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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장. 현실이 된 신화(3) (1,195/1,284)

1220장. 현실이 된 신화(3)

파바밧.

‘사랑하는 나의 비비안’이라는 말에 실체를 드러낸 여성체는 멀린의 기대와 달리 죽일 듯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멀린의 말 그대로 한때 여성체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연명하다 죽어갈 처지에 놓인 자신을 제자로 받아줬다.

아낌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마법도 전수해줬다.

비비안은 점점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며 그에게 연정을 품었다.

마법사 멀린의 나이가 실제로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다 줬다.

가끔 자신을 여인으로 바라보는 듯한 욕망이 뒤섞인 시선이 이상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 멀린도 남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멀린이 청혼을 해왔다.

연정을 품고 있었던 비비안은 기쁜 마음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지옥 같은 삶에서 건져준 은인과 함께라면 마녀라 불려도 괜찮았다.

그러나 혼인 서약을 한 직후부터 멀린은 변했다.

그녀가 기대했던 남녀 간의 애정 표현은 전혀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마다 특수한 마법을 수련 중이라며 핑계를 댔고 비비안 역시 납득했다.

어차피 육체적 관계로 유지되는 사이가 아닌 마음으로 존경해 온 이였기에 이해했다.

비비안은 아내라는 호칭에 매우 만족하며 멀린이 전수하는 마법에 매진했다.

가끔 멀린이 요구하는 일만 수행해 주면 됐다.

아서라는 서자를 위해 연극을 꾸몄다.

여러 번 선한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계획적으로 꾸며 놓은 마법으로 물에 빠진 어부들을 건져주었다.

뒤로 선한 호수의 요정이라는 풍문이 만들어졌고 소문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 모든 게 멀린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어느 때부터 비비안은 멀린의 심성이 선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서가 서자 신분이 된 이유도 멀린의 계략 중 하나였다.

아서의 친어머니인 공작부인이 멀린의 마법에 의해 변을 당했다.

남편으로 모습을 바꾼 외간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그자가 아서왕의 친부였다.

그렇게 잉태된 아서는 알려진 것처럼 용감하거나 뛰어나지도 않았다.

멀린의 계획하에 여러 마법과 기적을 통해 철저하게 포장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욕망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소문이 난 기네비어도 그 판에 뛰어들었다.

비비안도 그녀의 진면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미모를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약소국의 공주라는 연약함까지 이용해 기사들을 모았다.

미모의 여인이었던 만큼 젊은 기사 추종자들이 많았다.

아서도 그중의 한 명.

기네비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사랑에 빠졌다.

운명처럼 기네비어도 아서를 선택했다.

문제는 기네비어도 젊고 잘생긴 다른 기사와 또 사랑에 빠져 불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결국 기네비어는 아서와 기사 모두 버리고 유럽으로 도망을 쳤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분란의 씨앗이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죽음을 맞았다.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멀린이 있었고 그가 모든 원흉의 시작과 끝이었다.

“사랑? 가증스럽구나!”

비비안은 증오 가득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흐흐흐. 본래 사랑이란 아픈 거라 내가 말했지 않았더냐.”

멀린은 비비안의 분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정령이 되다니……. 정말 너의 재능은 내가 본 인간들 중 최고다.”

멀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비비안을 유심히 살폈다.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비비안이 멀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아아앗!

비비안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강력하고 차가운 마나.

수련하기 까다롭다는 고서클 빙계 마법이었다.

“오! 역시 대단하구나! 긴 세월 동안 가르쳐 주지 않은 마법까지 스스로 깨우치다니! 역시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하하하하하.”

멀린은 비비안의 모습에 만족해하며 광소를 터트렸다.

“흥! 네놈을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야!”

비비안은 차디찬 음성과 냉소로 응답했다.

“누구 마음대로?”

멀린이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난! 과거 맹약으로 자유롭다. 육신을 벗어던지고 새로이 얻은 이 몸으로…….”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비안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멀린이 미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느냐? 오! 나의 안타까운 비비안. 아직도 네 상상력은 소녀 시절에 멈춰 있구나.”

“뭐라고?”

‘이자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지?’

비비안은 멀린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오늘만 기다리며 세월을 견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동 마법을 펼쳐 이곳으로 왔음을 알았다.

멀린의 마나 흐름이 불규칙했다.

지금 수준의 마법 실력이라면 마법사를 원하는 대로 농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멀린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흐흐흐. 육체를 버리고 정령이 되었다고 마나의 맹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당연하지! 마법서에는 분명히…….”

“그 마법서를 누가 줬느냐?”

“!!!”

비비안이 순간 섬찟 놀랐다.

“넌 아직도 날 모르는구나. 흐흐흐.”

“설마…….”

비비안은 마법서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마법서에는 육체를 버리고 정령이 되면 마나의 맹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복수를 위해 비비안은 피눈물을 삼키며 육신을 버렸다.

그런데 그 내용이 거짓이라 말하는 멀린.

“마법서의 내용은 맞다. 하지만…….”

멀린이 조롱 가득한 눈빛으로 불안해하는 비비안을 응시했다.

정령의 신비로움까지 더해 상상할 수 없는 미모를 자랑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비비안만큼 훌륭한 미모의 여인을 본 적이 없다.

