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7장. 전설!
“세, 센터장님! 여기 계십니까?”
‘지금 나 부른 거야?’
응급센터에서 제법 떨어진 정신치료센터 부속 화장실.
다른 과와 달리 정신과 화장실은 출입하는 환자들이 드물었다.
정신과 진료는 대부분이 예약제로 운영됐다.
다른 과에 비해 방문하는 환자들이 예민하다 보니 화장실도 깨끗하고 깔끔하게 관리됐다.
입원 환자들을 위한 화장실은 따로 마련돼 있었다.
정신과는 방송 스피커 소리도 최대한 낮게 유지됐다.
잠깐 쉬고 싶을 때 틈새 시간을 내면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장내 유익균이 부족한 응급센터장 유한동은 변비 환자다.
며칠에 한 번 신호가 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이곳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 데 집중하는 버릇이 있었다.
신경이 예민하다 보니 작은 소리에도 변을 보기 위한 집중력이 깨지면서 배출이 임박하던 변도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생긴 습관이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이었다.
곡은 평소에도 즐겨듣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밝고 잔잔하게 흐르는가 싶다가 어느 지점에서 격렬하게 후려치는 곡의 흐름.
그 순간에 맞춰 장에 정체돼 있던 변을 내려보내 완전 배출시키는 쾌감은 유한동이 가장 탐닉하는 쾌락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이 그 며칠에 한 번씩 오는 소식이 왔다.
그것도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
1000억짜리 물주가 응급센터를 지원한다는 소리를 듣고 장이 급격하게 긴장과 이완을 하면서 기별이 왔다.
다급하게 김국조에게 기부자를 맡겼다.
그리고 서둘러 찾아온 화장실.
깨끗한 곽티슈도 하나 챙겼다.
이번에는 무려 5일이란 기간을 넘기고 찾아온 귀한 소식이었다.
경건하게 변기에 앉아 영웅을 재생하고 손님 영접을 마쳤다.
클래식 선율에 맞춰 힘을 주었다 다시 이완을 반복하며 무아지경에 빠져 일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정체 기간이 길어 한 번씩 소식이 오면 만사 제쳐놓고 초집중해야 한다.
다행히 치질 같은 건 키우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고 풀코스로 들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기분이 무척 좋은 날이다.
더없이 편안한 상태로 상쾌하게 모든 의식을 끝낸 유한동.
깨끗한 화장지로 마무리를 한 뒤 길게 숨을 내쉬며 여운을 즐겼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손님을 보내는 마음은 언제나 경건했다.
그때 유한동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화장실 밖에서 들렸다.
“유한동 센터장님!!!”
‘장 비서?’
병원장 직속 수하인 장 비서의 목소리였다.
비서지만 그녀도 어엿한 의사였다.
한때 자신 밑에서 강의를 듣던 학생이기도 한 장 비서는 이래저래 유한동과 인연이 깊었다.
“나 여기 있어!”
화장실 밖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치며 물을 내렸다.
콰르르르르르.
오랜만에 영접한 손님을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냈다.
오늘따라 시원섭섭함이 진하게 밀려왔다.
그만큼 시원하게 볼일을 봐서인 것 같았다.
“센터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무슨 일?”
덜컥.
장 비서의 외침에 유한동은 급하게 바지를 추스르며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문을 벗어났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그녀.
병원장 비서답게 그가 애용하는 은밀한 장소를 기가 막히게 알아낸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셨습니까?”
“당연히…….”
유한동은 의아한 눈빛으로 말꼬리를 줄였다.
변비를 해결하느라 수십 분 이상을 흘려보낸 게 분명했다.
그사이 아무 일 없었던 응급실에 큰일이 벌어졌을 리 만무했다.
“유치원생들이 탄 통학 버스를 트럭이 추돌했습니다. 그래서 코드 제로가 발령됐습니다!”
“코……드 제로? 진짜?”
유한동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코드 제로가 발령났다면 엄청난 일이다.
그런 상황에 센터장이 자리를 비웠다.
어디 가서 변비 때문에 화장실에 있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가해 트럭 운전자가 음주운전으로…….”
“애들은? 얼마나 다친 거야!”
