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4장. 변수(4)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번 사건과 연루된 담당자들은 모두 사법처리될 것입니다.”
“…….”
주미란과 동룡제과 중국 지사장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았던 왕정 상무위원이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았다.
그 직후부터 장애로 작용하던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우선 아리아 초코파이에 가해졌던 중국 측의 일방적인 압력이 일시에 사라졌다.
동업자인 왕수룡도 공안에 끌려갔다고 한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렇게 중국 국가식품의약품감독관리국 국장을 만났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오십대 중반의 국장 쥐라이.
주미란이 그동안 만나왔던 중국 공산당원들 중 최고위다.
국무원 직속 기관인 국가식품의약품감독관리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한 집단이다.
각종 인허가 및 수사권과 고소권까지 사용 가능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찍히면 아무리 잘나가던 세계적 기업이라 해도 중국에서 하루아침에 망해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공산당 휘하의 중요 권력 기관 중 한 곳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기관에 소속된 국장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주미란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조카 장태산이 손을 썼다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그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미칠 줄은 몰랐다.
국무원 소속이면서 주석 직계 라인이다 보니 웬만한 상무위원들 수준에서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일 처리에 혹시 미진한 부분이 있는지요?”
주미란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자 쥐라이 국장이 슬슬 눈치를 봤다.
상부에서 연락을 받고 움직인 터였다.
동룡제과 사장을 반드시 직접 만나 깍듯하게 사과하라는 지시였다.
사실 쥐라이 국장은 동룡제과가 무얼 하는 회사인지도 몰랐다.
아리아 초코파이는 TV에서나 간간이 광고로 봤을 뿐 아는 것도 딱 거기까지다.
국가식품의약품감독관리국 국장이 한가하게 작은 회사들이 뭘 하는지까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매일 온갖 라인을 통해 접대받기도 바빴다.
대형 다국적 기업들이 벌이는 로비가 상상을 초월했다.
15억 시장을 열어주는 권한이 국장에게 달려 있었다.
식품과 의약품 모두를 총괄하다 보니 그 권한이 엄청났다.
반면 사고 수습도 국장의 몫이다.
이를 위해 많은 로비처들 중 면밀히 선별해서 뇌물을 받았다.
그리고 들어온 뇌물의 상당수를 윗선으로 재상납했다.
그 규모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그런 바쁜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쪼개 동룡제과 대표라는 한국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과거 같았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인사지만 오늘은 입장이 달랐다.
윗선에서 내려진 명령인 만큼 목숨처럼 따라야 한다.
‘도대체…… 뒷배가 누구기에.’
만나보니 평범한 한국 여성 사업가에 불과하다.
미인계를 사용해 뭔가를 해볼 만한 정도는 아니다.
뒤에 큰손으로 작용하는 누군가가 있음이 분명한데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미란이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지 더 이상 욕심을 내선 안 된다.
오늘 사건 이후 중국에서 동룡제과를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어올 공무원은 없을 것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하하. 다행입니다. 그럼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가시지요.”
“네?”
“멀리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식사는 하고 가셔야지요. 예약해 뒀습니다.”
“…….”
주미란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꽌시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중국 지사장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꾹꾹 눌렀다.
명함 한 장만 얻어도 엄청난 힘이 되는 마당에 식사 자리까지 갖게 됐다.
여기에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보태진다면 동룡제과를 건들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귀한 환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지사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마주 고개 숙이는 국장.
“그리고……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쥐라이가 의미심장한 말로 부탁의 뜻을 전했다.
“알겠습니다. 국장님께 받은 은혜 잘 전달하겠습니다.”
주미란이 눈치 빠르게 응대했다.
확실하게 두 눈으로 확인한 조카의 숨은 능력.
‘조카! 정말 고맙다!’
한국에 돌아가면 더욱더 친밀하게 관계를 유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그 말씀은…….”
양우석은 긴장했다.
그냥 던지는 경고가 아니다.
그가 아는 장태산 회장은 미래를 보는 선견지명을 소유한 초능력자다.
“당에 쥐새끼가 있다는 거죠. 그것도 고위직에.”
조윤태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줬다.
“음…….”
양우석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같은 당 소속 의원이나 고위 당원들 중에 첩자가 섞여 있는 건 사실이다.
역시 여당 쪽에도 야당의 끄나풀이 섞여 있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정보 전쟁이 펼쳐지는 판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상대의 실수 하나가 거대 여론을 좌우했다.
특히 지금처럼 청와대가 같은 편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시점에서는 매일매일이 피 튀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거기에 더해 김현재 대표의 교통사고까지 터졌다.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무수한 정보력이 동원됐다.
사실 야당의 탈을 쓰고 보수 여당 의원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다수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당장 김현재 대표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측근으로 불리던 이들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심각한 중상.
뇌 개복수술까지 받았으니 다음 대선은 무리라는 의견이 팽배할 수밖에 없다.
양우석 의원처럼 발 벗고 나서는 이들이 그만큼 드물었다.
뉴스에서도 병원 전문가와 패널들이 실시간으로 김현재 대표의 교통사고를 경쟁하듯 보도했다.
누군가의 위급한 생명이 정치적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지켜보십시오.”
장태산 회장의 두 번째 주문이 이어졌다.
“위급할 때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지…….”
조윤태 변호사가 말을 보탰다.
“알겠습니다.”
