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8장. 몽중몽(夢中夢)(2)
“류미가?”
- 그렇습니다. 방금 도착해 같이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
양소려는 감시자의 보고에 당황했다.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겼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경쟁자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더니 그 여파가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자신의 집안과는 차원이 다른 공산당 고위급 간부를 지낸 가문이다.
분하고 억울해 늘 수련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류미에게 어느 정도 도발할 수준은 됐다.
문제는 결정적 순간에 꼭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도라는 사실이다.
오늘도 보고를 받자마자 정성 들여 곱게 화장을 마쳤다.
장립이 홀로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보에 큰마음을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아버지 양광의 암묵적 동의도 있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평범하게 살 운명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뭇 남자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그림자로 살아도 장립이 나았다.
어차피 상해방의 자금처리를 담당하며 긴 세월 동안 뒤에 숨어 그림자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류미가 선수를 친 것이다.
‘설마?’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술을 같이 마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직 총리의 외손녀에다 잘나가는 기업의 총수를 아버지로 둔 류미.
감히 외동딸을 장립 같은 유부남의 첩으로 넘겨줄 생각이 아니라면 그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허락할 리 없었다.
‘아니야. 장립이라는 이유만 봐도 투자 가치는 충분해!’
양소려의 심정은 무척 복잡했다.
어둠이 깊어가는 북경의 밤이 밀려왔다.
쏟아져 내리는 비는 사람을 감성에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피 뜨거운 청춘.
게다가 류미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장립에 푹 빠져 있다.
이것저것 계산하느라 복잡한 자신과 전혀 다른 성향의 류미다.
꾸욱.
양소려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여자의 촉에서 느껴지는 신호.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류미는 꽤 과감했다.
현재 모두의 시선이 장립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주저하는 자신과 달랐다.
“분위기는 어때?”
감시자에게 양소려가 물었다.
- 다정함이 넘칩니다. 그냥 봐서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 같습니다.
양소려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감시자는 본 대로 솔직하게 그들의 모습을 전했다.
‘여…… 연인!’
장립이 류미를 편하게 대한다는 건 이미 알았지만 연인 사이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감시자는 프로다.
그의 눈이 틀릴 리가 없다.
- 사방에 눈이 많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감시자가 다음 행동 지시를 요구했다.
“……계속 지켜봐.”
-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하아아아아.”
긴 숨을 몰아쉬는 양소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늘따라 화장이 잘 먹어 더 자연스럽고 예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스으윽.
조용히 티슈 한 장을 뽑아 붉게 바른 입술 위 립스틱을 지우는 양소려.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 왔다.
어쩌면 분노가 복받쳐 올라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정도라면 류미와 전생에 얽힌 게 많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악연의 고리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류미……. 널 무너뜨리겠어! 반드시!”
그 순간.
양소려의 눈앞이 흐려지며 두 눈의 초점마저 흔들렸다.
몽롱하게 의식도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목소리.
“류미……. 넌 이번 생에도 말을 듣지 않는구나!”
순간 초점이 흐려졌던 양소려의 눈빛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
“계약서?”
류미가 의아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온다.
이생에서 자신도 기억 못 하는 전생의 업을 확인하는 꿈.
몽중몽(夢中夢)의 재림이다.
수행을 하거나 일상생활 중에 강력한 충격을 받으면 일순간 각성하게 된다는 몽중몽.
전생과 현생이 뒤섞여 하나의 꿈으로 재현된다.
깨달음의 근기가 높을수록 현생으로부터 더 먼 전생을 경험할 확률이 높아진다.
류미는 지난밤 꿈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분명 그녀의 전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나 구체적이다.
류미가 얘기를 이어갈 때마다 가슴이 짜르르 아파 왔다.
황제가 궁지에 몰리자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줬던 곤륜산 서왕모.
그 이름을 듣고 다시 떠올리자 분노가 일었다.
그야말로 사특한 귀계의 달인이 서왕모다.
그러다 또 류미를 보면 가슴이 저릿저릿 아려왔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녀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생각되었다.
홍콩에서 우연히 대면했던 대장금 누님의 말이 떠올랐다.
류미와 나는 전생에 인연이 있다고 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쯤의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훨씬 전부터 이미 얽혀 있던 인연이었다.
치우와 황제 훤원, 그리고 서왕모와 얽혀 있는 고대 설화.
그냥 한 편의 전래 동화로 넘기기에는 그 서술이 신비롭고 구체적이다.
신이 된 뒤의 이야기도 단편적으로 확인이 됐다.
고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자가 말하던 계약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됐다.
보면 알 거라던 공자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류미가 바로 계약서의 핵심 매개체였다.
류미는 현재 중국 민족 적통 중 한 명이 분명할 것이다.
“싫어?”
류미에게 물었다.
