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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8장. 물주(4) (1,163/1,284)

1188장. 물주(4)

“상태는?”

-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철 철인도 아니고 뇌수술까지 받았는데 바로 일어나겠습니까. 흐흐흐.

“이런…… 우리 김 대표님. 많이 아프셨겠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중년 남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차라리 누워 있는 것보다…….

“허어! 김 보좌관. 그런 말 하면 못써.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지금껏 헌신하신 분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드려야지.”

-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의원님.

“그래 입조심 해야지. 괜히 우리끼리 하는 말이라도 새어나가면 국민들이 오해할 수 있잖아.”

- 저만 믿으십시오. 절대 새어나갈 일 없습니다!

“당연히 나야 믿지. 김 보좌관 아니면 내가 누굴 믿겠나.”

- 언제나 충성!!!

“피의자는?”

- 과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과실이겠지. 누가 미쳤다고 뒤에서 냅다 들이받겠어. 얼굴도 모르는 양반을.”

- 맞습니다. 100% 과실이죠. 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터트리는 김 보좌관.

뭔가 알고 있는 말투였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더 이상 있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까 돌아와. 어차피 다들 포기한 것 같으니까 말이야.”

- 넵!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지.”

- 사랑합니다. 의원님!

“운전 조심하고.”

-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그래.”

띠릭.

통화가 끝났다.

“후후훗.”

통화하는 내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밖에 시선을 두었던 남자.

오십대 후반의 남자는 통화를 끝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공간은 시원하게 에어컨이 가동되어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감색 슈트에 황금 배지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2선 이상의 지역구 의원이다 보니 그중에서도 전망 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2016년 총선에서 의원들 대다수가 물갈이됐다.

재선만 돼도 국회의원실이 달라졌다.

전직 대도시 시장 출신이다 보니 플러스 점수가 추가됐다.

여론 조사에도 조금씩 차기 대권주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이 좋은 기회야……. 김현재 당신만 사라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모든 정치인들의 마지막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라의 왕이 되는 일.

5년짜리 임시직에 불과했지만 상관없었다.

대통령의 권한은 5년이란 짧은 시간이 아쉽지 않을 만큼 막강하다.

여당 의석까지 받쳐준다면 무소불위의 황제가 될 수도 있다.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검찰총장을 비롯해 다수 헌법 기관 수장들을 임명하게 된다.

기획재정부를 통해 수백조가 넘는 예산을 주무르는 자리.

정부 부처 산하에 꽂아넣을 수 있는 알짜 공기업 기관장 자리가 수백 개에 달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말을 듣지 않는 기업들을 골라 본보기로 날려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언론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양손에 검을 들고 춤을 추는 격이 된다.

비록 야당 출신이지만 알 만한 대형 언론사와도 친분이 좋다.

예부터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다.

우선 아내가 보수 언론사 기자 출신이다.

그만큼 고급 정보가 빠르게 전달됐다.

주순자를 손보기 위해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주무르는 큰 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았다.

돌아가는 판세가 그야말로 격정적이다.

주순자와 큰 손들이 맞붙었다.

한 번 기름에 불이 붙자 쉬이 꺼지지 않았다.

여론이 가세하면서 덩달아 확산됐다.

조근영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남자는 그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욕망이 더 불끈 치솟았다.

이렇게 되면 여당 쪽에서는 다음 대선에서 승기를 잡을 가망성이 줄어든다.

전현직 여당 대통령들의 해외 투자를 빌미로 한 비자금 세탁과 오월호 사건, 그리고 주순자의 국정농단까지 악재가 한두 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들은 차선으로 야당 쪽에 줄을 댈 것이다.

그만큼 여당 쪽에 인물이 없다.

예상대로 접촉이 있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흉계가 곳곳에서 빠르게 진행됐다.

은근히 전해오는 충성 표시에 고심하고 있던 남자.

과거부터 믿고 따르는 보좌관과 먼저 상의했다.

과거 남자를 대신해 감옥에 다녀왔을 만큼 충성심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렇게 계획된 테러가 결행됐다.

이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교통사고 유발자는 완벽한 설계에 의해 선택됐다.

