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장. 나 좀 도와줘!!!(5)
“아무 문제 없다면서? 그런데 왜!!!”
랏데그룹 회장 집무실.
원래 이곳의 주인은 상왕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성동민 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임원들은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게 이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성동민 회장이 잘 알았다.
‘개새끼들!!!!’
더럽고 치졸한 놈들에게 발목이 잡혔다.
야심 차게 추진했던 중국 사업.
공식적으로 형을 누르고 제국의 진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적이 필요했다.
그즈음 중국 쪽 유통업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과 한국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는 유통사업은 무엇보다 자신 있었다.
내친김에 아버지를 설득했다.
15억 중국 인민들을 사로잡아 유통 제국을 완수하겠노라고 큰소리쳤다.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다 조용히 허락했던 아버지.
자신 있었던 만큼 기세 좋게 밀어붙였다.
운이 좋아 꽌시도 제대로 잡았다.
슈건핑의 태자당과 줄이 닿은 건 큰 행운이었다.
슈건핑을 보좌하는 비밀 조직과도 만남을 가졌다.
그들을 통해 안전에 관해서도 확약받았다.
당시만 해도 청와대와 중국은 사이가 좋았다.
조근영 대통령을 슈 주석이 직접 열병식에 초청해 환대하기도 했다.
그런 전반적인 분위기를 믿고 투자를 했건만…….
“중국 쪽에서는 뭐라고 그래?”
“그게…… 전혀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뭐라고?”
“전적으로 한국 정부 책임이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빠가야로!!!”
회장실에서 일본 말로 욕이 터졌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회의를 주재했지만 이렇게 화가 날 때면 일본어가 익숙한 성동민 회장의 입에서는 서슴없이 일본 말로 된 욕설이 튀어나왔다.
“청와대 쪽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드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외교부와 국방부도 기다리라는 원론적 답변만 전해왔습니다.”
‘장관진! 이 개자식! 나한테 안심하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전직 국방부 장관도 신뢰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듬직한 장성출신 군인이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은 정치인만도 못했다.
미국 측의 끄나풀이 돼 버렸다.
자신들이 그동안 처받은 뒷돈이 문제 될 걸 알고 미리 미국에 줄을 댔다.
놈들이 몇 년 동안 처먹은 국방 비리에 관련된 자금이 수조가 넘었다.
관행이라는 명분하에 각자의 호주머니를 챙겨온 전직 장성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다 멍청한 조근영 때문이야!’
이번에 조근영이 공격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근영과 주순자에게 들어간 뒷돈만 해도 적지 않았다.
오정보다 더 쏟아부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찰과 외화가 주로 전해졌다.
랏데그룹의 숙원 사업인 100층 건물도 현 여당과 손을 잡고 추진했다.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흘러가나 싶더니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문제는.
‘형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피붙이들이 아버지의 후견인을 선정해 달라는 재판을 걸었다.
치매가 확실한 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그만큼 권력 유지가 위태로웠다.
특히 지분이 많지 않아 더욱 불안했다.
한국 랏데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 지주사.
그들이 두 형제 사이에서 저울질하기 바빴다.
아버지의 최측근들이 지주사를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입지가 약해졌다.
일본에서 주로 생활하는 형이 그들과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매일같이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명예 회장이 사망하기라도 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한국 연기금이 들고 있는 주식도 만만치 않다.
그것 때문에 지금 발목 잡힌 꼴이다.
두 왕자의 난에 개입할 의사를 넌지시 비쳤던 연기금.
눈물을 머금고 랏데그룹 소유의 골프장을 내주고 겨우 급한 불을 껐다.
성동민도 그 정도 세상 돌아가는 판을 눈치 못 채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룹 기획실에서는 리스크가 크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만 참아 달라는 정치권의 부탁과 이후 지원에 대한 약조를 받았다.
그러나 믿은 게 잘못이었다.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 끼어버린 작은 물고기 신세인 한국과 보리새우만 한 랏데가 복잡하게 뒤엉켜 버린 꼴이다.
큰 파도에 보리새우 정도에 지나지 않는 랏데로서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버지…….’
성동민은 문뜩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을 듣고 사업 추진을 승낙하며 바라보던 복잡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당신은 알고 계셨겠지요…….’
이제야 그 눈빛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만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갈수록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아버지.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대책은?”
“…….”
임직원들이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해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다.
랏데는 한국과 일본에서나 그룹이지 미국과 중국 입장에서 보면 구멍가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저…… 회장님.”