“…….”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류미.
“뭔지 모르지만……. 좋아.”
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인 믿음이 느껴졌다.
무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서 나를 도와준 그녀다.
중국에서는 신선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서왕모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나를 치료해 준 류미.
그 선한 마음은 이번 생에도 크게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의 류미도 마음이 여리고 선하다.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중국 권력자의 직계 자손들과 아주 달랐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대부분 가난한 농부나 지식인에 불과했던 고위 공산당원들의 후손들.
현대에 와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는 듯 설쳤다.
중난하이라는 철옹성에서 슈퍼 갑질로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렸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라는 공산당 구호는 시궁창에 처박힌 지 오래된 슬로건이 됐다.
고대 제국 황제들 같은 중앙집권구조를 형성해 가고 있다.
보란 듯이 언론을 탄압하고 조종했다.
권력을 쥐면 하나같이 인권을 짓밟는 데 앞장섰다.
자신들만이 세상의 주인임을 천하에 주입하려 애썼다.
중국을 넘어 일대일로를 통해 거대 제국이 되고자 하는 중국의 진짜 야망.
철저히 부서뜨려 산산조각내야 할 타도 대상이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저주받을 수 있어.”
“괜찮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야.”
류미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만만했다.
“……외조부 그리고 아버지와도 부딪칠 수 있어.”
미리 경고해줬다.
“역모라도 할 거야?”
류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거의 비슷해.”
“너무 센 거 아냐?”
“그래서 묻잖아. 빠져도 돼.”
“하아……. 너란 남자.”
류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위 공산당원 후손 앞에서 역모를 저지르겠다고 말하는 내가 제정신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래도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
그래야 나중에 류미가 죄책감과 뒤늦은 후회에서 조금은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모두를 살리는 일이야.”
“모두?”
“선량한 중국 인민들과 전 세계인을 위한 계획이야.”
“선량한…….”
나의 말을 따라 곱씹는 류미.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고마움은 변하지 않아.”
“뭐가 고맙다고 하는 거야? 설마 꿈속에서 널 도와줬다고 이러는 거 아니지?”
아직도 몽중몽의 실체를 짐작조차 못 하는 류미다.
대부분 사람들이 류미처럼 꿈을 받아들이고 혹은 무시하며 살다가 간다.
“어.”
류미는 만나볼수록 진국이다.
우선 계산이 바쁜 양소려와 달랐다.
중국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 중에 류미처럼 순수한 영혼은 아직 보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 뒤통수 맞겠네. 후훗.”
류미가 싱글싱글 웃으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농담이 아닌데도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데 계약서는 뭐야?”
류미가 계약서에 대해 물어왔다.
사실 그건 나도 모른다.
공자가 말한 조건일 뿐이다.
류미를 조용히 바라봤다.
반짝이는 그녀의 영혼이 눈빛을 통해 새어나왔다.
눈에는 호기심이 넘쳤다.
“나도 몰라.”
“지금 우리 대화가 만담은 아니지?”
실체 없는 계약에 류미가 호기심을 보였다.
“어.”
“립……. 넌 나쁜 남자인 데다 대책도 없어.”
류미가 다시 또 고개를 내저었다.
꿀꺽.
진한 갈증에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건배도 안 하고 혼잔 마시고. 매너도 부족하고.”
누가 들으면 결점투성이 남자인 줄 알겠다.
귀신이 옆에 있었다면 이 상황에 헛소리를 적잖이 퍼부었을 것이다.
귀신을 위해 건배!
공자를 비롯해 깐깐한 중국 신들에게 붙들려간 귀신에게 애도를 표했다.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회초리를 맞을 수도 있다.
귀신은 신선이 아니다.
중국 조상들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후손이고 그저 그런 영혼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대신 내가 특별히 부탁했으니 더 엄하게 훈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
“무슨 상상해?”
류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는 동생이 사설학원에 공부하러 끌려갔어.”
“안타깝네. 그곳 힘들다던데.”
중국에서도 사설학원은 유명했다.
한 번 끌려가면 영혼이 탈탈 털릴 정도로 공부를 해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오늘 술 좀 받는데?”
류미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천천히 마셔. 취해.”
“걱정 안 해도 돼.”
“???”
“널 믿어.”
나를 믿는다고?
류미가 배시시 웃는다.
그녀의 새하얀 박꽃 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취하지 마.”
“왜?”
쪼로록.
류미와 나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잔을 들며 류미를 바라봤다.
한 잔 술에 류미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유혹의 향기.
류미의 산뜻하고 달콤한 체취와 섞였다.
“가끔…….”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
“나도 날…… 못 믿거든…….”
파밧.
순간 터지는 짧은 불꽃.
꿀꺽.
류미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붉은 입술로 잔을 비워갔다.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