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장. 현실이 된 신화
“이스라엘에서 곧장 영국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추기경님.”
“상황이 그렇게 급박한 겁니까?”
“가브리엘의 보고로는 그렇습니다. 사악한 마법사가 아르노 발루아 백작의 육체를 강탈했다고 합니다. 최대한 빠른 수습을 요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일까요?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은 정화됐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고대 마법사 멀린의 출현이라니……. 하아아.”
백색 기사단을 담당하고 있는 추기경 제르마노의 노쇠한 얼굴에 주름이 그려졌다.
한때 기사로 활약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명성을 날렸다.
세상에 극도로 해악을 끼치는 이단자와 아사신을 무수히 처단했다.
지금은 단장이자 추기경이 되어 교황을 근접거리에서 경호하고 있다.
그런 제르마노는 손에 들린 서류를 천천히 살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급박한 상황에 맞게 약식으로 전달된 보고서.
아직 젊은 축에 들지만 백색 기사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전도유망한 가브리엘이 생각지 못한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부기사단장을 다급하게 불러들였다.
“삼신기 중 하나인 엑스칼리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용히 대답하는 백색 기사단의 부단주 브리토.
올해 나이 60을 넘기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사십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험한 요소가 많은 보고에도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차갑다는 표현이 제격일 정도로 그의 몸에서 냉기가 흘렀다.
긴 세월 동안 교황을 수호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온 그였다.
기사단장과 함께 많은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세상에 알려진 바는 없었지만 매번 전투는 치열했다.
그의 몸 곳곳에 있는 영광의 상처가 그 같은 사실을 증명했다.
“엑스칼리버를 절대 세상에 내놓지 말라던 선배들의 말이 맞았군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가브리엘 경의 보고에 의하면 멀린은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플라이 마법뿐만 아니라 이동 마법까지 펼쳤다고 합니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모릅니다.”
“대책이라……. 성하를 안전시설에 모시자는 겁니까?”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성하께서 거절할 게 뻔합니다.”
낮은 자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는 교황.
신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교황이 정해져 있는 미사도 주관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건강 문제와 암습 경보가 있었을 때 한두 번 빠진 게 전부였다.
하지만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종교적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인물이 현 교황이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방법은…….”
부단주 브리토가 다른 방법을 제시하려 다시 입을 열었다.
“부단주가 가시겠습니까?”
바로 낌새를 알아차린 추기경 제르마노.
백작이 단장이긴 했지만 부단주와는 생사를 함께한 전우이자 동기였다.
함께 사제 서품과 기사 수업을 받았다.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혼자로는 벅찰 게 확실합니다.”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다니엘이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야훼바트를 위기에서 구하고 성전 기사단에게도 도움을 줬다는 실력자입니다. 그를 믿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추기경님도 알다시피 1990년 베이루트 변절 사건으로 기사단원들 셋이 동시에 사망했습니다. 전 그때 이후로 이단자들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브리토의 의견은 단호했다.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니…….’
1990년 격동의 레바논.
각종 민병대와 정부군의 전투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정치는 어지러웠고 그 사이를 틈타 아사신들이 활개를 쳤다.
당시 백색 기사단원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한 이방인.
신을 믿지 않는 자였지만 금세 신뢰를 얻었다.
그를 믿고 사건에 투입되었던 기사 세 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스도교인 민병대를 돕기 위해 침투했다가 폭사하고 만 것이다.
당시 죽임을 당한 이들 모두가 브리토의 친구였다.
기사 신분을 넘어 우정을 다지던 이들의 죽음을 겪은 후 부단장의 성격은 냉정하게 변했다.
“다니엘이라는 자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정체 모를 마법까지 사용하고 재력도 엄청납니다. 야훼바트와도 친분이 두텁고 트럼프 같은 위험한 자들과 돈독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겟돈에서 언급되었던 그 자일 수도 있습니다.”
“부단장, 그건 너무 비약적 발언 같습니다. 가브리엘의 보고서에는 신의 일을 함께 도모해도 될 자라고 평가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아직 어립니다. 그리고 직접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브리토의 확고한 의사표명.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십시오. 성하께는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성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 검이 무겁지 않습니다.”
추기경 제르마노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지금 냉혈 인간처럼 감정이 차갑고 냉철하지만 과거에는 누구보다 따듯한 열혈 기사였다.
그의 감춰져 있는 내면의 진면목을 제르마노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에 그자가 정말 있을까요?”
제르마노가 물었다.
“멀린의 고향이 영국 아닙니까.”
“신화가 현실이 되다니……. 신께서 안배하고 있는 계획의 끝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성호를 긋는 제르마노.
“그 끝이 어딘지 모르기에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브리토도 성호를 그으며 응대했다.
두 사람에게 주저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이 예비하셨을 또 다른 길.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기꺼이 웃으며 가리라.
***
“이곳은…….”
호수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한다는 세계 명소 1001곳에 소개될 정도로 영국이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로몬드 호수.
벌써 이곳은 가을이 왔다.
섬에서 가장 높은 지대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주변 도시는 번화하거나 규모가 크지 않았다.
낮고 오밀조밀 모여있는 집들이 태반이다.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의 전원풍 마을들이다.
“정말 이곳에 사악한 마법사가 왔습니까? 어떻게 프랑스에서 영국까지 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장거리로 이동 마법이 가능합니까?”
가브리엘이 궁금한 듯 쉬지 않고 물었다.
“이곳입니다.”
확신이 왔다.
사실 나도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이계와 달리 지구에서는 이동 마법을 쉽게 펼칠 수 없다.
소설에서는 웬만한 마법사들은 다 쉽게 펼치는 것으로 그려지는 이동 마법.
내가 직접 배운 바로 마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간과 공간을 여는 이동 마법은 고차원적인 술식을 필요로 했다.
