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0장. 감춰진 비밀(2) (1,205/1,284)

1230장. 감춰진 비밀(2)

“클라라……. 미안하게 됐구나.”

“아닙니다. 아버님.”

아르노 발루아 백작이 유일하게 부드럽게 대하는 존재가 클라라다.

딸인 비비안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나 클라라만큼은 애지중지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보살폈다.

무려 가문의 대를 이을 손자를 임신한 며느리였다.

더구나 클라라는 성품도 착하고 어질었다.

프랑스어도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사용했다.

어머니가 귀족가 핏줄이라 예법에도 부족함 없이 교육받았다.

혼혈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 시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손녀 교육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클라라는 가문에 연관되어있는 기사들이나 시중인들에게조차 친절했다.

그런 며느리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커질 대로 커진 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애써 웃음 짓는 클라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르노 발루아 백작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번 사건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영혼을 빼앗긴 건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아직까지 아들의 생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기사단을 비롯해 가문과 세계 안보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감춰졌던 힘들이 속속 세상에 나타났다.

마녀사냥을 통해 마법사들을 제거해 왔지만 또다시 잡초처럼 되살아났다.

제2의 마녀사냥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니엘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오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신했다.

적으로 둘 자가 절대 아니었다.

아사신은 물론 멀린에게도 밀리지 않는 진짜 마법사다.

그의 과거 따위는 상관없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선량한 기운이 은은하게 발산되는 그의 눈.

백색 기사단의 성기사 가브리엘도 다니엘을 무척 잘 따랐다.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진 딸도 그를 존중했다.

‘방법은…….’

돈으로도 매수할 수 있는 그런 인물도 아니다.

암중의 권력도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했다.

다니엘이 연관되어있는 인맥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진정 세상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차일드 가문과도 동맹 관계에 있다.

야훼바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여러 소문에 힘을 실었다.

미국 정재계 인사들과도 심심치 않은 교류가 있었다.

성전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는 중국의 천지회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무엇보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가 달린 상황인 만큼 다니엘의 손을 잡아야 한다.

클라라도 완벽하게 가문과 동화됐다.

아르노 백작의 눈길이 자신의 딸에게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고심에 빠진 비비안.

현재로서는 다니엘과 가장 가까운 사이다.

“비비안 네가 다니엘 경을 불렀느냐?”

백작은 자연스럽게 다니엘의 이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자신이 깨어날 때 스스로 공작이라 밝혔던 다니엘.

그의 눈빛으로 보아 농담이 아니었다.

귀족으로서 위엄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네…….”

비비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아르노 백작이 만족스러운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딸의 도움 요청에 프랑스까지 즉시 날아왔다면 보통 사이는 아닌 게 확실했다.

과거 한 차례 다니엘과 도주 행각을 벌이기도 했던 비비안이다.

그것도 몇 날 며칠을 함께 보냈다.

짧지 않은 기간 젊은 남녀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꾸욱.

그런 아르노 발루아 백작을 바라보던 클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녀도 다니엘을 초대했다.

그러나 밝히지 못했다.

“하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아버지 아르노 백작은 이렇게 돌아왔지만 남편은 아직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암담한 상황.

쿵! 쿵!

아무것도 모르는 뱃속 아기는 힘차게 발길질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백작님. 잠시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가브리엘이 아르노 백작에게 청했다.

“그러시죠.”

이단 심판관 역할까지 맡고 있는 가브리엘이다.

성전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단장이지만 그에 대해 조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다면 단장직도 자동으로 박탈당한다.

“……다니엘 경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브리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떤…….”

“동맹을 맺었으면 합니다.”

“동맹요?”

단장은 가브리엘에게도 존칭을 사용했다.

백색 기사단원의 단원들은 교황 직속 집단이다.

위치가 가볍지 않다.

“다니엘 경이 제공할 마법 물품에 대해 공동 입찰 방식을 취했으면 합니다.”

평소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백색 기사단 측에서 마법에 욕심을 보였다.

“윗선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가브리엘은 주저함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니엘 경이 그 점을 수락한다면 동맹을 맺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다니엘 경은…….”

아르노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다니엘의 존재 자체가 교황청 입장에서 보면 아주 껄끄러운 존재였다.

마녀사냥으로 제거하기 딱 좋은 케이스다.

“다니엘 경은 우리가 상대할 만한 급이 아닙니다.”

가브리엘의 단호한 발언.

“그는…… 인간으로서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신급이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가브리엘.

경외감과 존경심이 이미 그의 음성에 가득 담겨 있었다.

유일신을 섬기는 기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뱉는 데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직접 최근접 거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능력을 검증한 당사자였다.

다른 백색 기사단이 다니엘을 모욕이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울 생각도 있었다.

가브리엘에게 이미 다니엘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존재 자체가 그 장벽이었다.

***

덜덜 손이 심하게 떨렸다.

뭔가 이상한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내가 왕래하는 이계와 연관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사르칸 마탑이라니…….”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륙의 대형 마탑이다.

