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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6장. 물주(2)

“양 의원, 김현재 전 대표 상태는 어때요?”

“중환자실에 계셔서 직접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까이 있었으니까 알 거 아니오?”

“그게…….”

“솔직히 말해 봐요. 회복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

양우석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3선 이상의 중진들이 모인 당 중진 회의실.

선배 국회의원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4선의 장준표.

야당에서 당선됐지만 특이하게 부장검사 출신의 인물이다.

당론으로 정한 투표 이외에는 매사 여당 쪽 편을 많이 들었다.

당원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의원들 중 대표적인 한 명이다.

한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검사 출신 인사가 야당 의원으로 활동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내놓는 법안도 상당수가 기업과 부자, 그리고 특정 종교단체를 대변하는 것들뿐이다.

대학생 때나 검사 시절에도 특별히 민주화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적이 없다.

재산도 수십억대가 넘는다.

어쩌다 야당 색이 강한 수도권 지역구를 차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장 의원. 양 의원이 힘들어하잖아.”

다른 4선 의원이 말리는 척하며 말을 얹었다.

하지만 시선은 양우석에게 향했다.

“왜요? 양 의원이 김 대표 라인이라서요?”

장준표가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며 양우석을 바라봤다.

고소하다는 속내가 역력히 드러났다.

각자 주력 파벌이 달랐다.

잠재적 대권주자로 생각되는 잠룡들을 후원하는 다선의원들.

이번 사건으로 계산이 바빴다.

잠룡이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다.

야당에도 엄연히 파벌이 존재했다.

올해 대선에서 박쥐 같은 자들이 떠나갔지만 물을 흐리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다.

‘나쁜 놈들!’

양우석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장태산 회장이 왜 말을 줄이고 상황을 지켜보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김현재 대표가 건강할 때는 앞에서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금세 본색을 드러냈다.

여기 모인 10여 명의 의원들 중 상당수가 김현재를 밀었던 인사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놓고 양우석을 두고 김현재 라인이라며 비꼬았다.

각자의 정보통을 통해 김현재 전 대표의 상태를 모두 확인했을 것이다.

3선 이상이라면 곳곳에 그만한 정보통들을 꾸리고도 남았다.

뻔히 알고도 능청스럽게 걱정하듯 물었다.

양우석이 요즘 들어 김현재 전 대표의 신뢰를 받고 있어 속으로 질투했던 것이다.

“라인이 어디 있습니까.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동지들인데 말입니다.”

양우석 역시 초선이 아니다.

재보궐 선거로 당선됐지만 그 역시 엄연히 3선이다.

국회 눈칫밥 경력이 그만큼 쌓였다.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그래요? 요즘 하도 김현재 대표와 붙어 다녀서 라인인 줄 알았어요. 흐흐흐.”

장준표가 음흉한 눈빛을 보이며 웃었다.

검사 출신답게 말이 날카로웠다.

딸깍.

그때 문이 열렸다.

“벌써들 와 있었네.”

당대표 나국찬이 들어왔다.

총선에서 선방한 후 최근 임시 당대표로 추대됐다.

5선 고지를 밟아 합동민주당에서는 큰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나이도 많은 축에 들었다.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다선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당대표다.

과거 야당이 여당이던 시절 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한국대 출신이었지만 평안한 삶을 던지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한 전사.

얼굴상 자체가 강직했다.

덩달아 말투도 거칠었다.

그래도 마음은 겉모습 같지 않게 따뜻했다.

그러다 보니 진심으로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본인은 파벌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국찬은 최대 계파 수장이다.

잠룡들을 뒤에서 미는 다선의원들이 그의 눈치를 봤다.

나국찬 한마디면 잠룡들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

“양 의원. 김 대표는 어때?”

나국찬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 김현재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온 동지였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양우석이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하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친구에게 그리 큰 시련을 주면 어떡하나. 나라도 어수선한데…….”

나국찬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이끌 동량에게 저리 고난을 주시다니…….”

“전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드렸습니다. 우리 김현재 전 대표가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힘찬 행보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

양우석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장준표와 선배 의원을 쳐다봤다.

나국찬 대표가 들어오기 전에 대놓고 비웃던 모습은 뒤로 감춘 후였다.

누가 봐도 김현재 전 대표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숭고한 동지애로 무장한 이들처럼 보였다.

‘이중적인 새끼들!’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의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이 다반사인 듯 별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정치에 발을 담그는 순간 양심은 팔아 버려야 한다는 격언은 사실이었다.

양우석도 울화통이 터지는 속내와 달리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요. 다들 각자 방식으로 기도합시다.”

나국찬이 의원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주순자 사건에 대해 또 다른 제보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넵! 알아본 바에 의하면 주순자가 해외에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렸다고 합니다.”

“그래요?”

“조정희 대통령이 관리하던 비자금 계좌도 주순자가…….”

바로 이어지는 중요한 회의.

양우석은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속으로 분류해 낸 생사표.

기회가 된다면 장태산 회장의 힘을 빌려 이 쓰레기들을 모조리 소각해 버리리라 굳게 맹세했다.

***

‘그런데 이 자식.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오동수는 사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병원장으로 재임시켜 줄 거물이라 해도 나이가 너무 어렸다.

열심히 떠들었지만 반응도 미지근했다.

나이가 비슷하면 좋은 곳에 데리고 가 접대라도 하겠지만 어린 장태산에게는 그럴 수도 없었다.

“장 대표님…….”

오동수가 조심스럽게 장태산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병원장님.”

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장태산의 목소리.

‘아오! 건방진 새끼! 목소리도 밥맛이야!’

탈모가 진행되는 자신과 달리 장태산은 누가 봐도 한창 청춘이다.

