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장. 물주(3)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을 꾸미는 게야…….”
연대자동차 그룹 회장실.
전문구는 뜬금없는 장태산의 부탁에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김현재의 교통사고는 정치판에 예기치 못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연대그룹이 자체 경제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어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연구소에는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제에도 저명한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오정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연대도 비자금으로 정치인들과 언론, 법조계를 나름 관리해 왔다.
그 흐름 속에 무난하게 항해하고 있던 중 갑작스레 터진 김현재의 교통사고.
여러 정보를 통합해 내린 결과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특히 지금은 주순자 때문에 조근영 정권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바보 같은 것들이 눈앞의 이권과 자존심 때문에 내부에서 총질을 해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묵묵하게 참고 있는 민심이 언젠가 폭발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거라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더구나 레임덕 현상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공무원 사회가 복지부동으로 바뀌었다.
덩달아 야당 대권주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여당 쪽 인사들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전문구는 급하게 측근들과 비밀회의를 가졌다.
김현재의 교통사고 파장이 그룹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느라 골치가 아팠다.
그러던 중에 장태산의 전화를 받았다.
아웅대 종합병원과 연결해 달라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청탁이었다.
김현재와 연관 있음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그 이상의 시나리오를 그려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능력을 소유한 장태산이라지만 이 마당에 김현재는 누가 봐도 버리는 패가 맞았다.
“찝찝해.”
전문구는 개운하지 못한 기분에 인상을 썼다.
지금까지 장태산이 떨구어 주는 떡고물이 상당히 많았다.
장태산의 충고대로 그룹 사업 방향을 몇 개 틀기도 했다.
아직은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몇 년 후에는 크게 빛을 발할 것이다.
“설마…… 고칠 수 있는 건 아니지?”
김현재에게 알게 모르게 투자했던 자금과 인맥을 철수할까 고민하던 시점에 장태산이 개입했다.
이성은 다른 인사를 찾으라 말하고 있었지만 감성은 그 반대로 작용했다.
반드시 장태산과 행보를 같이 하라는 경고에 가까운 갈등이 지속됐다.
“만약 김현재가 무사하다면…….”
차기 대권주자 후보 중에서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김현재.
그 밑으로 깔려있는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야당 대선주자들은 아예 눈에 차지도 않았다.
또 여당은 윗물이 너무 썩어 볼 것도 없이 엉망이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이 시점에는 정권교체가 필요했다.
최병박 시절과 달리 뇌물 요구 방법이 아주 수준 이하다.
아예 같이 감옥에 갈 태도로 대놓고 돈을 요구했다.
그런 점에서 김현재는 무척 깔끔했다.
그는 따로 정치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주무형 대통령 임기 당시의 모습을 염두한 듯 매사 청렴하게 정치판을 풀어가려는 자세를 보였다.
언론을 비롯해 사방에 적이 깔려 있음을 꿰고 있었다.
특히 돈과 명예에 큰 욕심이 없는 인물이다.
가족과 측근 관리에 더없이 철저했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재인데…….”
선진국은 아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아니었다.
경제 성장 못지않게 문화와 국민들의 의식,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청렴은 물론 도덕적으로 성숙해져야 도달 가능한 영역이다.
스윽.
김현재의 이름에 몇 번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전문구.
“도깨비 같은 녀석이 하는 걸 더 지켜봐야겠어.”
고심 끝에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충분히 본인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부러 전문구에게 부탁했다.
그건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해석 가능했다.
말 그대로 눈치껏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
왜? 왜?
오동수와 유한동의 머릿속에 동시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1000억이라는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학교와 병원 재단의 1년 총이익금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TV에 가끔 보이는 수백억 기부자들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인사들이다.
죽기 전에 큰 깨달음을 얻고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논하기에 장태산은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그냥 던지는 농담도 아닌 것 같다.
“적나요?”
“아, 아닙니다! 그게 무슨!!!”
오동수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죠?”
“……엄청난 기부금에 감동이 가슴을 적셔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둥수는 진짜로 감동받은 상태였다.
‘됐다! 됐어!’
1000억 기부금이면 엄청난 업적이 된다.
아웅대 개교 이후 이런 규모의 금액 기부는 처음이다.
아웅대 법인 초대 이사장인 도운중 회장 이후로 이런 스케일의 기부자가 없었다.
‘아직 세상에 이런 물주가 남아 있다니……. 흐흐흐. 멍청한 놈!’
분명 투자가 아닌 기부다.
법인 비용처리를 위한 기부금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멍청하다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았다.
오동수라면 이런 기부와 함께 다른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조건을 내걸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사 명단에라도 넣어 달라고 말해야 했다.
기부금이야 나눠서 먹으면 그만이다.
법정 기부금들 상당수는 특정 목적 기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사장을 비롯해 병원 고위직들의 보너스로 가져가도 솔직히 할 말이 없다.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
장태산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느슨해졌던 오동수가 바짝 긴장했다.
‘전 회장님이 말한 물주가 확실한데……. 얘는 정체가 뭐야?’
유한동은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장태산을 바라봤다.
속물인 오동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태산의 태도가 재밌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유한동의 눈에는 그들의 밀당이 훤히 보였다.
장태산이 지금 오동수를 희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조건인지…….”
오동수가 바짝 긴장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구인 줄 착각했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는 눈치다.
장태산의 몸짓 하나하나에 눈치를 심하게 봤다.
