 편협한 야훼도 다니엘을 인정했다.
“그런데 요즘 야훼께서는……. 왜 이토록 말이 없으신지.”
야훼의 침묵이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 로리아나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적들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지만 자신은 반대로 약해졌다.
내부에 침투한 적의 뿌리를 뽑아내느라 힘이 많이 들었다.
새 출발을 하려고 해도 갖고 있는 무기가 부족했다.
흑마법사와 멀린.
로리아나의 심사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모!!!”
그때 한 소녀가 로리아나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서 와. 아벨린.”
차갑고 어둡던 로리아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허리를 숙이며 두 팔을 내밀었다.
요즘 들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행복을 맛보고 있다.
다니엘이 부탁한 아벨린은 로리아나의 마음에 쏙 드는 아이였다.
순수하고 영혼이 맑았다.
게다가 로리아나를 이모라 부르며 잘 따랐다.
야훼의 종이기에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인 로리아나는 아벨린을 친조카처럼 아꼈다.
아벨린은 혼자 남겨졌음에도 씩씩하고 밝았다.
덥석.
아벨린은 엄마를 찾으며 울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벨린이 익숙한 듯 로리아나의 품에 안겼다.
“피아노 수업은 어땠어?”
“최고예요!”
잠깐 보호하기로 한 것이지만, 로리아나는 아벨린을 위해 특급 과외 선생님을 붙였다.
“그래 다행이네.”
로리아나는 엄마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여인으로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아벨린 나이 정도의 딸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벨린 배고파요.”
로리아나의 품에 쏙 안긴 아벨린이 말했다.
로리아나는 평소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먹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식탐도 없었다.
샐러드와 담백한 빵, 요구르트와 와인 한 잔이 식사의 전부다.
그러나 한창 자라고 있는 소녀는 달랐다.
수시로 밥과 간식을 찾았다.
로리아나를 위한 요리사들은 그 덕에 요즘 바쁜 나날을 보냈다.
로리아나의 지시로 최상급 요리들을 만들어 냈다.
“밥 먹으러 갈까?”
로리아나가 아벨린을 안아 올렸다.
“네에!!!”
아벨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로리아나가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벨린은 엄마 안 보고 싶어?”
“엄마가 곧 찾으러 올 거예요.”
아벨린이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아?”
“다니엘 기사 아저씨가 그랬어요. 엄마를 반드시 데려온다고 말이에요.”
다니엘을 기사 아저씨라고 말하는 아벨린.
그 소리에 로리아나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띠었다.
“그래. 믿어, 다니엘 기사 아저씨라면 반드시 엄마를 구해 올 거야.”
로리아나도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로리아나…….
그때 갑자기 로리아나의 의식을 울리는 야훼의 음성.
“야훼시여…….”
아벨린을 안고 걸음을 옮기던 로리아나가 바짝 긴장했다.
이런 식의 직접 음성은 쉽게 들을 수 없었다.
- 결계가 무너졌다. 새로운 힘이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 선택된 자들과 준비하라. 너희에게 나의 큰 선물이 임할 것이니!
야훼의 강한 힘이 깃든 음성이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
새로운 힘이라는 말에 로리아나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드디어 결심한 듯한 야훼.
‘그런데 결계가 무너지다니…….’
알 수 없는 의지를 전달한 야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물음에 친절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이 종이 당신의 말씀을 따르옵니다.”
아벨린을 안은 채 로리아나는 하늘을 향해 경배를 올렸다.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새롭게 준비되고 있는 야훼의 힘.
평범하지 않을 게 확실했다.
***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입니다.”
“네.”
“안타깝네요. 난 다니엘과의 만남이 항상 기다려지는데 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기 전부터 무척 설레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한껏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말이 언제나처럼 번드르르하다.
이 아저씨 진짜 뻔뻔하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가면을 썼지만 속이 훤히 보였다.
진정한 미국 제일주의를 추구하는 무서운 아저씨.
“동양의 성인이신 노자께서 도덕경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어진 사람은 말재주를 피우지 않고, 말재주를 피우는 사람은 어질지 못하다. 즉, 말 잘하는 사람치고 나에게 이로운 사람은 없다 하셨습니다.”
“!!!”
웃고 있던 오바마의 얼굴이 금방 굳어졌다.
“풋!”
반면 듣고 있던 로버트 라이언은 웃음을 터트렸다.
“…….”
그에 반해 오바마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드시죠 와인.”
잔을 들고 오바마를 바라봤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인 만큼 좋은 와인을 대접했다.
상대가 아무리 불손한 목적을 갖고 찾아왔다 해도 기본 대접은 하라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셨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잠시 뒤 오바마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보통 남자는 아니다.
못난 권력자였다면 여기서 얼굴을 붉히고 분노를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기대됩니다. 와인 맛이.”
잔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기대할 것도 없다.
“건배.”
팅.
가볍게 세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
로버트 라이언은 흐르는 분위기에 바짝 쫄았다.
오바마와 나 사이에 끼기에는 정신력 레벨이 적잖이 딸렸다.
“흐음……. 예상대로 훌륭합니다.”
오바마는 속이 타는 듯 잔을 단박에 비웠다.
“입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와이너리의 와인은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더니 그런 것 같습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럽지만 뒷맛이…… 쌉싸름합니다.”
오바마가 날 보며 말을 잇는다.
한마디 한마디에 뼈가 제대로 담겼다.
와이너리 진짜 주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다고 넌지시 신호를 보낸 것이다.
“로버트,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탁월한 맛입니다.”
화살 머리를 로버트에게 바로 돌렸다.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로버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바쁘신 국정 수행 중에 그냥 오시진 않았을 것 같고…….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머리 아픈 사람과는 대화를 오래 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오바마와 잔머리 써가며 싸울 시간이 없다.
“로버트,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오바마가 로버트를 상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
로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괜찮아요. 로버트가 들을 수 없다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오바마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본다.
미국 대통령의 말을 씹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그러나 난 아니다.
“호랑이도 이빨이 빠지면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대놓고 저격했다.
오바마 행정부도 집권 8년차다.
레임덕 현상은 진작부터 나타났다.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을 기다리며 행정부는 눈치만 보고 있다.
“……뼈아픈 진실이군요.”
“순리라고 합니다.”
오바마에게 한 치의 양보도 할 이유가 없다.
“……로버트 앉아요.”
오바마도 포기했다.
로버트 라이언이 엉거주춤한 자세가 됐다.
“로버트 앉아요, 당신에게는 큰 지분이 있습니다.”
오바마 선거 운동을 직접 지원한 장본인이 로버트 라이언이다.
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창고에 괜찮은 와인이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괜히 함께 앉아 있다 눈칫밥 먹을까 봐 로버트가 알아서 빠졌다.
이 정도에서 말리지 않았다.
기 싸움은 오바마와 나 둘만으로 충분하다.
로버트가 밖으로 나갔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두 손은 깍지를 끼고 한 발을 올려 무릎 위로 포갰다.
누가 봐도 건방진 자세.
오바마가 빈 잔을 들고 묵묵히 나를 쳐다봤다.
무심한 척하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감지했다.
철저히 무시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싶다.
지는 해인 오바마와 뜨는 해인 나.
그 둘의 눈높이 차이를!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