모델 뺨치는 수준의 준수한 몸매에 슈트빨도 죽였다.

대대로 차가운 피가 흐르는 재벌집 도련님 같은 분위기다.

병원장의 여비서도 커피를 가져다 놓으며 얼굴을 붉혔다.

모든 남자들의 적이나 다름없는 장태산.

“총장님께 들었습니다만……. 저희 병원에 기부를 하신다고…….”

마음과 달리 오동수는 아부 가득한 눈빛과 말투를 사용했다.

전문의였지만 의술보다 정치에 정성을 쏟았다.

수술 기법 연구보다 재단 이사들과 어울리며 골프를 즐겼다.

그 덕에 준 세미 프로급의 골프 실력을 갖췄다.

눈치와 아부, 골프 실력을 발판으로 지금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오동수에게도 장태산은 까다로운 인사였다.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네.”

장태산이 단답형으로 대꾸했다.

‘네? 이 자식 싸가지 봐라.’

오동수의 스트레스 지수가 점점 올라갔다.

그래도 꾹꾹 눌러 참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저희 아웅대 병원은 수원을 비롯해 수도권에서도 순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가까운 분당 한국대 병원 말고는 경쟁자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동수가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냈다.

사실은 자신 덕분이라기보다 피땀 흘린 다른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의 헌신 덕분에 일군 성과였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결과는 대웅 그룹에서 출발했다.

전준영 회장과 라이벌 관계였던 도운중 회장이 통 크게 대학재단과 병원에 투자했다.

투자 규모만 해도 수천억 단위가 넘어갔다.

당시로는 엄청난 재단 기부금이었다.

수도권이라지만 외곽이었던 아웅대 병원이 오늘날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더욱이 분당을 비롯해 용인 지역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명성을 더했다.

이름 있는 병원들도 아웅대 병원 때문에 진출을 꺼릴 정도였다.

최근에는 응급센터까지 이름을 날렸다.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아웅대 응급센터.

기부받기에 딱 좋은 이름값이다.

“안 오십니까?”

“네?”

“센터장님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니! 기부한다면서 센터장은 왜 찾아!’

오동수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가 응급센터다.

병원장의 이름은 몰라도 모두들 김국조 교수는 알아봤다.

자존심이 상해 많이 갈궜다.

툭하면 찾아와 물품과 입원석을 요구하는 김국조가 반갑지 않았다.

센터장은 눈치라도 있지만 김국조는 그것도 아니었다.

사직하고 다른 병원에 취직하라고 눈치를 줘도 듣지 않았다.

멍청한 건지 둔한 건지 알 수가 없는 김국조.

그놈을 감싸는 게 센터장이다.

병원장 재신임을 받으면 센터장과 김국조를 날려 버리겠다고 매일 다짐했다.

그런데 장태산이 센터장을 찾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오동수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물주에게는 고개를 숙여도 직원들한테는 어깨를 세웠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센터장.

‘저 더러운 가운 좀 벗으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들어 처먹어!’

매일같이 세탁한다지만 옛 가운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유한동 센터장.

아무리 빨아도 얼룩진 핏자국은 형광 불빛에 은은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오동수는 인상을 썼다.

현장에서 메스를 놓은 지 몇 년이 지난 터라 그만큼 피를 보는 것도 냄새도 싫었다.

“병원장님 부르셨습니까.”

불만은 있었지만 병원장으로서의 대우는 해주는 유한동이 고개를 숙였다.

“바쁜데 불러서 미안해요.”

오동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아닙니다.”

유한동도 전문구 회장에게 들은 게 있어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뭐야? 회장님이 말하던 물주가 저 꼬맹이야?’

잘 봐줘야 인턴들 나이 정도로 보이는 물주.

유한동은 곁눈질로 물주로 예상되는 인물을 살피며 내심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나이 때 돈이 아무리 많아 봐야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옷차림은 화려했지만 실속은 없어 보였다.

끽해야 재벌집 손자 정도 돼 보이는 기부자다.

“유 센터장 인사드려. 여기 이분은 강남에서 큰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장태산 대표님일세.”

‘투자회사 대표?’

오동수 병원장의 말에 유한동은 의문이 들었다.

사람 무시하기를 좋아하는 오동수가 저렇게 깍듯하게 말할 정도라면 거물이라는 의미였다.

전문구 회장이 말한 물주.

“처음 뵙겠습니다. 아웅대 응급센터 센터장 유한동입니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센터장인 유한동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어느 틈에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장태산.

“말로만 듣던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소 존경했습니다.”

“???”

젊은 데 반해 건방진 모습은 없었다.

진심이 담긴 인사말을 건네왔다.

“저를 아시는지…….”

몇 번 언론을 탔지만 그뿐이다.

사실 김국조보다 이름값에서 밀렸다.

“물론입니다. 응급환자를 위해 몸을 아끼시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

맞잡은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하하하. 인사는 그만하고 앉으시지요.”

오동수가 괜한 웃음을 터트리며 앉기를 권했다.

‘존경? 지랄하고 있네.’

자신과 있을 때는 아랫사람 보듯 하던 장태산이 유한동을 극찬하자 배알이 꼬였다.

“네…….”

유한동이 엉거주춤 장태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응급센터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장태산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야 그렇지만…….”

유한동이 병원장의 눈치를 봤다.

어디까지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한 장 기부하겠습니다.”

그때 거침없이 기부금을 언급하는 장태산.

“한 장이라 하시면…… 10억 정도…….”

오동수가 조심스럽게 액수를 추측했다.

스윽.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장태산.

“그럼 100억?”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묻는 오동수.

“아닙니다.”

“그, 그럼 1000억요???”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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