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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장. 현실이 된 신화(2) (1,194/1,284)

1219장. 현실이 된 신화(2)

“나 납치? 클라라가?”

급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리장창.

“그렇습니다. 단주님. 아가씨께서 납치를.”

“아!”

털썩.

짧은 신음을 토하며 리장창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으으.”

천하의 리장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나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딸의 인생까지 거래 조건이 됐다.

그럼에도 자신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던 착한 딸.

다행히 성전 기사단의 가문에 잘 적응하며 지내주어 한시름 덜고 있었다.

곧 손녀에 이어 손자까지 품에 안게 됐다.

공식적인 자식이라고 해봐야 달랑 딸 하나였기에 손녀와 손자는 리장창의 마지막 후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딸 클라라가 아이를 품은 몸으로 납치를 당했다.

“누군가! 어떤 놈이 감히 내 딸을 납치해!!!”

잠깐의 좌절을 맛본 뒤 밀려드는 격한 분노에 리장창이 포효했다.

눈동자에 적개심이 가득 찼다.

적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다면 당장 찢어 죽이고 말 기세였다.

“정확히 파악은 안 됐습니다만.”

보고하던 제갈유량은 얼굴에서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클라라의 안전과 성전 기사단의 동태 파악을 위해 백작 성에서 일하는 자들을 매수해 놓았다.

이번 사건도 그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급보였다.

“유량 말하라. 어서!”

리장창이 매서운 눈으로 재촉했다.

“기사단장 아르노 발루아 백작님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고? 기사단장?”

리장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두 눈에 깃든 강력한 불신.

“왜? 그가 어찌 내 딸을 납치한단 말인가! 백작은 시아버지가 아닌가!”

리장창은 제갈유량의 말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아르노 발루아 백작은 며느리 클라라를 무척 예뻐했다.

손녀에 이어 손자까지 뱃속에 잉태한 것을 알고 직접 전화해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을 정도다.

그런데 납치라니.

“그쪽 기사들의 말로는 백작의 정신이 오염됐다고 합니다.”

“정신 오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헛! 설마?”

헛소리로 치부하려던 리장창이 순간 놀라 말을 멈추었다.

아사신들의 차일드 가문 공격 때 보고됐던 정신계 술법이 떠올랐다.

“아사신인가?”

개연성은 충분했다.

아사신과 성전 기사단은 지난 세기 동안 철천지원수 관계였다.

“아닙니다.”

“아사신이 아니면 누구?”

“마법사라고 합니다.”

“마법사? 유량!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멀쩡한 21세기 과학 문명 시대에 마법사라니.”

말을 하다 말고 리장창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보니 아사신도 마법을 사용했다.

가깝게는 자신도 각종 술법을 펼치는 도인들을 여럿 알고 있다.

“마법사 이름은 멀린이라고 합니다.”

제갈유량은 접수한 정보를 그대로 전했다.

감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멀린? 설마 그 멀린?”

리장창도 어린 시절 읽었던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영국 신화 속 마법사 멀린을 기억했다.

이름을 듣자 퍼뜩 그가 떠올랐다.

“보고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끄응…… 그런 말도 안 되는.”

리장창은 입으로는 사실을 부정했지만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런 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사단은 어떻게 하고 있나?”

서둘러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성전 기사단 관할이다.

중국 요원들을 투입했다가는 정치적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조직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적인 일에 조직의 힘을 이용하는 건 리장창도 용납 못 했다.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그놈? 누구?”

제갈유량의 말에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 정체.

“장태산. 그놈이 납치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헛! 자, 장태산? 그놈이 왜!!!”

결코 클라라와 두 번 다시 엮여서는 안 될 과거의 악연.

장태산이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 클라라가 울면서 놈에게 자신의 목숨을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 덕에 지금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직 휴전 기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곧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할 운명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클라라 납치 현장에 있었다는 장태산.

딸이 납치당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이 밀려왔다.

“마법사와 대적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백작님의 따님인 비비안 님이 부탁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

리장창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클라라의 납치 문제와 함께 엮여버린 장태산의 등장.

“으드드득.”

리장창이 묵직하게 이를 갈았다.

원망의 화살이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모든 게 장태산 그놈 탓이야! 그놈 타아아앗!!!”

***

“이곳은 도대체.”

클라라는 기절해 있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멀린이 만삭인 자신을 인질로 납치했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강제로 이별했다.

다니엘도 멀린을 막지 못했다.

직후 펼쳐진 마법.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낀 직후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낯선 공간이다.

천장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공간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보다 많이 작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운이 나쁘지 않았다.

내부 공기는 시원했으며 또 정갈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침대 하나와 책장, 그리고 의자 두 개가 가구의 전부였다.

전체적으로 중세풍 느낌이 나는 공간이다.

“언니 깨어나셨어요. 몸은 어때요?”

“아가씨. 이곳은 어디인가요?”

클라라의 뒤에서 나타난 비비안.

“마법사의 비밀 공간 같아요.”

“비밀 공간이라면?”

“전설에 나오잖아요. 대마법사 멀린의 무덤으로 사용됐다는 동굴 말이에요.”