양우석 의원의 방황하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혼란스럽던 정신이 차분한 상태로 돌아왔다.
“냉정해야 합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눈 똑바로 뜨고 옥석을 구별해 내야 합니다. 과거처럼 정치 욕망에 탈을 쓰고 분탕질하던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나타날 겁니다.”
장태산이 다시 한 번 예언 같은 발언을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양우석은 진심으로 장태산을 존경했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배울 게 차고 넘치는 인물이다.
정치판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정치가 돌아가는 판의 모든 걸 꿰고 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장태산이 양우석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뭔가를 준비하고 있어!’
양우석은 장태산의 눈빛에서 전혀 다른 희망을 보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양우석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보면 웃을 일이었다.
중년의 다선 국회의원이 이십대 중반의 청년에게서 정치적 힘을 얻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여기 조윤태 이사님은 원팀입니다.”
“넵!”
장태산 회장이 지원사격을 약속했다.
이런 시국일수록 생각지 못한 많은 지원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전화번호 아시죠? 법률적으로 조언받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조 이사님 복 받으실 겁니다.”
대형 로펌이 앞장서서 야당을 지원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한국처럼 상류층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더욱 희박하다.
“흐흐. 지금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장 회장 곁에 있으면 없는 복도 넝쿨째 굴러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양우석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걸친 갑옷을 정돈하는 모습과 같았다.
장태산의 특명을 받고 움직이는 지금.
“김 대표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그럼.”
고개 숙여 인사한 양우석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장 회장. 누굴까?”
양우석의 모습이 사라지자 조윤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변호사님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걸리는 놈들이야 많지. 이런 일에 전문가인 국정원을 비롯해 청와대 하수인들, 공주님을 지지하는 꼴통들. 그것도 아니면 바다 건너 쪽바리들까지 말이야. 장 회장이 알다시피 김 대표가 의의로 적이 많아.”
조윤태도 보고 들은 게 많았다.
“그런데…… 장 회장은 팀 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윤태는 장태산의 말을 되짚었다.
장태산은 속에 담은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인연이 되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도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차장검사 출신인 자신을 정당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 정도로 영악했다.
“모르죠.”
“정말 몰라?”
“제가 특급 박수무당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양우석 의원에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씨이익.
장태산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원팀이라면서 나한테도 비밀이야?”
“비밀은 두 사람이 아는 순간 이미 비밀이 아닙니다.”
“진짜 뭔가 알고 있어?”
일단 넘겨짚은 조윤태는 장태산에게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김현재 대표의 교통사고에 감춰진 진짜 비밀.
“기다리십시오. 확실해지면 그놈은…….”
“…….”
웃으면서 말하지만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그 말에 조윤태는 입을 다물었다.
장태산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감정이 드러난 표현이다.
‘누군지 몰라도 나무아미타불 아멘이다!’
조윤태는 불특정인을 위해 명복을 빌었다.
지금껏 장태산을 건드렸다가 온전하게 두 발로 걸어 나간 자를 보지 못했다.
그게 설사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
“살아있는 게 기적이야. 어디 하나 성한 장기가 없어. 오자마자 CPR로 시작하더니 뇌수술까지……. 김 교수 자네는 신의야.”
아웅대 응급센터 센터장실.
센터장 유한동이 엑스레이 필름을 비롯해 각종 자료를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도착이 몇 분만 늦었어도 사망 판정을 내렸을 상황이다.
이 정도 되는 교통사고 환자를 살려낼 만한 곳은 대한민국에 아웅대 응급센터밖에 없다.
그리고 센터에서도 신의라 불리는 남자는 단 한 명.
김국조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매섭게 판독기를 살폈다.
“아쉽습니다.”
“뭐가?”
“시간이 1분만 더 있었어도 봉합이 완벽했을 텐데…….”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너덜거리는 몸뚱이를 이 정도로 꿰매놨으면 성공한 거야. 출혈을 막아 뇌수술도 가능했잖아.”
유한동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김국조를 바라봤다.
외과에 응급전문의인 자신도 이 정도 수술은 자신이 없었다.
손도 대지 않고 사망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김국조는 해냈다.
자신의 수술팀과 함께 기적을 만들어 냈다.
무려 7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다.
그전에 있던 5시간짜리 수술을 끝내고 곧바로 들어간 수술이었다.
초응급상황이었기에 개복과 동시에 수술이 바로 진행됐다.
배를 가르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튀어올랐지만 순식간에 장기손상을 잡아냈다.
혈압을 통제하면서도 완벽하게 수술을 마무리했다.
당시 수술장을 지켜봤다.
김현재가 워낙 유명했기에 센터장도 갈 수밖에 없었다.
자칫 정치적 문제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는 겁니다. 처치가 더 완벽했다면 뇌수술에도 영향을 미쳤을 텐데…….”
항상 수술 뒤 자기반성 모드에 빠지는 김국조.
“미친 새끼…….”
유한동이 고개를 내저었다.
후배이자 동료인 김국조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실력과 함께 환자를 향해 넘치는 열정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띠리리리리.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또 어디야!”
유한동은 인상을 찌푸렸다.
센터장실로 바로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짐작대로라면 고위 권력자가 확실했다.
“센터장 유한동입니다.”
알면서도 고분고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김국조와 달리 센터장은 병원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닥터 유. 납니다.
“누구신지…….”
- 전문구요.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