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1장. 담판(3)
파르르르르.
방태민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한 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쇠한 몸에 바짝 혈기가 돌았다.
‘저걸 어떻게!!!’
유비가 죽고 난 뒤 마지막으로 중원을 향해 나아가던 제갈공명이 던진 출사표의 핵심 내용이었다.
방태민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 적이 있다.
천안문 사태가 터질 때 중국 공산당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당대 지식인을 비롯해 대학생들이 공산당에 반기를 들면서 초래된 문제였다.
총리를 비롯해 깨어 있는 고위 당원들까지 연루되면서 판이 커졌다.
당대평의 오랜 악정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셈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 홍위병 난동을 부렸던 당대평.
문화대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지식인들을 대거 학살하거나 자국에서 쫓아냈다.
대표적인 21세기 분서갱유 사건이었다.
그때 살아남은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향해 궐기했다.
권좌에서 쫓겨날까 봐 당대평은 피로써 지식인들을 응징하고 갈아엎었다.
천안문에서 수많은 이들이 탱크에 깔려 죽음을 맞았다.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뤘을 정도였다.
외부 세계로 알려진 것보다 참상의 규모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공안을 동원해 일명 ‘반란자’들을 색출해 냈고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런 당대평에게 천안문 사태 해결 공로를 높이 평가받아 주석직을 물려받은 방태민.
당대평이 그 당시 기차를 타고 민심 대장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중국에서 공산당은 무너졌을 것이다.
당시 당대평이 주석직을 물려주고 떠날 때 방태민이 울면서 읊었던 것이 바로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后已)였다.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질 때와 같은 심정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공산당이 그때 무너졌다면 방태민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역사 속에 묻힌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한 시점인 오늘 장립이 그와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그 맹세 유효합니까?”
눈빛을 빛내며 장립이 다시 물었다.
“…….”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방태민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장립이 이 말을 던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넌 누구냐!!!’
방태민의 마지막 방어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뼈 아픈 일격이 아닐 수 없다.
“자, 자네…….”
순식간에 엄청난 기가 소진돼 버리면서 금방 방태민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거짓이 아닌 진짜 담판이었다.
“이 정도면 양해각서 내용으로 충분히 만족하시리라 믿습니다.”
장립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
방태민은 단 한마디도 부정하지 못했다.
악착같이 슈건핑으로부터의 멸시를 감당하며 버티고 있었던 이유의 핵심이다.
대대로 내려온 공산당의 전통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절대권력을 꿈꾸는 슈건핑은 중국몽이라는 이름하에 다른 파벌들을 과감히 숙청했다.
파벌독재가 되면 당연히 공산당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협치 속에 절대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지금껏 공산당이 유지돼 올 수 있었다.
그 이치를 모를 리 없는 슈건핑이 황제가 되려고 온갖 수를 다 쓰고 있다.
“욕심 많은 곰이 진짜 황제가 되는 걸 막아드리겠습니다.”
장립이 바라던 말을 꺼냈다.
꿀꺽.
방태민은 바짝바짝 타는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장립이 생각했던 것보다 깊게 중국 정치의 치부를 꿰고 있었다.
“물론 각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재주 부리는 곰의 능력이 사악합니다. 각하를 압도할 정도로 말입니다.”
다소 위험 수위가 높은 발언의 연속이다.
전혀 알 수 없었던 장립의 속마음이 처음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으으음…….”
방태민은 긴 신음을 흘려보냈다.
분명한 건 오늘 대화는 담판이 맞다.
양해각서는 본 계약과 다를 바 없다.
‘믿어도 되는가……. 만약 이게 음모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국 정치판이다.
피붙이와 가족 말고는 세상에 믿을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꽌시가 형성된 것이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내 편을 구축해 놓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다.
“절 믿으셔야 합니다.”
장립이 신뢰할 만한 묵직한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마치 상대의 속마음을 훤히 훔쳐보는 것 같았다.
“고약하고 음흉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말에도 장립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방법은?”