그때 그룹에 오래 몸담아 왔던 전무가 입을 열었다.
올가을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아버지의 심복이다.
“뭔가요?”
심드렁한 말투로 묻는 성동민.
회장인 그도 답을 찾지 못하는데 나이 먹은 전무가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믿어보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전임 회장님이 대책을 세워놓으셨을 겁니다.”
“뭐라고요?”
성동민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까지 그랬습니다. 회장님이 승낙한 그룹의 모든 사업들은 언제나 뒤에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나이든 전무.
‘그래……. 아버지라면 혹시!’
성동민도 전무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 전 문안 당시 아버지가 스쳐 지나가듯 분명 말했다.
‘제국을 구원할 흑기사가 준비되어 있다.’
***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김현재 전 대표.
집중치료실에서 1인실로 옮겨졌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력에 의료진들 모두 기절할 지경이다.
그리고 알 만한 정치인들이 속속 찾아왔다.
깨어나기 전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이들이 양말까지 벗고 달려왔다.
그렇다고 병실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경호원들이 병실 앞을 막았다.
철저하게 신분을 확인하고도 안에서 김현재 대표가 허락해야만 병실 출입이 가능했다.
뒤늦게 합류한 남자는 겨우 잠깐의 만남이 허락되었다.
‘얼굴색이 더 좋아졌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김현재는 여전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안색이 무척 좋았다.
욕을 퍼붓고 있는 마음과 달리 표정을 환하게 유지하며 김현재를 상대했다.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이 정도 심정을 감추는 건 비법도 아니다.
기름장어처럼 매순간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살아왔다.
야당에 몸담고 있지만 여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아내 덕분에 심심치 않게 기득권층과도 은밀한 술자리를 가졌다.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는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있었다.
그의 이런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러다 보니 야당 정당에서 항상 고위층에 자리잡았다.
“하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 봅니다. 우리 대표님 무사히 완쾌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드렸습니다! 하하하.”
남자가 서글서글한 눈빛을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행동이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어라? 말이 짧아졌네.’
다치기 전에는 항상 사람 좋게 자신을 대하던 김현재였다.
친구였던 대통령 대신 정치인들을 상대하던 청와대 살림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좀 변했다.
일반인은 눈치 못 챌 정도의 미묘한 변화였지만 남자는 금방 알아챘다.
‘밖에 못 보던 놈들도 수상하고.’
남자는 김현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게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에서 파견 나온 경호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보냈을 리도 만무했다.
병원 밖에는 주변을 서성이는 의무 경찰 몇 명이 전부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표님만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입 바른 아부를 자연스럽게 날렸다.
무엇으로나 김현재보다 나았지만 자신은 잠룡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아주 가끔 하마평에 오르지만 지지율은 2%를 넘지 못했다.
김현재가 깨어난 마당에 당분간은 지지율이 답보 상태를 보일 것이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조 의원님 같은 분이 나서야지요.”
김현재는 남자를 보며 담담하게 공을 돌렸다.
‘뭐지?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조 의원은 김현재의 말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사고 나기 전에 자신에게 한없이 살갑게 대하던 김현재가 아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이 확실했다.
‘설마 나라는걸?’
느껴지는 불길함에 상상력을 더하는 남자.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무감정한 경호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빨리 쾌차하십시오. 대표님밖에 이 조국을 구할 영웅은 없습니다!”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자는 김현재 앞에 고개를 숙였다.
미묘하게 바뀌어 버린 상황.
좀 더 몸을 사리고 정보를 더 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차분한 눈빛으로 남자를 대하는 김현재.
“그럼.”
조 의원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배드에서 물러났다.
갑자기 변해버린 김현재의 태도와 모습에 온갖 의구심이 몰려왔다.
“…….”
남자가 병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김현재.
별 감정 없는 눈빛으로 끝까지 바라봤다.
‘썩은 뿌리가 깊다…….’
자신의 목숨을 구명해 준 이가 말했다.
썩은 뿌리를 단박에 제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야당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온 조 의원을 보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썩은 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과거에는 맡을 수 없었던 이상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에서 느껴졌다.
**
- …….
말이 없다.
느낌이 쎄하다.
내 전화번호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처음부터 모두 차단됐다.
그리고 번호를 아는 이들은 생각보다 소수다.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국외번호다.
앞자리가 33이다.
프랑스에서 걸려온 의문의 전화.
한 여인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흠.”
짧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통화를 마친 비비는 아니다.
나에게 사적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