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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장. 제 정령이 되어주겠습니까? (1,198/1,284)

1223장. 제 정령이 되어주겠습니까?

“???”

가브리엘은 의구심이 들었다.

짧은 순간 상상을 초월할 만한 공방이 벌어졌다.

진짜 마법의 실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눈으로 뼈저리게 확인했다.

지금껏 백색 기사단에서 습득했던 마법은 코흘리개 아이들의 장난 수준이었다.

하늘을 날지도 못했고 저렇듯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저런 마법이 존재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갑옷 같은 건 단숨에 뚫어버릴 정도의 강한 얼음창 수십 개가 하늘을 날았다.

단거리 유도 미사일이 따로 없었다.

자신을 향해 한 발만 날아와도 무릎 꿇은 채 눈을 감고 신을 찾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무서운 마법을 화염으로 박살내 버린 다니엘.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은 공포의 얼음 구체 공격도 검으로 산산히 부수며 나타났다.

비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령도 대단했지만 그녀의 마법을 방어하는 다니엘은 더 위대했다.

단 두 방에 신화와 같은 마녀를 무너트렸다.

그리고.

“지금 뭐 하는…….”

공격에 참패하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미녀를 건져 올리는 다니엘.

전 상황을 보지 못한 누군가가 봤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그림이 연출됐다.

보기만 해도 신비스러운 미모를 가진 여인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품에 당겨 안았다.

영화 속 명장면이 따로 없다.

어느새 하늘에는 초승달이 선명하게 떴다.

그 아래 은은한 푸른빛에 휩싸인 미녀를 품은 미남.

“…….”

가브리엘은 순간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몹시 부러웠다.

바티칸에 수많은 미남 미녀들이 찾아왔지만 이런 그림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의 아름다운 남녀는 본 적이 없다.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완벽했다.

거기에 가브리엘이 진짜 부러워하는 요소가 있었으니 이 두 사람 모두 진짜 마법사라는 사실이다.

남녀는 말이 없었다.

지그시 다니엘을 바라보는 마녀 비비안.

오른팔로 건져낸 비비안을 품에 안고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는 다니엘.

어떤 교감이 오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위기 자체로 무척 신비로웠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싸우던 둘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겉보기에는 완벽한 연인 사이였다.

“그런데 왜?”

물에 빠져 잠기던 비비안을 다니엘이 왜 구했는지 가브리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려한 마법에 취해 멍한 상태에 빠진 사이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퇴근이라고 한 것 같은데…….”

촉각을 곤두세워 예민해진 귀에 잠깐 들렸던 퇴근이라는 낯선 단어.

이 상황과 퇴근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고지식한 백색 기사단 기사에게는 고난도 수학 문제를 마주한 것과 다름없었다.

***

“???”

비비안이 큰 눈을 껌벅였다.

자신이 왜 남자 품에 안기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자신이 공격을 퍼부었던 인간이 손을 뻗어 그녀를 건져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이 펼쳤던 고난도 마법에 대응하던 순간에도 모든 상황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물의 정령이 아님에도 물 위에 떠 있다.

두근.

정령이 된 직후부터 죽은 듯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바로 정령의 운명이다.

살아있음에도 산 자가 아닌 상태다.

살아남기 위해 자연체 상태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정령인 자신을 마치 인간 대하듯 물속에서 끌어내 안아 올린 남자.

스스로를 대마법사라 밝힌 오만한 그자다.

그런데.

‘따뜻해.’

이런 온기는 처음 느꼈다.

멀린과는 공식적으로 부부 사이였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소녀 시절부터 마법사의 제자로 살았던 터라 더욱이 남자와 접촉할 기회도 없었다.

아서 왕과 몇 번 마주쳤지만 그게 전부였다.

호수의 어부들도 비비안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했다.

오랜 시간 마법에 빠져 살았고 유부녀라 스스로 인식했기에 다른 남자를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 비비안은 처음으로 남자의 뜨거운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허리를 두르고 있는 강인한 팔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코끝을 파고드는 다니엘의 부드럽고 강한 체취.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사르르 얼굴이 붉어졌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멀린보다 더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대마법사 다니엘.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계산은 뭐야?’

비비안은 그 틈에도 의문이 들었다.

다니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마는 스스로 놓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더없이 따듯한 음성.

죽이려던 자신에 대한 원망 같은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멀린, 끝장내고 싶지 않습니까?”

“!!!”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니엘의 말투가 한없이 정중해져 있었다.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자신이 긴 세월 동안 품고 있던 가장 강한 집념이 바로 멀린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

비비안은 의문에 찬 시선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자신과 멀린 사이에 맺어진 맹약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욱이 자신은 온전치 못한 반쪽짜리 정령이다.

멀린에게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쓸 만한 정령사 필요 없으세요?”

“아아!”

비비안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강하게 새어나왔다.

***

정령 맞아?

품에 안긴 중세시대의 여자 마법사이자 정령 비비안은 실재하는 인간과 같았다.

