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장. 나도 마법사
호수의 여왕이라 불리는 로몬드 호수.
영국에서 가장 넓은 호수답게 그 안에는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섬들이 존재했다.
호수에 밤이 찾아왔다.
낮과 달리 절대 침묵이 숨을 쉬었다.
과거 시대부터 수많은 역사와 신화를 품고 생생하게 유지되어 온 호수는 고요했다.
아아~♪ 아아아아~♬.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면서 사람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
깊은 한이 서린 듯 듣는 이가 있었다면 곧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의 주인과 동화됐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호수.
그 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의 수면.
라아아아아아~♫
노랫가락은 단순했다.
악기의 선율을 전혀 입히지 않은 인간의 성대만을 사용한 음율이었지만 그 자체로 노래가 됐다.
물의 요정이 노래를 부른다는 라인강의 로렐라이가 따로 없었다.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노래는 계속 울려 퍼졌다.
과거 이 노래를 두고 이곳에서 생업을 이어가던 어부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왔다.
비가 오는 깊은 밤이면 물의 요정이 슬픈 노래를 불렀다.
구슬픈 그 노래를 듣게 되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공포도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물의 요정이나 노래의 실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과거 한때 용감한 기사들이나 탐험가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들 누구도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
호수 근처에 서식하고 있는 동물들도 숨을 죽였다.
미지의 두려움에 초목을 비롯한 모두가 벌벌 떨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천년 넘는 시간 동안 이곳을 다스려왔던 여왕이 깨어나고 있었다.
보글보글보글.
호수 중앙에서 갑자기 물방울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사라라랏.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검은빛이 도는 긴 갈색의 풍성한 머리칼이 물결을 헤치며 나타났다.
분명 물속에서 떠오르고 있었지만 물기에 전혀 젖은 흔적이 없는 머리칼.
그 뒤를 이어 부드럽게 여인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한 푸른빛이 도는 몸에 밀착된 원피스 형태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어서 오너라……. 내 긴 시간 동안 너를 위해 버텨왔노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향해 말을 하는 여인.
말할 때마다 새파란 냉기가 입김처럼 피었다.
“타락한 마법사여……. 이번에야말로 너에게 긴 안식을 선물하겠노라!”
타락한 마법사를 저주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 여인.
그녀의 차가운 안광이 캄캄한 하늘의 시린 별처럼 반짝였다.
***
“크크크. 누군가 했더니 쥐새끼 두 마리가 납시었군.”
아르노 발루아 백작의 탈을 쓴 멀린이 사악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공에 둥둥 뜬 상태.
손에 검을 들고 비웃음을 띤 채 차가운 시선으로 가브리엘과 다니엘을 바라봤다.
‘저자는 누구인가!’
가브리엘은 단박에 눈앞의 사내가 백작이 아님을 알아챘다.
과거 백작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최근에 교황청 보물 창고 개방 때도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그때의 기운과 달랐다.
강직하고 대쪽 같았던 백작의 눈동자가 사악한 기운으로 번들거렸다.
결정적으로 백작은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가벼운 소재의 쇠사슬 갑옷을 입고 있다.
마법처리가 된 듯 유려한 광택이 뿜어져 나왔다.
다니엘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가 확실했다.
“넌 누구냐!!!”
가브리엘이 호통치듯 소리쳤다.
흑마법사는 아닌 듯했지만 몸에서 풍겨오는 기운이 탁하고 어두웠다.
기필코 신을 섬기는 아르노 발루아 백작은 절대 아니었다.
“날 아나?”
멀린이 되물었다.
백작의 기억을 대부분 흡수했지만 상대에 대한 정보는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사악한 자여! 네 정체를 드러내라!”
가브리엘이 가슴에 달고 있던 십자가를 들고 멀린을 가리켰다.
파아앗.
성령의 힘이 가미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뻗어 나가 멀린의 몸에 부딪쳤다.
“…….”
하지만 성령의 빛에 맞아도 백작의 모습을 한 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성기사? 네놈은 백색 기사단의 기사겠군.”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해!’
가브리엘은 확신이 섰다.
아사신의 추종자는 아닌 듯하고 백작의 몸을 다른 자가 차지한 것으로 판단됐다.
백색 기사단 일을 처리하며 가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인간의 몸을 빼앗아 쓰는 악령들이 아직 세상에 존재했다.
과거에는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던 구마사제들이 20년 전부터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활동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구마사제협회는 비밀조직처럼 비공개로 운영된다.
악령의 세력이 인간보다 더 영적인 능력은 뛰어났다.
활동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악령의 힘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제약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악령에 맞서는 구마사제는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 최대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백의 기사단원들 모두가 구마사제인 셈이다.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들인 만큼 구마 능력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특정하기 어려웠다.
성령의 빛을 맞고도 반응이 없다.
그건 악령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의구심에 빠진 가브리엘.
