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장. 제 정령이 되어주겠습니까?(2)
“영국에 말입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게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백악관 집무실.
요즘 들어 분위기가 좋지 않다.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선전했다.
미풍에 그칠 줄 알았지만 돌풍이 되고 급기야 허리케인으로 몸집을 키우며 성장했다.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전통적 가치를 버리고 파격적인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트럼프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정치 연구소에서는 힐러리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시시각각 변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오바마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사랑하는 미국은 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자유 민주적 기본 도덕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맹주다.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찰 역할을 맡아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유지시키는 것을 대통령의 덕목으로 여겼다.
그러나 트럼프는 달랐다.
동맹 상대를 이용 가치로만 따졌다.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없이 던졌다.
연방국가 형태를 갖춘 미국을 분열시키기에 제격인 인물이다.
자국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정세 가운데서도 오바마는 다니엘에 대한 소식을 반드시 챙겨 보고받았다.
“다만?”
“교황청의 사제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교황청 사제요?”
오바마가 서류에 사인하다 말고 보좌관을 바라봤다.
선뜻 이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다니엘이라는 자가 본래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교황청은 뜬금없었다.
“그것도 비밀사제입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백색 기사단의 기사입니다.”
“백색 기사단이라면…….”
오바마도 얼핏 들어 기억하고 있는 집단이다.
교황청과 교황을 비밀리에 수호한다는 비밀 기사단.
미국 비밀 정보 조직도 그들과 일정 부분 협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종의 임무를 띤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뭡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프랑스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성전 기사단 측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성전 기사단까지요? 다니엘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성전 기사단은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는 고급 정보에 속한다.
IS보다 더 위험한 이슬람 이단들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 역시 미국 정부와 비밀리에 협력 관계에 있다.
“중국 측 움직임도 포착됐습니다.”
“중국까지요?”
오바마는 어이없는 시선으로 다시 보좌관을 바라봤다.
일개 동양인 하나가 움직였을 뿐인데 세계적 비밀 조직들이 덩달아 움직였다.
미국 또한 FBI를 비롯해 여러 비밀 정보 조직들이 다니엘을 추적했다.
“성전 기사단과 중국 측 중요 인사가 혼맥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다니엘이 연관돼 있습니다.”
“기억났습니다. 리장창의 딸이 발루아 백작가의 자제과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바마는 과거에 들었던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발루아 백작가는 중요하게 취급되는 집안인 동시에 단체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그들이 굴리는 자금 자체가 유럽 연합의 종잣돈과 같았다.
“리장창의 딸과 다니엘이 과거 연인 관계였다는 것도 기억하시는지요?”
“알고 있습니다.”
“한때 리장창은 다니엘을 죽이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요원들을 파견해 놓았습니다.”
“늦은 시간이어도 중요한 사항은 바로 보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는 거야? 폭탄 같은 놈.’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니엘이라는 자는 일개 동양인에 불과하지만 자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다.
한국 대통령들도 자신 앞에 모두 고개 숙였는데 그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트럼프는 어때요?”
“……SNS에서 언급되는 양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가요?”
“네…….”
“흐음……. 뭔가 냄새가 나는데.”
오바마가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 쪽에서도 트래픽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과거와 다른 여론 흐름입니다. 누군가 개입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증거 자료 수집하십시오.”
“넵!”
미국 대선 문제는 오바마를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지난 8년간 쌓아 놓은 업적을 한 방에 날리고도 남을 인간이 바로 트럼프였다.
오바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깊이 자리잡은 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새치가 가득해진 머리칼.
“후우우…….”
오바마가 뱉은 한숨이 백악관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
‘죽을 때까지…….’
정령 비비안의 귓가에 메아리쳐 울리는 ‘죽을 때까지’라는 말.
쿵! 쿵! 쿵!
강하게 심장이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외형과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분명 비비안은 정령체다.
살아있지만 인간과 다른 육체를 소유했다.
물의 정령이다 보니 몸은 물의 정화 그 자체다.
그런 비비안이 오랜 세월 만에 여인으로서의 감정을 새삼 느꼈다.
이제 더는 인간일 수 없지만 속절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농담은 아닌 것 같다.
가까이서 생생히 보았던 인간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진한 갈색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자신에게 사기를 쳤던 대마법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청명한 데다 잘생겼다.
그리고 진정 부정할 수 없는 맑은 마나의 향기.
정령사가 맞다.
