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장. 순결한 마법사.
“으으으으……. 인간이 아니야.”
백색 기사단에서도 유망한 기사로 인정받던 가브리엘은 혼이 반쯤 나갔다.
휘이이이잉.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무치도록 시리게 느껴졌다.
영국의 북쪽에 위치한 곳답게 밤 기온이 낮과 차이를 보이며 꽤 차가웠다.
따다다닥.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사악한 마법사보다 더 지독하게 다가오는 다니엘.
백기사를 상징하는 물품인 로브와 갑옷을 빼앗아갔다.
검은 덤으로 가져갔다.
가브리엘의 지금 차림이라고는 겨우 위아래 속옷뿐이다.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초승달이 눈을 뜨고 놀리는 듯했다.
부끄러움이 한없이 밀려왔다.
솔직히 수치스러웠다.
더는 자존감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순간 가브리엘에게 다니엘은 사악한 마법사 멀린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감히 그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도 내 모습과 똑같이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마법이라니……. 도대체 지금까지 난 뭘 알고 살아왔단 말인가.”
가브리엘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다니엘이 옷을 홀라당 벗겨가면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마주한 순간 숨이 막혔다.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같았다.
처음 다니엘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입장이 이렇게까지 엉망이지는 않았다.
자가용 비행기 안으로 뛰어들 당시만 해도 스스로가 다니엘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그저 옆에서 자신을 거드는 존재로 치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니엘의 마법 앞에 한없이 초라해졌다.
다니엘의 마법은 상식을 파괴하고 그간 가브리엘이 믿어온 모든 질서를 어지럽혔다.
주님이 만든 세상에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불온한 마법사.
감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인간이 아닐 거야. 그 나이에 그럴 수 없어. 멀린이 그랬던 것처럼 대마법사의 영혼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거야!”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아아아…….”
가브리엘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아무리 부정해도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자신의 모습으로 귀신같이 위장하고 마법사를 찾아 나선 다니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에서 폭음이 들렸다.
멀린과 전투를 개시한 게 확실했다.
교황청 소속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서 지켜온 명예는 한낱 먼지처럼 사라졌다.
무엇을 할 것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두 손은 비어 있고 남은 건 두 주먹뿐.
“자비로운 성모시여……. 저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가브리엘은 속옷 바람으로 성모를 찾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교황청 기사 수업을 받아온 그에게 성모는 정신적 어머니로 오래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성모의 힘으로 맞닥뜨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늘에 이른 가브리엘.
반짝!
자괴감으로 젖은 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며 힘이 들어갔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냐……. 다니엘 그분을 반드시…….”
가브리엘은 확고한 무언가를 깨닫고 속으로 다짐했다.
하늘을 날고 벼락을 소환하며 모습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마법사.
“스승으로 삼으리라!”
***
무공?
멀린은 낯선 말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모르지? 그러고도 네가 마법사냐. 쯧쯧.”
놈이 혀를 찼다.
‘이 새끼가!’
멀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은근 이가 갈렸다.
자신이 놈을 무시했던 방법 그대로 돌려받고 있었다.
옴짝달싹도 못 했다.
놈에게 잡힌 뒷목을 통해 이질적인 기운이 계속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마나가 운용되지 않았다.
스르릇.
마법 역시 풀려 버렸다.
허공에 대롱대롱 떠 있는 지경.
놈의 완력이 대단했다.
“네가 모르는 것 같아 알려주는 건데 내가 무당파라는 전설적 성기사 집단의 제자야.”
‘무당파?’
처음 들어보는 집단의 이름이다.
단장의 기억 속에 그런 이름의 성기사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멀린.”
놈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목에 숨구멍이 터졌다.
“흐으으윽.”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멀린.
“좋은 말 할 때 백작 육신 내놔.”
다니엘이 겁박했다.
목적은 뻔했다.
‘젠장! 어떻게 한 거야.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
멀린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마법을 펼치려 애썼다.
손에 들린 마법 지팡이를 이용해 다니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마나가 뜻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애쓰지 마라. 네 몸뚱이는 점혈 됐다.”
알 수 없는 말로 다시금 멀린을 당황하게 하는 다니엘.
“날…… 놔줘라. 내 손을 잡으면 너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젖먹을 나이 지났다. 꿀 많이 먹으면 당뇨병 와.”
“…….”
멀린이 입을 닫았다.
성전 기사단 단장의 기억 속에는 이 말이 상대에게 제안할 때 가장 좋은 말이고 찬사였다.
“그럼…… 황금을…….”
“누가 요즘 무겁게 황금 들고 다녀. 다른 거 없어?”
“???”
“코인 같은 거 말이야.”
“그게 무슨…….”
“공부 좀 해라. 지구에 왔으면 이 동네 정치, 경제 같은 기본 상식은 탑재하고 살아야지.”
다니엘이 작심하고 멀린을 구박했다.
으드득.
멀린이 구석에 몰리며 치욕으로 이를 갈았다.
다니엘이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길게 말할 것 없고 백작 몸뚱이 놓고 꺼져.”
