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8장. 이단 심판관
“대단한 마법무구야ⵈⵈ. 지구에 이걸 만들 수 있는 마법 장인이 있다니. 믿기지 않아.”
파아앗.
마나를 집어넣자 곧바로 붉은빛이 터졌다.
화르르르르르르.
동시에 일어나는 강력한 화염의 불길.
일시에 일어난 불길에 지하 수련실이 환하게 밝혀졌다.
“오! 최소 5서클!”
휘리리릭 휘릭.
가볍게 화염계 마법이 걸려 있는 검을 휘두르는 남자.
성전 기사단의 단장 아르노 발루아 백작의 눈동자는 욕망에 진하게 젖어 희번덕거렸다.
“마력석도 싱싱해!”
특별히 마법이 각인된 마법무구는 제작하기가 무척 힘들다.
마탑에서도 마력무구를 제작하는 장인들은 따로 중요하게 취급됐다.
지구에 오기 전 멀린도 마법무구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
“검날도 예사롭지 않아. 마법과 무기 제작에 이렇게 탁월하다니ⵈⵈ.”
아르노 백작은 기사단 비밀 창고에 저장 중인 마법무구들을 천천히 살폈다.
최근에 구입했다는 마법무구 20여 점.
최하 4서클부터 시작해 5서클 마법들이 각인된 최상품들이다.
“드워프 솜씨 같기도 한데.”
칼날도 매우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마나만 다룰 줄 안다면 누구에게나 엄청난 도움이 될 무기들이다.
“다니엘이라고 했지ⵈⵈ.”
이 무구들도 오늘에서야 발견했다.
아들 녀석이 철저하게 감춰 놓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며느리의 방에서 이 검을 발견했다.
내친김에 기사들을 추궁해 출처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다니엘 장.
놀라운 사실은 아사신과의 전투에서 그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녀석도 나와 같은 이계 출신이란 말인가?”
의문이 들었다.
아사신을 지배하는 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당시 대형 마법진의 폭풍에 휘말려 마법사들 몇 명이 이곳으로 차원 이동했다.
대부분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그건 멀린도 마찬가지.
멀린은 브리튼 소왕국의 국왕인 아서 왕의 부친에게 붙잡혔다.
상처를 입은 상태로 마나를 쥐어짜 마법을 펼쳤다.
다짜고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서 왕의 부친과 병사들.
고서클 마법사임에도 멀린이 밀렸다.
당시에는 상처가 너무 깊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려 들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무척 용감했다.
평소 같았다면 어림도 없는 대적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멀린도 피투성이가 됐다.
당시 분위기상 사악한 마녀 후계자로 몰려 화형당할 처지에 처한 그를 왕이 구해줬다.
아서 왕의 아버지는 무척 똑똑했다.
금방 멀린이 대단한 마법사라는 걸 알아챘다.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바탕 지식을 갖고 있었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서약을 맺었다.
왕은 자신의 피붙이를 왕으로 세워 달라 부탁했다.
멀린은 마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왕은 생각보다 욕심이 많았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아름답고 현명한 왕비까지 짝으로 맺어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멀린의 검 엑스칼리버는 덤으로 요구됐다.
그때만 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왕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멀린.
맹약을 지키기 위해 아서를 왕으로 만들었다.
선왕이 죽고 평민 가정에서 살아가던 아서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쇼를 만들었다.
마법검 엑스칼리버를 바람잡이 소품으로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제작된 세트장에서 아서는 엑스칼리버를 뽑았다.
물론 그 전에 그럴싸한 이야기는 이미 다 퍼뜨려 놓은 상태였다.
아내를 통해 아서를 몇 번이나 구해줬다.
당시 망해가던 한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를 왕비로 세웠다.
그러나 멀린은 본래부터 심성이 비뚤어져 있던 인간.
계약의 미묘한 빈틈을 노려 선대 왕과의 밀약에 후춧가루를 뿌렸다.
왕비와 잘생긴 기사가 옳지 못한 관계를 맺도록 만들었다.
사실 아서는 왕이 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자가 아니었다.
멀린의 바람잡이가 없었다면 그냥 시골 농부의 자식으로 일생을 살아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 왕비와 부적절한 관계에 휩싸인 기사는 잘생기고 실력도 뛰어났다.
제대로 기사훈련을 받아 당시 모든 귀족가의 여식들이 한 번만 봐도 사랑에 빠질 정도였다.
멀린은 기사가 왕비의 목숨을 구하도록 상황을 연출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한 왕국의 비련의 공주인 여인과 잘생긴 기사의 운명적 조우인 셈이었다.
당연히 왕비는 아서에게서 돌아섰다.
아서의 성정은 우유부단했다.
그런 만큼 선대 왕의 신임을 얻었던 멀린에게 많이 의존했다.
그즈음 아서가 선왕의 핏줄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아서 왕은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어여쁜 왕비와 충성스런 기사가 부적절한 추문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잃은 듯 절망에 빠진 아서 왕.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성배를 찾겠다며 왕국을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멀린의 사악한 계략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렇게 몰락의 길로 들어선 아서의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하고 충성스런 원탁의 기사들도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하거나 자취를 감췄다.
결국 멀린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서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하게 마나를 사용한 탓에 중병을 얻고 말았다.