1000억이라는 숫자가 그의 뇌리에 박혀 오동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 보이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저자세를 취했다.
“응급센터에 한정되었으면 합니다.”
“네?”
“아!!!”
오동수와 유한동 두 사람이 한꺼번에 놀랐다.
장태산이 제시한 기부금이 목적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대번에 오동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필 응급센터야!!!’
심장외과나 어린이 암센터도 있는데 응급센터를 언급했다.
그것도 콕 찍어 강하게 응급센터를 말하는 물주.
‘1000억을 우리에게? 와우!’
반면 유한동의 머릿속에는 정확하게 1000억이라는 숫자가 박혀 들었다.
의료선진국에서 개발한 최신형 의료 기구들을 넉넉하게 설치할 수 있는 금액이다.
거기에 더해 부족한 인력들을 충원하고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꿈 같은 바람일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응급센터를 싫어하는 오동수가 그렇게 되도록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안 됩니까?”
장태산이 진중하게 물었다.
“장 대표님, 법정기부금에 속하는 사립학교에 설치된 병원기부금은 대부분 병원 재단에서 알아서 처리합니다. 의료법에 따른 의료법인에 대해 지정기부금 제도가 존재하지만 아웅대는 사립학교에 존속하는 병원입니다. 특정 과를 지목하여 기부하는 것은 법률과 재단 정관상 결코 허락되지 않는…….”
오동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서 물주의 기분이 상하면 바로 1000억이 날아간다.
기부금 액수를 듣지 않았다면 이렇게 저자세까지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안 됩니까?”
다른 말 없이 다시 한 번 똑같이 묻는 장태산.
“……네.”
오동수는 처량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쉽네요.”
장태산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영락없이 기부를 철회할 것 같은 분위기다.
‘안 돼!’
오동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물론 기부금 중 상당수를 응급센터로 돌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단 기부금을 받고 난 뒤 없던 일처럼 입을 씻으면 그만이다.
“약속할 수 있습니까?”
“네?”
“병원장님 선에서 80% 이상 응급센터로 기부금 활용이 보장된다는 각서를 작성해 준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
‘이 새끼 뭐야? 각서?’
오동수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병원장이라지만 한낱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여러 이유를 들어 해임시키면 그날로 그만이다.
그런데 병원장 이름으로 각서를 작성하면 그 여파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병원에서도 책임져야 한다.
이제야 왜 그렇게 장태산이 재계에서 악명 높은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구 물주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대형 투자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한국대 법학과 출신입니다. 아는 선배분들이 대형 로펌 이사로 다수 포진되어 있습니다.”
장태산이 쐐기를 박았다.
누가 봐도 협박이다.
한국대 법대라는 말에 오동수의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병원장이었기에 법률적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수술 한 번 잘못하면 의사들 목 날아가는 것쯤 일도 아니다.
‘썅! 이거 완전 계륵이잖아!’
1000억도 중요했지만 목숨줄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오동수는 내적으로 갈등했다.
“총장님이 기대가 크시더군요. 이사회에 바로 보고한다고 하시던데…….”
“!!!”
장태산이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었다.
툭 던지듯 말했지만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초, 총장님을 아십니까?”
“제가 도운중 회장님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도운중 회장님요!!!”
아웅대는 도운중 회장의 작품이다.
학교 재단 법인 이사들 중 상당수가 도운중 회장의 수족이다.
대웅그룹이 공중분해 될 때도 아웅대는 무사했다.
출연된 재산이었기에 정부에서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아웅대는 도운중 회장의 손에 의해 굴러갔다.
‘빌어먹을!’
왜 총장이 그렇게 다급하게 연락을 해왔는지 이제 알았다.
모든 게 장태산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이었다.
자신에게 선택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서 기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눈치로 살아온 오동수가 상황이 이쯤 돼서도 모를 리 없었다.
1000억 기부금으로 돈 잔치를 하려던 계획이 제대로 틀어졌다.
도운중 회장이 뒤에 있다면 더더욱 모든 게 끝이다.
상대는 호구 물주가 아니라 슈퍼갑이 됐다.
여기서 잘못 보이면 바로 아웃.
“재단에도 기부할 생각입니다. 도운중 회장님이 한국 인재 육성과 의료계를 위해 투자한 법인인데 가만있을 수만은 없군요.”
장태산은 오동수를 제대로 가지고 놀았다.
이번에는 투자금 액수를 밝히지 않을 게 분실했다.
재단 이사들은 덮어놓고 쌍수 들어 환영할 것이다.
돈 싫어하는 이사들은 없었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동수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찍히면 퇴출이다.
고개 각도가 15도쯤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큽.”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한동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응급센터를 비롯해 병원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오동수의 굴욕적인 모습이 쾌감을 안겨줬다.
질끈.
오동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유 센터장, 안 바빠요?”
“???”
“응급센터가 한가한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가봐요.”
불똥이 옆으로 튀었다.
오동수가 쌀쌀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나를 왜 부른 거야?’
마음 한켠으로 유한동은 어이가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병원장의 부름이라 시간을 쪼개 올라왔다.
물론 물주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한동도 처음부터 이런 자리는 불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같이 가시죠.”
“???”
“제가 기부할 곳인데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유한동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태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한동은 정체 모를 장태산의 행동에 멀뚱멀뚱 눈만 껌벅거렸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