아서 왕도 그런 비비안을 보고 단숨에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다만 멀린의 아내이자 고위급 마법사라는 걸 알고 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랬던 비비안은 지금도 멀린만은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남성의 몸을 소유했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체로 살아온 멀린.

“말해!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넌…….”

비비안이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몇 가닥 마나가 멀린을 향해 가볍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파스스스스스.

멀린을 향하던 마나는 그에게 닿기도 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어리석은 것. 마나의 맹약은 보이는 육체 따위와 관련이 없다. 네가 정령이 되었다고 하나 넌 정령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반쪽짜리다. 지구에 온전한 정령사가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더욱이 넌 중급 정령 이상의 힘을 소유했다. 뛰어난 정령사가 아니고는 널 이끌어주지 못해!”

“…….”

멀린의 독설에 비비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마법서는 모두 다 멀린이 직접 필사한 후 건네준 것이었다.

한마디로 내용이 틀려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어. 저 사악한 마법사를 죽일 수 없다면…….’

또로로록.

정령이 된 비비안의 눈에서 푸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1500년을 묵힌 한이 서린 진한 눈물.

“이렇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니 맹약을 풀어주도록 하지.”

“거짓말! 넌 언제나 나에게 달콤한 거짓말만 뱉었어!”

비비안이 되받아쳤다.

결혼식 때 작성한 서약서가 발목을 잡았다.

멀린이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그를 목숨으로 섬기는 반쪽이 되겠다고 마나에 대고 맹세했다.

육체를 버리고 정령이 되어도 그 맹약은 유효했다.

비비안에게 이제 남은 건 절망.

멀린의 사탕발림에 두 번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멀린이 조용히 말했다.

“!!!”

비비안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졌다.

거짓이라 치부하기에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단 조건이 있다.”

비비안을 직시하며 입을 여는 멀린.

외모은 바뀌었지만 목소리는 과거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게 음흉하고 독살스러웠다.

“……말해.”

비비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도 느꼈을 것이다. 지금 이 호수에 찾아온 낯선 이방인 둘. 그자들을 없애면 너와 맺었던 모든 마나의 맹약들을 무효화하겠다.”

“…….”

과거처럼 사악한 제안을 했다.

입술을 잘근 깨문 비비안.

두 번 다시 그가 친 그물에 걸리지 않게 멀린이 없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파아아아아앗!

멀린의 머리 위에서 마나가 빛났다.

맹약이 완성됐다는 의미.

파르르르르르르.

비비안의 정령체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리고.

“그 맹약……. 받아들이겠다!”

***

촤아아아앗!

“으허허헛! 너……무 빠릅니다!”

가브리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시가 급한 나머지 과속했다.

얼음으로 코팅된 나룻배는 마찰력 제로 상태로 호수를 가로질렀다.

당당하게 서 있던 가브리엘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도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여름 바다 한철 장사인 모터보트 바나나 놀이기구보다 빨랐다.

‘지금쯤 눈치챘겠지.’

호수에 들어선 순간 느꼈다.

교묘하게 가동되는 고급 마법진.

긴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온 것 같았다.

마법진 분야에서는 멀린을 따라가지 못했다.

마음이 바빴다.

멀린이 다른 수를 내기 전에 놈의 본거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비비가 보내온 신호가 점점 강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섬.

그곳에서 텔레파시가 강하게 잡혔다.

뚝!

“!!!”

그런데 한순간 갑자기 신호가 차단됐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개입했음이 확실했다.

“젠장!”

마법사가 비비 목걸이의 기능을 눈치챈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가브리엘이 뱃전을 양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준비하십시오.”

“네?”

“수영은 할 줄 알죠?”

“그야 당연히…….”

그 순간.

“헛!”

발밑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퍼어어어어엉!

어뢰가 폭발한 듯 엄청난 에너지가 뱃전 밑에서 폭발했다.

투웅!

배와 함께 가브리엘의 몸이 튀어 올랐다.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 물에 빠져 가라앉는 순간 익사할 게 뻔했다.

턱!

손을 붙잡았다.

휘이이익.

그대로 힘껏 돌려 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기사 가브리엘.

섬을 향해 새처럼 날아갔다.

파아앗!

동시에 떠 있는 나를 향해 수면에서 뻗어 나오는 날카로운 얼음 창 수십 개.

온몸을 뚫어버릴 것처럼 기세가 대단했다.

“실드!!!”

발밑으로 보호막을 둘렀다.

가브리엘을 구하느라 후퇴할 타이밍을 놓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 폭발음이 울렸다.

빠가가가가각.

출렁이며 실드에 금이 갔다.

“!!!”

생각보다 더 강력한 빙계 마법.

반발력을 이용해 허공 높이 치솟았다.

파아앗!

그리고 그때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갑옷을 두른 여전사.

한 손에 얼음창을 들었다.

호수에서 맡아졌던 정령의 등장이었다.

“당신은 누군가!”

분노를 드러내며 그녀의 정체를 물었다.

“난…….”

감정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인간계 정령이 입을 열었다.

“호수의 여왕……. 비비안이다.”

“!!!”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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