‘흐흐흐. 놈에게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멀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나를 운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니엘에게 꿀릴 이유 역시 없었다.
“마음대로 해.”
멀린이 배짱을 부렸다.
“배 째라?”
“째보시든가. 그럼 네가 좋아했던 그 계집도 배가 째질 것이다.”
클라라와 마법으로 연동되어 있는 멀린.
“그래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고문하는 맛이 있지.”
다니엘은 사실을 확인하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뭔가 대책을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네놈 실력으로는 풀 수 없다. 그년과 나, 그리고 태중 아기와 셋이 함께 연결됐다.”
멀린도 우연히 습득한 고대 주술이다.
마법과 결합해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됐다.
“과연 그럴까?”
다니엘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게 번졌다.
“해보시든가!!!”
멀린은 종잡을 수 없는 다니엘의 태도에 버럭 화를 냈다.
마법사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분명한 건 마나의 맹약에 버금가는 체결 방식이 셋을 묶었다는 사실.
“오케이! 접수했어.”
흔쾌히 수락하는 다니엘.
“그 전에 말이야…….”
다니엘이 은근한 시선으로 멀린을 가까이 바라봤다.
몹시 끈적거리는 욕망이 가득 담긴 눈빛.
‘이 눈빛은!’
멀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듯 충격받았다.
일순간 봉인된 과거가 떠올랐다.
마탑 내부에는 여자들이 없다.
시종들도 모두 남자다.
마탑이 다스리는 특정 구역 안에는 여자들을 보기 쉽지 않았다.
특별한 능력과 대단한 재능을 소유한 여자들만 마법사로 키워지는 정도였다.
그것도 마탑 내부가 아닌 별개의 외부 공간에서만 허용됐다.
과거 어느 시절에는 마탑에서 같이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 마탑 내에서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실력도 제자리걸음으로 한 치도 향상되지 않았다.
아예 여자들과 눈이 맞아 정신줄을 놓는 마법사들이 속속 늘어났다.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여자들에 홀리는 마법사들이 많아질수록 분란도 잦아졌다.
미모와 지성을 소유한 여자 마법사를 차지하기 위해 암살도 불사했다.
마탑은 그때 깨달았다.
마법사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여자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명망 있는 마탑일수록 절대 여자를 마탑 내부로 들이지 않게 됐다.
문제는 마법사들에게도 성욕이란 게 버젓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이었던 동정남이었던 마법사들 사이에서 양기가 치솟았다.
알게 모르게 성욕을 푸는 방법이 생겼다.
그것이 바로 동성애.
과거 젊은 시절 멀린도 그 같은 애정 관계에 빠진 적이 있었다.
마치 여인처럼 가녀리고 피부가 유난히 하얗던 동료 마법사.
얼마나 마음 졸이며 몰래 그를 사랑했는지 멀린만 안다.
그런데 오늘 임자를 만났다.
그 시절 자신이 띠었던 눈빛을 다니엘의 두 눈에서 보게 됐다.
멀린은 강한 남자를 동경했다.
자신을 완벽하게 굴복시키는 자에게 알 수 없는 복종심이 생겼다.
묘한 감정이 순식간 멀린을 지배했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욕망에 젖은 다니엘의 뜨거운 눈빛!
“벗어.”
“!!!”
멀린은 자신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걸 확인했다.
과거의 영향으로 멀린은 여성체보다 남성체가 편했다.
더욱이 다니엘이라는 놈은 무척 잘생겼다.
과거 그가 연정을 품었던 동료 마법사만큼 외모와 신체적 조건이 훌륭했다.
멀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스르르 붉어졌다.
목이 붙들린 채여서 더욱 진하게 맡아지는 진정한 남자의 체취.
묘하게 달콤했다.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 안 된다! 난 순결한…… 동정 마법사…….”
멀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기사 단장의 육신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영혼은 멀린 그대로였다.
세월과 나이를 떠나 순수한 동정남의 영혼…….
“뭔 헛소리야! 마법 망토 벗으라고!”
***
사악하고 음탕한 마법사 같으니!
벗으라는 말에 이상한 상상으로 저 혼자 소설 쓰는 멀린.
순결? 동정?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개인적으로 마법 망토가 탐이 났다.
이계에서도 못 보던 럭셔리 마법 아이템이어서 더 그랬다.
아린에게 선물하면 딱이다 싶었다.
위험한 순간을 피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에 이만한 물건이 없다.
무당파 금나수법을 이용해 잡아채지 못했다면 멀린을 놓쳤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마법사 놈이 나를 상대로 이상한 상상을 해버렸다.
“나쁜 놈…….”
멀린이 실망한 듯 욕을 뱉었다.
“미친놈!”
바로 반격했다.
백작의 몸을 소유한 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싫다! 네가 벗겨!”
“…….”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멀린의 이상한 말투가 심기에 거슬렸다.
빨리 이 사태를 종결하고 싶다.
“개방!”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물건 하나를 꺼냈다.
홀린 듯 아공간을 쳐다보는 멀린.
“허억! 그것은!!!”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