“정신계 마법 실력도 탁월하군. 영혼을 강탈할 정도라니.”
옆에 있던 다니엘의 입에서 마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정신계 마법? 말도 안 돼. 어떻게 마법으로 영혼을 강탈할 수 있단 말인가!’
가브리엘은 덮어놓고 다니엘의 말을 불신했다.
영혼의 세계는 오직 신의 영역이다.
악신들의 조력 없이는 영혼을 강탈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정신계 마법을 알아? 흐흐흐. 넌 누구냐? 애송이는 아닌 것 같은데.”
멀린이 다니엘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좋은 말 할 때 백작을 돌려놔.”
다니엘이 경고했다.
“무슨 소리야. 난 아르노 발루아 백작이다! 감히 내 성에 들어와 행패라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백작의 탈을 쓴 멀린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백작과 일치했다.
“여기저기 잡다하게 펼쳐 놓은 마법진 꼴을 보아하니 7서클 마법사?”
다니엘이 사실을 확인하듯 대놓고 물었다.
“!!!”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 멀린.
“너, 넌 누구냐!”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구에서 자신의 수준을 이렇게 단박에 파악할 만한 자는 없었다.
살던 곳에서도 7서클 마법진을 한눈에 알아챌 만한 존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피식.
다니엘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딱 보면 몰라?”
다니엘이 반문했다.
“???”
멀린은 영문을 모른 채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당당한 한마디가 다니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마법사잖아.”
“마, 마법사!!!”
***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황한 멀린의 표정이 웃기다.
자신의 수준을 단박에 파악해 낸 나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지구에서 마법사라면 신비의 존재로 여겨지지만 이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특기가 마법사 정신교육이다.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고 늘 기득권으로 군림하는 마법사들.
대부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상대가 누구든 반말이 기본이다.
황제가 된 아린을 제외하고 만나본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다 그랬다.
그건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이 된 솔로몬 대왕도 허접한 마법으로 날 뜯어 먹었다.
그때.
- 감춰진 카르마 역사와 조우했습니다.
감춰진 카르마 역사?
생소한 알림음이 들렸다.
더구나 머리칼이 쭈뼛 섰다.
뭔지 몰라도 멀린과의 만남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 이계 신들과 거대 존재들이 본격적으로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
상황 복잡해지는 거 질색인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지금까지 이계 신들은 방관자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지금부터 날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경고가 날아들었다.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흐흐흐. 마법사? 생김새를 보아하니 동양인 같은데 어디서 헛소리냐!”
이 자식 인종차별한다!
자신도 이계 출신인 것 같은데 쓰고 있는 탈이 백인이라고 동양인을 무시한다.
“경고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멀린이 백작을 어떻게 접수했는지는 몰라도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말보다 주먹.
“건방진 애송이 같은 놈. 마법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스윽.
멀린이 들고 있던 검을 치켜들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검이다.
그냥저냥 쓸 만한 물건으로 내가 비싼 값에 성전 기사단에 팔았던 그 마법검이다.
내가 직접 제작한 검을 들고 설치는 멀린.
“푸푸훗.”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노오오옴!!!”
멀린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소리를 질렀다.
파바바밧.
놈의 손에 들린 마법검에서 마나가 활성화됐다.
쓸 만한 마법 지팡이를 구하지 못한 듯 마력석이 박힌 검을 대신 사용하고 있는 눈치다.
“파이어 볼!!!”
멀린이 화염계 마법을 펼쳤다.
화르르르르르.
머리 위 상공 20미터에 생성되는 큼지막한 붉은 화염구.
“헛!!!”
가브리엘이 크게 놀랐다.
이런 마법 화염구는 태어나 처음 보는 듯했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그대로 전달됐다.
마법사가 선빵을 준비했다.
“겨우 이게 다야?”
멀린을 자극했다.
“죽어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멀린이 큰소리로 외쳤다.
쇄애애애애애앳.
빠르게 날아오는 마법 화염구.
“피하십시오!”
가브리엘이 앞을 막았다.
촤라라랏.
로브 왼손에서 접이식 방패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은빛으로 빛나는 마법 방패.
보기에만 그럴싸했다.
파이어 볼에 맞으면 그대로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파이어 볼을 가리켰다.
“파이어 미사일.”
불은 불로 막아야 제맛.
산뜻한 마법 영창과 함께 생성된 화염구 미사일.
어른 팔뚝만 한 화염 미사일 하나가 나타나자마자 공간을 갈랐다.
팟!
눈 깜짝할 사이에 화염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퍼어어어어어어엉!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후두두두두둑.
동시에 날아오던 화염구가 산산이 부서지며 수십 개의 불똥이 되어 흩어졌다.
“!!!”
당황한 멀린의 눈동자가 더욱 커지는 게 보였다.
“너, 넌 누구냐!”
멀린이 또 나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치매야? 나도 마법사라고!”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