품에 안겨 있는 짧은 시간 동안 포근함이 밀려왔다.
솔직히 벗어나기 싫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팔의 힘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존재처럼 생각됐다.
“싫어요?”
남자가 다시 묻는다.
“아, 아니요!”
비비안이 발작적으로 대답했다.
급하게 대답하고 나서 부끄러움이 한없이 밀려왔다.
청혼을 받았던 소녀 때의 감정처럼 조절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청혼이 맞을지 몰랐다.
정령사와 정령은 둘 중 하나가 소멸할 때까지 영원히 맹약으로 맺어진 존재라 마법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 계약을 맺도록 하죠.”
“???”
정령이지만 정령사와 계약 맺는 정확한 방법을 몰랐다.
마법서에는 그것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간단합니다.”
“???”
“진심을 다해 따라해 봐요.”
정령사는 친절했다.
또 그의 미소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태어나 이런 상황은 처음 맞이한다.
사악한 마법사도 달콤한 말을 뱉은 적이 있지만 깊이가 달랐다.
끄덕.
눈이 마주치자 비비안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을 맺지 않아도 마음은 진작 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물에 잠기던 자신을 건져내던 순간 비비안은 그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나 정령 비비안은.”
남자가 선창했다.
“나 정령 비비안은…….”
비비안은 세뇌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내 눈앞에 있는 정령사 다니엘과…….”
“내 눈앞에 있는 정령사 다니엘과…….”
“영원한 정령 계약을 맺었음을 모든 자연과 마나 앞에 진심으로 선언합니다.”
“영원한…… 정령 계약을 맺었음을 모든 자연과 마나 앞에 진심으로 선언합니다.”
계약은 단순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는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공기 중의 마나와 호수에 녹아 있던 물의 정화가 둘을 완벽하게 감쌌다.
신비로운 푸른빛이 투명한 구체가 되어 주변을 밝혔다.
어쩌면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맺어지는 정령 계약이었다.
푸른빛의 입자와 기운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게 느껴졌다.
촤아아아아아앗!
한 줄기 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밤하늘로 뻗어 나갔다.
‘이게 계약……!’
비비안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마나의 맹약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언령의 형태로 이뤄지는 마나의 맹약이 공적이며 사무적이라면 정령의 계약은 연인들 간에 체결한 사랑의 서약과 비슷했다.
온 마음이 남자를 향해 쏠렸다.
둘이 아닌 온전하게 하나 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야.’
비비안의 영혼과 마음이 평온해지며 따스해졌다.
스르르릇.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남자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붉은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뜨거워진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과 입술이 만났다.
“!!!”
난생처음 맞이하는 남자의 입술에 비비안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영혼에 깊이 새겨질 날카로운 첫 키스.
사르르.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 순간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그 무엇.
또로로롯.
비비안의 눈가로 뜨거운 푸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
- 정령 계약이 완성됐습니다!
- 지구 최초의 계약을 축하하며 정령계에 속한 자연신들이 엄청난 포인트를 지불했습니다.
- 정령 비비안은 영원히 당신에게 종속됐습니다.
- 계약은 해지할 수 없습니다.
연속으로 울리는 알림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비비안과 정령 계약을 맺기 위해 달콤한 속삭임을 날렸다.
사실 비비안이 마음에 들었다.
약간의 계산이 깔려있지만 진심이다.
비비안도 튕기지 않았다.
덜컥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보기보다 더 영혼이 순수했다.
문제는!
그녀가 내 허리를 잡고 키스했다는 것.
정령사와 정령이 키스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계에도 내가 계약을 맺은 정령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런 감정까지는 들지 않았다.
동생 같고 누이 같은 존재들이 바로 정령들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비비안과의 계약은 남녀 간의 애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걸 알 정도다.
계산 착오였다.
왜 비비안이 나에게 키스해왔는지는 모르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시원하고 신선한 복숭아 아이스티 맛이 났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려 버렸다.
이상하게 갈증이 일며 목이 말랐다.
사막을 횡단하는 목마른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거침없이 비비안을 탐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사악한 마법사와 결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임에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정령 계약에 있어 마지막 도장을 찍는 절차처럼 느껴졌다.
“으음…….”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신음.
비비안의 입술은 무척 뜨거웠다.
차가운 물 속성의 정령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여인의 입술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 하나만으로도 비비안과 하나가 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동시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 물의 정령왕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뭐, 뭐라고? 물의 정령왕???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