유한동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망 사고까지…….”
“뭐라고 사망 사고!”
타다다다닥.
유한동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센터장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병원장님이 센터에 가셨다고요!!!”
장 비서가 뒤따라 달리며 외쳤다.
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유한동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을 응급센터.
아무것도 모르고 클래식의 파도 속에 손님을 맞이하는 기쁨에 젖어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심장이 거칠게 뛰고 마음이 한없이 바빴다.
코드 제로였다면 숙련된 응급의가 필요했을 순간이다.
누구보다 김국조를 믿지만 그가 감당할 수준을 넘었을 것이다.
“센터장니이이임!”
변비를 해결하고 가벼워진 몸으로 바람처럼 달리는 유한동을 따라오지 못한 장 비서가 멀리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유한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이번 생은 응급센터에 영혼을 갈아넣자고 진작부터 마음먹었다.
매 순간이 고달프고 힘들어 누구도 지원하려 하지 않는 의료계의 천덕꾸러기.
그런 곳이 유한동에게는 아비규환의 전쟁터이자 안식의 천국이었다.
***
- 너를 믿는다……. 장자여!
묵직하게 울리는 장자라는 말.
이제는 확연히 말뜻을 깨달았다.
회귀에서 깨어났을 때 할배가 그랬다.
장자로서 민족의 부흥을 방해하고 비웃는 이웃집 개들을 작살나게 패주라고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코 두렵지 않았다.
한민족을 수호하는 조상신들이 항상 내 주변에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중국과 일본 조상신들이 보호하던 이웃집 사나운 개들이 부럽지 않았다.
- 인과의 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조상신들 중에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 신선이 말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봤던 할배는 아니었다.
그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천기누설이라는 것쯤은 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답했다.
- 저 아이는…… 또 다른 제물이다. 잘 보살펴주거라.
조상신의 시선이 누워 있는 김현재 대표를 향했다.
아이라 따뜻이 칭했지만 또 다른 제물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
김현재 대표의 관상을 보면 생명선이 그렇게 길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묵묵히 한 길을 걷는다는 게 쉬울 리 없다.
타고난 모든 생명의 기를 다 소진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심성의 대통령을 두고 어리석은 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욕을 퍼부었다.
수하에 둔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김현재 대통령에게 그 책임을 묻고 욕하며 손가락질하던 무지몽매한 인간들.
그들은 김현재 대통령에게 완전무결한 신의 모습을 요구했다.
부정한 자들에게는 따지지 못했던 이들이 선량한 이들에게는 그 책임을 더 잔인하게 물었다.
이기주의자들의 부동산 투기로 인한 박탈감에 대한 분노를 대통령에게 쏟아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가치 제로의 각종 코인이 폭락하는 것도 대통령 탓이었다.
정당한 노동 없이 일확천금을 노렸던 투기심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미래를 위한 투자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장사가 안돼도 대통령 탓으로 돌렸다.
상권과 음식의 질과 맛, 본인들의 능력과 노력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인과를 모두 무시한 채 원망만 쏟아냈다.
세계적 저금리로 인해 넘쳐나는 유동성 자금.
그것을 이용해 폭탄 돌리기에 능수능란한 건설업자와 부동산 투기꾼들이 만들어 놓은 파도에 휩쓸려 이익을 보고자 하는 또 다른 투기꾼들.
자신들만 손해를 보지 않으면 된다 생각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욕망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쓰나미가 머지않아 모든 것을 휩쓸어 갈 것이다.
그 끝이 보였다.
이웃 섬나라가 부동산으로 망하는 걸 똑똑히 봤음에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각종 권력으로 무장한 악마가 철저하게 설계해 판을 굴린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간헐적으로 던져 주는 뼈다귀 몇 개에 취해 함께 기류를 만들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흠결이 없는 이들을 놓고 갈수록 신랄하게 헐뜯었다.
주무형 전 대통령을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제물로 바쳤음에도 깨닫지 못했다.
나라 곡간을 축낸 쥐나 사이비에게 영혼을 판 공주에게는 더없이 관대했다.
바탕이 되는 현명함이나 지식 없이 기득권 친일파 언론이 쏟아내는 대로 따라 짖는 데만 급급했다.
