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7장. 몽중몽(夢中夢)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듬직해 보였던 남자의 등은 오늘따라 무척 외로워 보였다.
누구 앞에서도 숙이지 않던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찌릿.
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
류미는 처음으로 장립의 아픔을 마주했다.
왕정의 자살 뒤 한층 더 소란스러웠던 중국 정가.
여전히 잡음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중난하이 권력자들은 부재 상태에 놓인 상무위원 자리를 두고 야합하기에 바빴다.
진심으로 왕정을 추모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여기 이 남자를 제외하고 말이다.
류미가 장립의 처진 어깨에 손을 얹었다.
“류미…….”
장립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반가움을 넘은 복잡한 의미가 담긴 시선이다.
“뭐 하고 있어?”
류미는 자연스레 장립의 옆자리에 앉았다.
“술 마시잖아.”
“밥은?”
“잔소리하는 거야?”
“어.”
“우리 어머니도 이제 안 그러셔.”
“손님이잖아. 대우해야지.”
류미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 때문에 왕정이 자살 같은 타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장립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장립을 추궁하거나 어설픈 말로 위로하려 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눈물나게 고마운데.”
“다른 손님 있어?”
테이블에 한 개의 잔이 더 놓여있다.
류미가 빈 잔을 보며 물었다.
장립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온 길이다.
그런데 보고와 달리 잔은 두 개다.
“멀리 떠난 누군가를 위한 위로주.”
‘괴로워하고 있어.’
장립의 말이 무척 쓸쓸하게 들려왔다.
류미는 심장이 아려오는 걸 애써 참으며 주인 없는 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마셔도 돼?”
“아니.”
“왜?”
“맛없어.”
“???”
“기 빨린 술이야.”
‘기가 빨려?’
장립은 이상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꾸려 애쓰는 듯했다.
“여기 있습니다.”
눈치 빠른 미모의 바텐더가 새 잔을 가져왔다.
“마셔도 돼?”
“술 친구 필요한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알았어?”
“누군가 텔레파시로 그러던데. 빨리 와서 같이 술 좀 마시자고 말이야.”
“우리 통했네?”
“응.”
류미가 배시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농담처럼 흘린 말이지만 사실이다.
장립이 현재 무척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팍 전해져 왔다.
친구를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다.
어수선한 중난하이의 분위기가 오늘따라 더 싫기도 했다.
한때 동지였던 이의 죽음에 진정 어린 애도가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고위직을 맡고 있는 위정자들 모두 저마다 계산기를 두들기느라 바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수없이 봐오며 자랐지만 류미는 여전히 그런 모습들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중난하이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과 더 어울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하나같이 속물이 되어갔다.
권력과 돈을 위해서라면 우정과 사랑도 손바닥 뒤집듯 사고 또 팔렸다.
거부할 수 없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기도 했다.
류미 정도라면 최고의 정략결혼 상대다.
다행히 아빠 류평의 도움으로 위급한 순간마다 요리조리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시각각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나이가 차다 보니 이제는 혼처를 정해야 했다.
권력과 부를 누린 대가라 할 수 있다.
중난하이에서는 누구도 어설픈 사랑 따위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럴 만한 걸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눈에 차지 않는 상대 정도는 외조부 완진바오가 제거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장립.
처음으로 류미의 마음에 든 남자였다.
문제는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다른 여자의 남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만 해도 류미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포기하려고 온갖 상상도 해봤다.
‘이제는 늦었어.’
그를 향한 마음의 포로가 돼 버렸다.
이제 다른 남자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여인에게서 막무가내로 그를 빼앗아올 수도 없다.
그저 이렇게 그의 곁에만 있어도 됐다.
특히 지난밤 꿈을 꾸고 난 뒤부터는 더욱 그랬다.
“나 어제 꿈꿨어.”
“꿈?”
또로록.
위스키를 채워주며 장립이 물었다.
“어.”
“무슨 꿈.”
“전생에 나 여자 신선이었나봐.”
“신선?”
류미의 눈동자가 지난밤 꿈을 떠올리며 몽롱해졌다.
아주 잠깐 잠을 청했을 뿐인데 깊은 꿈에 빠져들었다.
살고 있는 곳은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높은 산이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인간들은 감히 눈으로 확인조차 어려울 만큼 높은 곳에 위치한 산.
산 중턱은 사시사철 운무가 피었다.
그 높은 곳에 맑고 커다란 연못도 있었다.
생활하는 궁정은 온갖 진귀한 황금과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신선이다 보니 하늘을 날 수도 있었다.
1년 내내 열려 있는 맛있는 복숭아도 베어 먹었다.
새하얀 비단옷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동료 여 신선들과 날아다녔다.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지금 같은 인간사 고민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스승 밑에서 신선을 도와 술법을 공부하고 남은 시간은 노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어느 날 립……. 널 봤어.”