“차차 알려드리겠습니다.”
장립은 끝까지 감추고 있는 패를 꺼내지 않았다.
방태민 역시 더 이상 요구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카드는 모두 오픈된 상태다.
“내일이 가기 전에 증명해 주지.”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어차피 곰도 사냥을 준비 중입니다. 차라리 각하께서 먼저 선수 치는 게 이득일 겁니다.”
장립이 은근히 정보를 풀었다.
장립의 말대로 상대방이 치기 전에 정리하는 게 옳았다.
만약 비밀 공안에 끌려간다면 상해방의 입장은 복잡해질 것이다.
‘슈건핑……. 이자는 반드시 받아내겠다.’
차곡차곡 쌓이는 원한의 무게.
콰아아앙! 콰르르르르르르르.
빗줄기가 더 굵어지는 듯했다.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각하……. 갑자기 비를 보니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시?”
매번 뜬금없는 말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장립이다.
여유 있게 뒷짐을 지었다.
유람 나온 학사처럼 한껏 여유로움이 풍겨 나왔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하는 장립.
“당장 좋은 술을 사 와서 그대들께 권하리라. 귀한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옷을 아이를 시켜 좋은 술과 바꿔오게 하여 그대들과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도록 하겠노라…….”
이태백의 시였다.
‘괴짜야, 괴짜…….’
방태민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장립에 대한 평가를 얼마간 포기했다.
시 한 편을 구실로 술을 청하는 장립.
거친 담판이 끝나기도 전에 이태백을 소환한 그의 배짱은 천하제일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미안하네. 찾아온 손님에게 박정했네.”
방태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단숨에 표정을 바꿀 줄 알아야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술 한 잔으로 서운한 마음을 정리함이 계약이 끝난 뒤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하오!”
장립의 호방함에 방태민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그럼에도 아직 그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눈앞에 대작하기에 알맞은 상대도 있었다.
비까지 내리는 중난하이의 밤이 아닌가.
방태민은 생각했다.
‘곰아……. 널 잡기 위해 튼튼한 그물이 준비되었구나!!!’
***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북경에 위치한 왕정의 집.
쏴아아아아앗.
동이 텄을 시간임에도 밖은 밤처럼 어두웠다.
먹장구름이 뿌려대는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상청에서 오늘 하루 폭풍급의 비와 바람이 불 거라고 예보됐다.
저벅저벅.
집무실에서 왕정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서성였다.
집안은 고요했다.
인기척은 없었다.
조강지처인 아내는 아이들과 친정이 있는 상해에서 생활한 지 꽤 됐다.
북경 집은 왕정의 집무실이자 그의 놀이터로 사용됐다.
대신 첩들이 자유롭게 수시로 드나들었다.
간간이 마음이 맞는 정치인들을 모아 파티도 열었다.
수많은 뇌물도 이 저택에서 건네졌다.
상무위원이 된 뒤로는 경호를 붙여 그의 신변까지 국가에서 책임졌다.
상해방의 대부인 방태민의 수족이지만 안전은 국가 차원에서 보장됐다.
슈건핑도 대대로 내려오는 공산당 규칙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고위 공무원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재산을 처분할 만한 기회는 주었다.
설사 감옥에 들어간다 해도 그곳에서 못 할 게 없었다.
저택 제공은 물론 그곳에서 여자도 품고 전속 요리사를 들여 귀족처럼 살 수도 있다.
오로지 외부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자유만 박탈당하는 수준이다.
“오늘 각하를 뵈어야겠어……. 느낌이 수상해.”
태자당 쪽에서 친척 조카를 쳤다.
자신을 무시할 만한 수준의 손을 썼다.
게다가 경매장에서 방태민에 의해 쫓겨났다.
한마디로 장립 때문에 모든 게 엉클어지고 있었다.
“장립! 네놈만 죽일 수 있다면 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를 했다.
결국 상해방에서 자신을 쳐내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던지기 위해 준비한 폭탄.
긴 시간 동안 방태민 아래에서 몸집을 키워온 왕정이었다.