마나 계약의 빈틈을 노리고 계략을 꾸몄지만 결국 약속 위반의 형벌이 내려졌다.
마나의 맹세는 결국 양심의 문제였다.
부랴부랴 자신의 마법 물품들을 감춰놓고 깊은 수면에 들어갔다.
엑스칼리버와 동화된 채 새로운 숙주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얻게 된 아르노 발루아 백작의 몸뚱이.
“놈을 포섭해야 돼! 반드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번만큼은 멀린도 자신 있었다.
기사단장의 몸을 이용해 마나를 계속 흡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거 능력에는 못 미치지만 조금만 더 수련하면 대적할 만한 적이 없을 터였다.
지구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지구로 이동할 때 함께 가져온 마법 물품들의 양이 엄청났다.
당시 마탑주들이 사용하던 것들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죽을 때 따로 챙겨 놓았던 마법무구들과 물품들.
다니엘이라는 자의 수준이 제법인 듯하지만 멀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놈이 태어나고 열 살만 되면ⵈⵈ. 흐흐흐흐흐.”
가장 기대되는 일은 이 집안의 후손인 사내아이의 탄생.
틈이 생길 때마다 규칙적으로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고위급만 실행할 수 있는 마나 샤워.
멀린은 탄탄한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차원 이동은 기대하지 않았고 꿈도 꾸지 않았다.
고서클 마법사들이 흔하게 널려 있는 고향보다 이곳이 더 매력적이었다.
과학을 맹신하는 이계인 지구.
마법사 멀린이 마음껏 요리해 먹기에 딱 제격이었다.
***
얘는 뭐야?
허락도 없이 내 비행기에 탔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나 볼 법한 수도사 복장이다.
로브에 가려졌지만 몸은 무척 가벼워 보였다.
대신 싸늘하게 뿜어져 나오는 예기.
뒤집어쓴 모자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그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성기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뭐죠?”
등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자가용 비행기를 예정에 없는 비밀 격납고로 빼돌릴 정도라면 프랑스 정부와도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엮여 있다는 의미다.
“살베 프라테르.”
무미건조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안녕 형제여’라는 라틴어다.
그렇다면 교황청과 관련 있는 자가 확실했다.
“살베 프라테르.”
그대로 따라 돌려줬다.
마음 한쪽에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올 걸 알고 대기 중이던 존재.
교황청에서 파견한 게 확실했다.
“발음이 좋으십니다.”
곧 이탈리어가 들렸다.
날 테스트하려는 모양이다.
“신의 언어인 라틴어에 흥미가 많습니다.”
나는 라틴어로 답했다.
피식 그가 웃는다.
날카로운 턱선과 음색이 잘 어울렸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 정도로 짐작된다.
이곳에 오기 직전 면도를 한 듯 턱선이 깔끔했다.
이탈리아의 남자 모델처럼 보이기도 했다.
“갑작스런 방문을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불순한 자는 아니다.
풍기는 기운 자체가 선하다.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나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환대라 생각하겠습니다.”
쪼잔하게 인상 쓰고 침입자 취급하며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강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한껏 부렸다.
어디 가서 힘 좀 쓰게 생겼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주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까지는 모르겠고 여러 민족 조상신들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다.
“다시 묻겠습니다. 절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까?”
정중하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방법을 택해 나를 찾아왔다.
평범한 방문일 리 없다.
“동행하고자 합니다.”
“동행요?”
정체도 파악되지 않은 자가 동행을 요구했다.
“내가 프랑스에 온 이유를 압니까?”
“네.”
간단하게 대답하는 성기사.
“그래요?”
의구심을 내비쳤다.
“아르노 발루아 백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정보 하나를 오픈했다.
지켜보는 방향이 같은 것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내가 아르노 발루아 백작을 찾아갈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다.
고작 비비와 클라라가 전부다.
“도청하고 있었습니다.”
“아! 도청!”
내 스마트폰이야 특수 암호화 처리돼 있지만 비비와 클라라 쪽은 상황이 그렇지 않다.
기분이 몹시 찝찝했다.
“사생활 영역이 아닌가요?”
“성전 기사단은 비공식 공인들입니다.”
답변이 아주 청산유수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때.
“ⵈⵈ가브리엘이라고 합니다.”
세례명으로 대답하는 가브리엘.
이름에서 확 느낌이 왔다.
하느님의 수호자.
“백색기사단원입니까?”
“!!!”
가브리엘이 크게 놀랐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로마 교황청을 수호하는 소수의 기사들.
성전 기사들보다 수준이 훨씬 높다고 들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세상에 진짜 비밀은 드뭅니다.”
“우리 기사단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아는 이들도 드뭅니다.”
파밧.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적당히 간을 보는 중이다.
본격적으로 동행의 이유를 확인해야 할 순간이다.
“찾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교황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알려진 존재들이 바로 백색기사단원들이다.
교황청을 수호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피를 보는 이들이다.
성전 기사단과 결이 비슷했지만 분명 달랐다.
실력도 마찬가지다.
가브리엘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고수다.
“감시, 확인, 그리고 척결입니다.”
가브리엘의 입에서 척결이라는 단어가 섬뜩하게 흘러나왔다.
“누구를 말입니까?”
비비와 클라라가 대상일 수도 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졌다.
중요한 순간.
“난 이단 심판관입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