이미 도박 빚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 자로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가족은 오래전 해체됐고 사채업자들의 협박에 오늘 내일 하던 자로 골랐다.

빈틈없이 몇 단계의 세탁을 거쳤다.

철저한 관리 속에 점조직 형태로 지시가 하달됐다.

그리고 완벽하게 계획이 실현되었고 기대했던 결과로 나타났다.

한 방에 대선주자 명단에서 지워진 김현재.

“너무 잘나도 문제야. 적당히 나섰어야지. 친구가 그렇게 가는 걸 봤으면서도 방심하다니……. 김현재 넌 그래서 안 돼. 똥물에 들어왔으면 적당히 몸을 담글 줄도 알아야지. 혼자 깨끗한 척하면 뭐하나……. 흐흐.”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타협의 대가였다.

적당히 뇌물도 받고 이권 사업에도 개입할 줄 알았다.

그래도 국민들은 낌새도 채지 못했다.

점잖고 매끄러운 말로 자기관리를 해 온 남자.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말발 하나는 제대로 타고 난 야당의 현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달랐다.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다스리는 세력들과도 친밀하게 연결돼 있는 남자.

그의 적당한 타협 능력을 높이 산 그들이 알아서 남자를 보호했다.

그만큼 겉과 속이 철저하게 다른 남자.

그의 이름은…….

***

저벅저벅.

뚜벅뚜벅.

병원장실에서 응급센터로 향하는 복도.

말소리 대신 구둣발 소리만 선명하게 울렸다.

평소 사교적이지 못했던 유한동 센터장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뒤에 따라오는 청년이 무섭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말발과 눈치로 병원장에 오른 오동수를 꼼작 못 하게 만들었다.

1000억대 기부자인 그가 갑이고 오동수가 을인 것은 맞았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을 넘었다.

완벽하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했다.

오동수는 주변으로 넓게 쳐놓은 그물 안에 걸려든 줄도 모르고 팔딱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건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렇게 함께 걷고 있자니 무척 긴장됐다.

‘설마 트집 잡을 건 아니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아웅대라는 학교 이름보다 훨씬 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응급센터.

그러나 꼼꼼하게 따져보면 완벽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응급센터에 인력이 충원되지 않아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전 직원이 누적된 피로에 초췌한 상태다.

매일 매 순간이 스펙터클하게 움직이는 응급실이다 보니 다들 예민하기도 했다.

자칫 작은 실수 하나가 바로 사망사고로 연결될 우려가 컸다.

응급환자를 뒤따라온 가족들을 상대하는 일도 벅찼다.

상황에 따라 처치가 뒤로 밀리면 개새끼 소새끼 찾아가며 병원장을 부르라고 난리 쳤다.

큰소리쳐야 먼저 봐준다는 말이 아직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응급실을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철저하게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여론 한 번 잘못 타면 병원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보통의 서비스직과 차원이 다른 일들이지만 사람들은 무조건 친절하기를 바랐다.

응급센터라는 특수성을 다들 간과했다.

지이이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응급센터에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멋쩍은 유한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부터는 자신이 관리자다.

“둘둘셋 가능합니까?”

“당연하죠.”

유한동은 둘둘셋을 찾는 장태산의 모습에 괜히 호감이 갔다.

응급실은 여전히 둘둘셋이 통용됐다.

쉴 틈도 없이 일할 때는 아메리카노보다 달달한 다방커피가 제격이다.

떨어진 당을 보충하는 데는 둘둘셋보다 좋은 비율이 없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센터장실로 장태산을 안내했다.

“드르렁……. 퓨우…….”

그 순간 들려오는 소음.

김국조가 낡은 2인용 소파에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환자 자료로 보이는 파일을 손에 꽉 쥐고 있다.

갑자기 밀려온 피로에 기절하듯 잠에 빠진 모습이다.

“이…… 사람이.”

유한동이 당황했다.

평소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이런 점에서 센터장과 김국조는 죽이 잘 맞았다.

야전에서 다져진 전우애와 같았다.

어차피 저녁에도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신세였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잠을 청해둬야만 했다.

언제 응급호출이 올지 아무도 몰랐다.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면 수술장에서 큰일이 난다.