자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업과에 휘말리고 있는지 몰랐다.
결국 무지도 죄가 된다.
결코 살아서는 알 수 없되 죽어서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
그 값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몰랐다.
2020년에 휘몰아친 IMF 시즌 2!
힘이 닿는 데까지 어느 정도 막아내겠지만 그 뒤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업과 인연들의 모습이 전혀 새로운 운명의 판을 만들어냈다.
무언지 모르지만 요즘 들어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졌다.
수시로 변하는 미래에 대한 건 여기 있는 조상신들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나에 대한 격려와 새로운 제물로 선택된 가련한 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습니다.”
- 그래……. 그게 장자의 의무다. 어리석은 동생들을 위해 부디 인내를 잃지 말고 자비심을 내거라. 죽어보면 다들 깨닫는 것을……. 쯧쯧.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상신이 혀를 찼다.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인내를 잃지 말고 자비심을 품으라 당부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따를 자신이 없다.
무지한 자들의 돌팔매질을 감당하며 버틸 인내와 자비가 나에게는 한없이 부족하다.
난 성자가 아니다.
한반도 조상신들에게는 모두가 다 후손이고 안타까운 자손이겠지만 엄밀히 말해 내 새끼는 아니지 않은가.
만사 세상을 불신하는 자들에게도 행운이 간다면 그게 더 웃긴 일이다.
불평불만을 일삼는 게 보통인 망할 놈은 결국 망해야 하는 법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귀한 것들의 가치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다.
현재 자신이 누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다.
- ……누구나 죽는다. 권세나 부귀가 영원할 거라 믿는 자들을 원망 말거라. 짧은 생에서나마 그 이치를 깨닫고 배워가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뿐이다.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사옵니다.”
이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 마음 가는 대로 행할 것이지만 하시는 말씀은 귀를 열고 경청했다.
- 그래 그거면 됐다. 항상 네 뒤에는 우리가 있다. 그걸 잊지 말 거라.
더없이 의지가 되고 따뜻한 조상신의 말씀이다.
“감사합니다!”
- ……금강산에서 회포를 푸는 그날까지 힘내거라. 이 겨레와 민족이 모두 웃을 수 있는 그 날을…… 우리에게 꼭 보여다오!
“이 후손…… 목숨을 다하겠나이다!”
파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터졌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신선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
한 분이 남아 있다.
맨 뒷줄에 서 있어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조상신.
주름 깊은 이마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박한 미소.
그가 인자한 모습으로 날 보고 있었다.
벌떡 벌떡!
심장이 뛰었다.
저분이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갈 때 온 대한민국이 슬픔에 젖었었다.
하늘도 눈물을 쏟으며 그를 품어 주었던 그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영원한 징표, 주무형 대통령!
그분이 한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웃고 있었다.
“각하…….”
- 힘들지?
“…….”
짧은 한마디에 응축되어 있는 진심 어린 관심의 말.
또다시 감정이 요동치며 울컥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 그래도 힘내게. 어둠이 깊어야 아침 해가 찬란한 법이야. 짧은 한 세상 멋지게 살다 오게. 죽어보니 후회가 많아. 좀 더 노력할걸. 좀 더 참을걸, 좀 더…… 베풀고 살걸…….
저분보다 어떻게 더 참고 노력하고 베풀며 살 수 있을까.
부끄러움에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내 친구 잘 부탁해. 마음이 여려서 걱정이야…….
죽어 신선이 되어서도 친구를 걱정하는 주무형 대통령.
누워 있는 김현재 대표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 깊은 우정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 기다리겠네. 금강산에 올 때 고향 막걸리 한 병 부탁해. 죽어서 다 부질없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야……. 사랑하는 가족과 내 친구, 내 고향이 더 그립고 사무친다네.
뼈 깊은 가르침이다.
그 한마디에 불끈 힘이 솟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내 가족과 친구, 고향, 민족을 위해 가야 할 험난한 길.
쉬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나가야 한다.
절대 두렵지 않다.
등 뒤에서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고 있는 조상신들의 가호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난…….
회귀자로서 전설이 될 것이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