폭로할 중요한 비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들이 터지는 순간 중국 정치계는 극심한 혼돈과 폭풍에 휩싸일 것이다.
“각하. 날 버릴 생각은 마십시오. 이 왕정, 그렇게 어수룩한 놈이 아닙니다.”
왕정은 각 파벌 우두머리들이 키우는 사냥개들 중 단연 우수종에 속했다.
비장의 한 수 정도는 모두들 가슴 깊숙이 품고 살게 마련이다.
언제든 주인이 내치려 하면 가차 없이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덜컹.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문 열리는 소리.
휘이이이이이잉.
바람이 저택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앗.
굵은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누구야!”
심상치 않은 느낌에 왕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철컥.
책상 서랍을 열어 권총을 빼 들었다.
고위 공산당원들은 누구나 개인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신변의 위협뿐만 아니라 어떤 순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 때를 대비해서다.
휘리리리리리리리링.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바람 소리가 짐승의 숨소리처럼 들려왔다.
꿀꺽.
왕정은 잔뜩 긴장했다.
저벅저벅.
그때 낮게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누구냐니까!!!”
눈이 돌아간 왕정이 미친 듯 소리쳤다.
허락도 없이 찾아올 자는 없었다.
문밖에 경호를 맡은 공안이 경비를 서는 중이다.
그럼에도 집안에 낯선 자가 침입했다.
똑똑.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런 썅! 어떤 놈이야!!!”
잔뜩 날 선 왕정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평소라면 공안이 뛰어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비와 바람 소음에 왕정의 목소리도 금세 묻혔다.
끼이이이익.
조용히 문이 열렸다.
스윽.
문 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왕정.
파르르 손이 떨려왔다.
저벅.
한 남자가 모습을 보이며 들어왔다.
투두두둑.
검은 우비 차림으로 빗물이 뚝뚝 바닥을 적시며 떨어졌다.
얼굴은 우비 모자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날렵한 턱선은 칼날처럼 차가워 보였다.
“이 새끼 너 누구야!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쏜다!!!”
왕정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스으윽.
남자는 손에 들린 것을 들어 올렸다.
사진 한 장.
“헛!!!”
남자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왕정은 그만 신음을 토했다.
자신과 아내, 그리고 아들이 찍혀 있는 화목한 가족사진이다.
“가족은 살려준다. 명예도 보존한다.”
감정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으.”
왕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방문자가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과거 자신도 이용한 적이 있는 조직의 청부업자.
이쯤 되면 저항은 무의미했다.
거부하는 순간 살면서 쌓았던 모든 게 한순간 수포로 날아갈 것이다.
“……가, 각하의 뜻인가?”
왕정이 마지막으로 목구멍의 힘을 짜내 물었다.
자신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먼저 치고 들어왔다.
아내와 아들을 내일 제3국으로 빼돌리려 했건만 도리어 당했다.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걸 모르나?”
청부업자는 냉정하게 내뱉었다.
“5분. 밖에서 기다리겠다.”
저벅.
청부업자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 하아.”
왕정은 막혀오는 호흡에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어떤 사고도 할 수가 없었다.
외통수에 몰렸다.
잔인한 방태민의 수법에 자신이 당할 줄은 몰랐다.
“장립……을 선택하신 겁니까.”
새빨갛게 충혈되어 터질 듯한 왕정의 눈.
쓸모가 다한 사냥개 신세의 운명이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놈은……. 결코 사냥개 따위가 아닙니다!!!”
왕정은 느낌으로 알았다.
장립은 사냥개 따위가 아닌 상대의 목숨을 위협할 대호라는 것을.
스윽.
왕정은 가만히 총을 들어 머리에 총구를 가져갔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
나름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그 개자식을 만나기 전까지.
“죽어서도 널 용서치 않겠다……. 장립! 다음 생에 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삼키겠다!”
지독한 저주와 원념을 또박또박 내뱉는 왕정.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가했다.
그리고.
타아아아아아아앙!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