외상 환자 수술은 대부분이 몇 시간씩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메스 한번 잘못 대면 난리나기 마련이다.

누적된 피로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거즈를 배에 넣고 꿰매는 의사들이 종종 생기는 경우가 이 때문이다.

“김 교수…….”

유한동이 김국조를 깨우려 그를 불렀다.

“놔두십시오.”

“그래도.”

“별일도 아닌 일로 깨우면 센터장님도 욕할 거 아닙니까.”

‘뭐야? 나이도 어린 녀석이 배려심도 깊네?’

돈벼락 맞은 졸부들은 대개 안하무인이 되기 쉽다.

장태산처럼 어린 투자자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돈의 가치만큼 자신이 존중받기를 원하고 세상 물정은 아직 모를 나이건만 그의 태도는 그런 졸부들과 전혀 달랐다.

부드럽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앉아요.”

센터장실이지만 공간은 협소했다.

컴퓨터 책상과 차트를 볼 수 있는 벽면, 양쪽으로 마주보는 2인용 소파, 간이침대가 한쪽에 세워져 있고 커피잔을 씻을 수 있는 작은 싱크대가 전부다.

단 한 벌뿐인 옷은 옷걸이에 걸려 있다.

경력 20년 차가 넘어가는 외과의사 집무실 같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장태산이 빈 소파에 앉았다.

딸깍.

유한동이 전기포트 버튼을 눌렀다.

툭툭.

종이컵에 커피와 크림 둘, 설탕 셋을 담았다.

“그런데 왜 응급센터를 콕 찍어 기부하시려는 겁니까?”

꾹꾹 눌러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응급센터가 전국구로 알려졌지만 다른 병원의 한 개 과와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 기부금이면 언론사들은 어디에 기부했는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찬양해 줄 것이다.

“투자입니다.”

장태산이 바로 대답했다.

“투자요? 응급센터에요?”

유한동은 어이가 없어 다시 한 번 물었다.

개인 병원도 아니고 이곳은 학교 법인에 속해있는 의료기관이다.

투자처로는 빵점인 곳이다.

사회 이익을 위한 비영리법인은 웬만해서는 투자금 회수가 불가능하다.

과거 재벌들이 정권 눈치와 명예를 위해 투자를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다.

공공병원조차도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기관장들이 폐업을 시키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이다.

폐업은 쉬워도 다시 열기는 어려운 게 공공종합병원이다.

대규모 국가적 응급 재난 상황에서는 공공의료기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점을 간과하는 모자란 선출직 기관장들.

치적을 쌓기 위해 과감하게 공공병원을 정리했다.

덩달아 좋다고 박수 치고 환영하는 깨이지 못한 국민들도 많다.

언제까지나 자신들은 돈을 벌 수 있고 건강하게 살 거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환영인 셈이다.

공공병원 상당수가 사회적 배려자에 대한 분배 시스템 중 하나다.

그들 스스로 닥쳐보지 않은 입장에서 배려자에 대한 분배라는 단일 면만 보고 무조건 아까워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지출되는 세금을 자신들의 고혈로 여기는 데서 오는 분노의 표현인 것이다.

의료계에서 종종 언급되는 세계적 바이러스 판데믹 같은 상황을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로 치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의 물주는 분명 투자라고 말했다.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유한동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발상이다.

“드십시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나이는 어리지만 대등한 관계 이상으로 대했다.

“감사합니다.”

겸손한 태도로 종이컵을 받아드는 장태산.

“큼큼.”

자고 있던 김국조가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선배 나도 커피……. 으으.”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미는 김국조.

장태산이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던 종이컵을 건넸다.

꿀꺽 꿀꺽.

손에 커피가 쥐어지자 눈도 뜨지 않고 벌컥거리며 마시는 김국조.

아직 뜨거울 텐데 목이 마른 듯 거침이 없다.

“오늘따라 더 맛있는데?”

천천히 눈을 뜨는 김국조.

“!!!”

자신 앞에 있는 장태산과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

김국조가 멀뚱멀뚱 물었다.

“김 교수. 그분 있잖아.”

유한동이 몇 번의 턱짓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 순간.

“아! 그 호구 물주!”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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