“나를? 나도 신선이었어?”
“응.”
“어떤 신선.”
장립의 물음에 천천히 그의 얼굴을 살피는 류미.
“얼굴이 달랐어. 그런데 분위기나 말투는 지금과 같았어.”
분명 장립이었지만 얼굴이 지금과 달랐다.
지금 얼굴보다 훨씬 잘생긴 모습이었다.
대신 말투와 분위기는 똑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었어.”
“신선인데…… 사람이 아냐?”
장립이 꿈 얘기에 호기심을 보이며 궁금해했다.
“머리에 뿔이 났어.”
“뿔? 그런 신선도 있어?”
“온몸에서 전신(戰神)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어.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듯 매우 지쳐 보였어.”
떠올릴수록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스승님의 심부름으로 지상에 잠깐 내려갔다가 립을 닮은 전신을 만났다.
그는 하늘에서 함께 살고 있던 선신이 아니었다.
지신(地神)이라고 불리는 존재.
하늘에서 보던 말끔한 남신들과 달랐다.
거친 야수와 같던 립.
두근두근.
꿈을 떠올리며 얘기하던 류미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꿈속에서 립을 봤을 때 느꼈던 심장박동과 같았다.
“……상처도 입었어.”
“많이 다쳤어?”
“상처가 깊었어. 그래서…… 치료해 줬어.”
“류미는 전생에도 착했구나. 고마워.”
농담 같지 않게 들리는 장립의 말.
류미는 술잔을 잡은 채 가만히 장립을 바라봤다.
“넌 도깨비였어.”
“도, 도깨비?”
장립이 깜짝 놀랐다.
류미를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 떨렸다.
“난 서왕모를 모시는 제자였어.”
“으음…….”
얘기를 듣던 장립이 묵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표정이 무척 진지해졌다.
단지 꿈 얘기일 뿐이지만 마치 뭔가 알고 있다는 얼굴이다.
“스승님의 명으로 사저와 누군가를 찾아갔어. 그때 잠시 널 봤어.”
지금 생각해도 짧은 시간 꾼 꿈이지만 너무나 구체적인 꿈이었다.
분명 스승님의 지시로 지상에 내려갔다.
꿈속이었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다.
하늘에 머물던 스승께 도움을 청하는 지상의 왕이나 지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도와주면 안 되는데……. 도와줬어. 그래서…….”
류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꿈속의 기억은 생생했다.
스승이 무척 노했다.
감히 스승의 적이 될 자를 치료해 줬다는 생각지 못한 죄목.
당장 파문당했다.
그리고 류미는 엄한 벌을 받게 됐다.
선녀의 위치를 박탈당하고 지상으로 내쳐졌다.
꿈속이었지만 그때 스승이 남겼던 분노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 넘지 말고 주지 말아야 할 마음을 빼앗긴 죄! 윤회를 거듭하며 업을 닦고 와라. 그리고…… 부질없는 감정이 만들어낸 아픔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몸소 겪고 오너라!
하룻밤에 모든 걸 잃었다.
그리고 찾아온 암전.
눈을 떠서야 그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이불이 축축하게 젖었을 정도로 저도 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
립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류미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꿈속의 얘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미안하다는 말에서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날 치료하다가 벌 받았잖아.”
“무슨 소리야? 이건 그냥 꿈이잖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데 내가 벌 받은 건 어떻게 알았지?’
류미는 장립이 신기했다.
꿈에서 벌을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까지 알고 있었다.
“서왕모가 친절한 분은 아니야. 그리고…….”
말을 하다 끊는 장립.
류미를 바라보는 시선에 안타까움이 담겼다.
“푸하하하.”
류미가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립……. 이건 꿈이야. 뭐가 그렇게 진지해.”
류미는 다시 한 번 가볍게 장립을 위로했다.
이상한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몽중몽(夢中夢).”
“응?”
“꿈속의 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모든 것도 다 꿈이라고 누가 그러더라.”
“…….”
류미가 입을 다물었다.
장립의 말 한마디에 강한 충격이 밀려왔다.
“몽중몽…….”
입술 끝에 매달려 되뇌어지는 단어, 몽중몽.
웬일인지 가슴 속이 아련해졌다.
서글픔과 아픔이 뒤섞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또로로로록.
그리고 대책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스윽.
“내가 왜 이러지…….”
류미가 당황해하며 눈물을 닦았다.
장립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자리에서 도리어 낯선 감정과 조우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장립이 류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진심으로 고마워.”
따뜻한 장립의 눈빛.
“……뭐가.”
파르르 류미가 몸을 떨었다.
머리끝부터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끝, 그리고 영혼까지 진동했다.
그리고.
“계약서……. 작성하자.”
“???”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