마나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여러 방향의 공부도 필수였다.
안전한 좌표를 얻기 위해서는 주변 정보도 정확하고 확실해야만 한다.
자칫 잘못 이동 마법을 펼쳤다가는 땅속이거나 하늘 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고정형 이동 마법진을 주로 이용했다.
“그러니까 왜 이곳입니까? 멀린의 신화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호수는 여기저기 많습니다. 아서 왕의 전설도 이곳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의문은 합리적이다.
그래도 이곳이 맞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녀요? 누구요?”
비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차고 있는 목걸이는 특수 제작된 마법 물품이다.
위치 추적과 방어 마법진이 각인되어 있다.
멀린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날아왔다.
나도 이동 마법진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는 없다.
영국이라는 것만 짐작 가능했다.
마나의 기운을 집중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비비의 텔레파시와 마법 목걸이가 전하는 파장을 감지했다.
구글 지도를 참고했다.
그렇게 찾아낸 로몬드 호수.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비비의 기운 이외의 또 다른 무언가가 감지됐다.
마치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
가장 깊은 곳이 190미터에 이른다는 로몬드 호수에서 낯설면서 익숙한 어떤 냄새가 맡아졌다.
그건 바로.
“정령…….”
“네?”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가브리엘이 물었다.
지구에서는 소환 불가능한 정령의 냄새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그것도 물의 정령.
정령 계약자인 만큼 나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어딘가 음침하지만 무척 밟고 깨끗한 기운이 호수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도 감이 좋았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정령의 기운을 감지해냈다.
성기사가 아니었다면 정령사로도 대성했을 자질이 엿보였다.
“넓군요.”
“알아보니 대략 호수 길이가 32km라고 합니다. 사유지가 상당하고 호수 안에 작은 섬들도 많습니다. 지도 여기 있습니다.”
잠깐 마을에 다니러 가더니 나름의 정보를 수집해 온 가브리엘.
“기사들도 군사훈련을 받습니까?”
“……20살 전후로 특수 훈련을 이수받습니다. 폭발물 제거, 설치, 요인 보호 및 암살 같은 것 말입니다.”
말만 기사지 특수 부대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조수로 데리고 다닐 만했다.
“가볼까요?”
“지금요? 어디를 말입니까?”
“호수가 넓다지만 일반인 기준입니다. 마법사도 장거리 이동 마법에 지쳤을 겁니다. 이때 기습해야 합니다. 놈도 설마 우리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기습이라는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럼 배를 섭외해…….”
“저기 있습니다.”
“어디요?”
내 시선을 따라가던 가브리엘.
“부서진 배가 아닙니까. 물이 차서 쓸모가…….”
선착장 주변에 버려진 나룻배 하나가 보였다.
바닥에 구멍이 났는지 배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주 운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 보였다.
배의 절반 이상이 물에 잠겼다.
스으윽.
손을 들어 올렸다.
촤르르르릇.
물에 잠긴 배가 온전하게 물 위로 떠올랐다.
“으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배를 물 위에 띄우자 가브리엘이 신음을 흘렸다.
“고쳐 쓰면 되는 겁니다. 아이스!”
쩌저저저적.
배에 순식간에 하얀 서리가 꽃폈다.
고서클 빙계 마법이다.
일반적인 얼음보다 훨씬 가볍고 강력한 빙계 마법에 배는 순식간에 얼음배가 됐다.
“마법은…… 정말 놀랍군요.”
“그럼요. 아이스 커피 마실 때 사용해도 훌륭합니다.”
한여름 아이스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 빙계 마법을 자주 사용했다.
내공을 사용해 아주 얼려버리는 것보다 은근히 차가운 마법 아아가 맛이 좋다.
“타십시오.”
퉁.
배가 호수에 안정적으로 떴다.
구멍이 뚫린 바닥으로 호수의 물이 훤히 보이는 낡은 배.
“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어도 됩니다.”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브리엘.
“알겠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배에 올라탔다.
불안한지 배에 앉지 못했다.
“하체 튼튼하죠?”
“???”
“꽉 붙잡으십시오. 생각보다 빠를 겁니다.”
나도 배에 올랐다.
그리고 내공을 이용해 물을 밀어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앗.
“으헛!!!”
순식간에 호수 중앙으로 미끌어지듯 나아가는 배.
순간 휘청인 기사의 비명이 조용한 호수에 울려 퍼졌다.
***
“으윽……. 젠장!”
멀린이 헛구역질을 하며 침이 묻은 입술을 닦았다.
장거리 이동 마법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며칠이 지났는데 마나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요동쳤다.
과거에 쓰던 힘을 억지로 짜내 어렵게 완성한 이동 마법진.
최후의 비상 수단이다.
남아 있는 엑스칼리버의 마력을 모두 동원해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도망을 치기 위해서는 조금도 아끼지 말아야 했다.
“마력석을 갈아 끼워야 하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멀린은 빛이 죽어버린 엑스칼리버를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다니엘을 상대할 때도 아끼느라 허리에 고이 차고만 있었다.
기사단에서 착복한 마법검의 마력석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부족했다.
엑스칼리버는 당대 최고의 드워프 대장장이와 마탑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걸작이다.
마력석 품질도 최상급이다.
문제는 차원 이동과 여러 번의 대형 마법 사용으로 마력석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
“흐흐. 그래도 이곳은 안전하다.”
멀린이 주변 공간을 둘러봤다.
지구에 넘어온 후 어느 시점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안전지대.
호수 지하에 있는 동굴에 위치했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었다.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됐다.
자연에서 마나를 흡수해 가동되는 마법진으로 보호되고 있는 공간.
충분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장소였다.
“멀리이이이이이인……!”
그때 소름 끼치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