“아!”

클라라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마법사 멀린의 등장.

다니엘에게 도움을 청했을 만큼 낯선 사람 같았지만 진짜 마법사가 시아버지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언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멀린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몰라요.”

“흉계요? 어떤.”

“태어날 아기를 노리는 것 같아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비비안은 진작 감을 잡았다.

멀린과 아기의 미래는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감지되는 느낌은 그랬다.

“왜 아기를.”

클라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불룩한 배를 만지며 물었다.

그녀 역시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마법사들은 무척 잔인해 아이를 제물로 바치거나 마법 재료로 사용한다는 옛이야기를 떠올렸을 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멀린은 대단한 마법사 같아요. 전설에 언급된 것보다 더 말이에요.”

비비안은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평가했다.

아빠의 몸을 차지하고 그동안 기사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벼락을 뿌렸다.

비비안뿐만 아니라 최고의 실력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다니엘도 당황했을 정도다.

‘이동 마법이라니…….’

초능력을 소유한 비비안도 이동 마법이 발현됐을 때는 할 말이 없었다.

전혀 한 치 앞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특유의 감각으로 아빠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흑마법사들로 구성된 아사신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버님이 저렇게 되셨다면.”

클라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파르르 몸을 떨었다.

팔에 생겼던 상처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핏자국만 남았다.

마법사와 자신이 마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뱃속의 아기는 지키고 싶었다.

“믿어봐야죠.”

“네?”

“다니엘 말이에요.”

“아!!!”

다니엘의 이름에서 클라라는 희망을 느꼈다.

지금 상황에서는 다니엘밖에 대안이 없었다.

마법사와 대적해 겁 없는 전투를 벌였다.

마법사의 흉악한 술수에 당황한 나머지 기회를 놓쳤지만 다니엘은 진짜 능력자였다.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마법사를…….”

비비안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믿음을 드러냈다.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줬던 지상 최강자 다니엘.

“맞아요. 다니엘이라면 반드시 찾아올 거예요.”

클라라도 비비안 못지않은 강한 믿음을 표출했다.

아버지와 중국의 적인 그였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마법사가”

비비안이 궁금한 듯 문 쪽을 바라봤다.

굳게 닫혀있는 두툼한 나무문.

마법을 이용해 만들어진 듯 단단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완벽하게 차단된 소음.

‘다니엘 어서 와 구해줘! 나 무섭단 말이야.’

만삭인 클라라 앞에서 그녀를 위해 강한 척했지만 비비안도 두려움을 느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당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저 다니엘이 선물로 준 목걸이를 만지며 강력한 텔레파시를 보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

“호오, 아직도 살아있었단 말이지?”

멀린은 자신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이질적인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호수의 요정이자 마법사인 여인.

한때 아내로 대우하긴 했지만 철저하게 이용당한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뛰어난 마법 재능으로 멀린을 당혹스럽게 만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적수는 되지 않았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엑스칼리버에 기생했지만 그녀를 잊은 건 아니었다.

긴 세월 오래 전에 죽었을 거라 예상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니군. 흐흐흐.”

멀린은 다가오는 상대의 기운을 감지했다.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마법의 끈.

프랑스에서는 거의 감지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확실히 느껴졌다.

“역시 똑똑해. 스스로 생존 방법을 찾아내다니.”

멀린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자신이 전수했던 마법을 빠짐없이 배웠던 그녀.

두려움을 거두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리고 이건!!!”

멀린은 그녀 외의 또 다른 기운 하나를 더 감지했다.

로몬드 호수는 사람들이 전설을 통해 알고 있는 자신의 동굴과 거리가 멀었다.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그는 아내를 통해 이곳에 비밀 창고와 수련실을 만들었다.

당시 충실한 종이었던 아내는 멀린이 시키는 대로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아직도 생생하게 작동되고 있는 탐지 마법진.

그 마법진이 두 개의 각각 다른 기운을 전해왔다.

“날 찾아왔단 말인가? 어떻게???”

멀린은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 장거리 이동 마법을 탐지해 낼 능력자는 이계에서도 드물었다.

드래곤 급이라면 모를까 마탑주도 발휘하기 힘든 능력이다.

“흐흐흐. 그 계집이군.”

순간 멀린은 단장의 딸을 떠올렸다.

자신의 정체를 진작 파악하고 있었던 영특한 계집.

“마법을 이렇게 능숙하게 펼치는 지구인이라. 연구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쳐.”

다니엘은 대단히 수상한 놈이었다.

그의 마나에서 고향의 냄새가 났다.

마법 발현 방식이 똑같았다.

“멍청한 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멀린은 자신만만했다.

호수의 마법진 기능은 거의 모든 게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력한 조력자가 존재했다.

“오랜만이야.”

멀린이 한곳을 응시했다.

스르르릇.

그 순간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파란빛의 파장과 여인.

“멀린.”

형체가 다 드러나자마자 멀린의 이름을 아련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 순간.

“긴 세월 동안 내가 무척 그리웠구나. 사랑하는 나의 비비안. 크크크.”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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