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져지는 감촉은 보통 인간과 똑같았다.

다만 온기가 인간과 달랐다.

호수 수온과 체온이 같았다.

그럼에도 손을 통해 느껴지는 탄탄하고 잘록한 허리는…….

마나가 부족해지자 정령 갑옷은 사라져 버렸다.

신비한 푸른빛이 도는 실크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비비안.

건져낼 때 나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인간으로 치면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멀린으로 인해 고통받아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기회가 온 만큼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녀의 심리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다시 생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감춰진 진실을 살짝 알려줬다.

카르마라 불리는 업은 내가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과의 연이 다 끝나야 카르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이생에 끝내지 못하면 다음 생까지 연결되게 돼 있는 게 우주가 정한 이치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다.

정령들은 정령사를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된다.

한눈에 봐도 비비안은 반쪽짜리 정령이었다.

더구나 정령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에 던져 정령체가 된 것뿐이다.

어떤 성향의 마법인지는 나도 확인 불가능하다.

다만 호수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물에 가깝고 친숙하기에 물의 정령이 된 듯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눈동자마저 은은하게 파란빛이 도는 비비안이 묻는다.

음색이 듣기 좋았다.

가는 말이 고와지자 그녀도 고운 말로 화답했다.

“속고만 살아왔습니까?”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비비안.

진정 안타까웠다.

사악한 마법사 놈이 비비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게 빤하다.

“전 믿어도 됩니다.”

파밧.

큰 눈동자를 깜빡이며 비비안이 날 본다.

이거, 거리가 너무 가깝다.

허리를 안고 있는 상태다 보니 누가 보면 뜨겁고 친밀한 연인 사이라 오해하고도 남을 정도의 포즈다.

그런데 비비안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그러니 나도 손을 놓을 수 없다.

다시 놓는 순간 비비안이 호수에 잠겨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남아 있다.

이 정도면 비비안과 나 사이에 뭔가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 지구 정령과 조우했습니다.

일찍도 말해 준다!

알림음이 뒤늦게 들렸다.

“당신은 마법사인데…….”

비비안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말끝을 흐렸다.

마법사는 정령사가 될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마법사와 정령사 둘 다 마나를 이용하는 건 맞다.

하지만 마법사는 감성보다 이성이, 정령사는 이성보다 감성이 발달한 자들이다.

둘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존재들이다.

“살다 보면 예외라는 게 존재하기도 합니다. 비비안 님이 인간에서 졍령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말이 술술 잘도 흘러나온다.

깜빡깜빡.

고심하면 나타나는 버릇인지 두 번 눈을 감았다 뜨는 비비안.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떨린다.

중세에도 이런 미녀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넘쳤다.

멀린 이 자식, 고자가 확실하다.

비비안 같은 천하의 미녀를 자신의 마법 제물로 이용하다니.

“멀린과 전 맹약으로 맺어졌습니다.”

“마나의 맹약 말입니까?”

“……네.”

“어떤 내용의 맹약입니까?”

“하아.”

물음에 비비안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말하기 부끄러운 모양이다.

“결혼 서약 당시 맺어진 마나의 맹약입니다. 전 평생 멀린을 죽일 수 없습니다.”

고약한 마법사 놈!

치밀한 성격답게 여자가 가장 마음 약할 때 그물을 치고 옭아맸다.

“그래서 정령이 된 겁니까?”

“제가 아는 마법서에는 정령이 되면 마나의 맹약을 깨트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마법서를 누가 줬나요?”

“……멀린이요.”

완벽하게 당했다.

씨익.

실소가 터져 나왔다.

멀린 덕분에 일이 아주 잘 풀릴 것 같다.

“완벽하게 맹약을 소멸시키는 법은 알고 있습니까?”

“정령사와 계약을 맺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멀린이 알려줬나요?”

“네.”

“의외군요. 그자가 왜…….”

“이곳에는 정령사가 없다고 자신하더군요. 더욱이 저와 계약을 맺으려면 최소 중급 이상의 정령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멀린 녀석 오늘 뒤통수 제대로 맞을 것 같다.

“후훗.”

짧은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

영문을 모른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

정령도 숨을 쉰다.

그녀에게서 시원하고 상쾌한 체취가 풍겼다.

내심 비비안의 능력이 궁금했다.

7서클 마법까지 사용하던 비비안.

쿵! 쿵!

심장이 신나게 뛰었다.

지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정령이 없다는 거다.

활용도가 무척 많았지만 지구에서는 정령 계약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수한 자연의 영은 사방에 존재했지만 이계처럼 정령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제가 비비안 님이 애타게 찾던 중급 정령사입니다!”

“!!!”

비비안의 눈동자가 처음 보는 크기로 커졌다.

당혹과 불신, 그리고 기쁨과 기대 등 비비안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투영됐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화끈하게 밀어붙일 때였다.

비비안을 껴안은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만큼 그녀와 나의 몸이 밀착됐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

그리고.

“비비안……. 죽을 때까지 함께할 제 정령이 되어주겠습니까?”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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