그 역사가 수천 년 세월을 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멀린이 그 사르칸 마탑의 부탑주라니.

“말도 안 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명백한 진실이다.

멀린이 사용했던 마법들 모두 내가 사용하는 마법들과 유사했다.

“아르펜 행성과 지구가 과거부터 연결되었다. 그 이유로 나의 차원 이동이 가능했다는 말이겠지.”

노바 형님도 그랬다.

아르펜 제국 출신 엘프 여왕과 썸을 탔지 않은가.

신들의 왕래도 우연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인연과 인과의 그물이 서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망의 바다.

나만 특혜를 받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계가 깨졌다는 말도……!”

불길함의 정체가 확실하게 이해됐다.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사신 뒤에 숨은 흑마법사도 아르펜 행성 출신인 게 확실해!”

사고가 확장되자 이런저런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확실한 뭔가가 더 필요해 멀린의 일기장을 마저 읽어갔다.

- 과거에 등장했다 사라졌던 9서클 대마도사 쿠아란의 던전이 원흉이다! 

“9서클 대마도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나도 말로만 들었던 경지가 9서클이다.

수백 년을 살아가는 엘프들도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맞닥뜨린 적 없는 드래곤만이 태어날 때부터 9서클이라고 했다.

신들과 같은 역천의 능력자들.

이곳에서야 나도 신급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곳에서 9서클은 사고의 차원을 달리했다.

상급 이상의 신의 경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런 경지에 올랐다는 대마도사 쿠아란을 멀린이 언급했다.

- 정보가 샜다. 흑마탑이 냄새를 맡았다. 그놈들이 심어 놓은 세작이 빼갔다. 마탑들이 연합했다. 흑마탑 소속 흑마법사들의 마법은 괴이했고 악랄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세 곳의 마탑들이 힘을 모았다.

서로 반목하다가도 공통의 이익 앞에서는 힘을 모으는 마탑들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로얀 제국의 부활을 막기 위해 놈들은 지금도 힘을 합치고 있다.

9서클 대마도사의 던전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가 남긴 마법 지식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흑마탑은…… 도대체 어디야?”

그 또한 들어보지 못했다.

흑마법사들이야 악당들처럼 섞여 있지만 그들의 연합체가 존재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감춰진 비밀들이 여전히 많았다.

- 던전에서 놈들과 부딪쳤다. 부탑주들과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 수천 명이 나섰건만……. 흑마법사들에게 밀렸다. 놈들은 마계 마물들을 소환했다. 대마법 전투가 벌어졌다. 놈들이 고용한 인간 불나방 같은 인간 용병들도 참전했다. 피가 강을 이루고 마법사들이 수없이 산화되어갔다. 쿠아란의 던전 또한 위험했다. 곳곳에 설치된 기괴한 마법진에 마법사들이 죽어 나갔다. 단 며칠 만에 대다수 마법사들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멈추지 못했다.

마법을 위해 살아가는 마법사들에게 고위급 마법사의 던전은 악마의 유혹과 같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임을 알았음에도 찾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입장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기장은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기록돼 있었다.

사락.

빠르게 다음 장을 살폈다.

-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던전의 중앙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존재했다. 쿠아란이 생전에 공부했던 마법서들과 각종 마법 물품들, 제작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함정이었다.

멀린의 일기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쿠아란이 준비한 함정.

- 쿠아란이 생전에 사용했던 마나 스태프가 보였다. 살아남은 고위급 마법사들과 흑마법사들이 달려들었다. 감춰줬던 마법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때 마법진이 발동됐다.

“마법진이라면…….”

머릿속에 떠오른 마법진.

-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세상에…… 차원이동마법진 발동은 드래곤도 불가능하다고 알려졌지만 쿠아란이 해냈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다.

차원이동마법진이 아니고서야 이들이 지구에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 난전 중에 마나 스태프를 내가 쥐었다. 탑주가 하사한 은신 망토를 이용해 손에 쥘 수 있었다! 도망치려 했건만! ……가짜다!

“헐…….”

생생한 멀린의 비명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수천 명의 마법사들이 희생되고 획득한 마나 스태프가 가짜라니!

- 마법진이 발동됐다. 그리고 우리는 낯선 땅에 도착했다. 처음 마주하게 된 세상이다. 마법사가 아닌 마술사라 불리는 사기꾼들이 판을 쳤다. 절망했다. 흑마법사들의 잔인한 공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망토를 사용해 도망을 쳤다. 어차피 다들 몸이 망가졌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욕심 많은 왕을 만나 목숨을 연명하게 됐다. 그를 통해 쉴 곳을 얻었다. 그러나…….

멀린의 일기장은 거의 끝에 와 있었다.

몇 장은 뜯겨져나가 있었다.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 쿠아란의 마나 스태프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세상에…… 이곳에 그의 스태프가 존재했다! 

“뭐, 뭐라고? 9서클 마나 스태프가 이곳에???”

회귀의 전설 3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