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6장. 끝나지 않는 전쟁(4)
쿵!
머릿속을 울리는 묵직한 발자국소리.
동시에 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다른 민족의 땅에서 그들의 신들과 충돌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다니엘…….”
신께 기도하던 로리아나의 입에서 그리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인 남자의 외모는 사뭇 달랐지만 그는 분명 다니엘이 맞았다.
세상의 시간은 거짓말처럼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의 영역에 속해 살아가는 야훼의 딸 로리아나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도하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생각을 이어갔다.
쇄애애애애앳.
신이 부리는 병사들의 검이 다니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로리아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별일 없을 거라 믿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의 장면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건 야훼의 힘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결코 개입할 수 없다.
정작 야훼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전쟁이었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들의 전쟁.
다니엘의 뒤쪽으로 그의 조상신으로 추측되는 영혼들이 보였다.
중국을 수호하는 조상신이었다.
- 탓!
다니엘의 기합 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허공으로 뽑아 든 다니엘의 검은 거침없이 공간을 갈랐다.
퍼어어엉!
달려들던 병사들은 다니엘의 검에 단칼에 베어지며 사라졌다.
죽음의 세계에서도 자신이 모셨던 조상신을 따르던 귀신들이 또 한 번 저승의 강을 건너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달려드는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듯 완전한 영계로 돌아가는 자들의 입가에 평온한 미소마저 비쳤다.
신들도 거부할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우주 윤회의 법칙이 영계로 떠나는 자들에게 가동됐다.
“끝나지 않는 전쟁…….”
야훼의 눈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로리아나의 입에서 무심히 흘러나오는 말.
그녀도 그런 전쟁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과 이웃한 나라의 조상신들이 싸우고 있는 이 시점에 로리아나는 아사신들이 모시는 악신과 싸우고 있었다.
한때는 한 분의 신을 같이 섬겼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쟁으로 쏟아낸 수많은 이들의 피가 신의 정신을 오염시킨 지 오래였다.
전쟁까지 치르며 본래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정체도 잊었다.
서로에 대한 증오만이 고스란히 남았다.
기필코 한쪽이 멸망해야 끝날 길고 긴 전쟁.
“다니엘……. 당신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로리아나는 낯선 자의 모습을 했지만 다니엘이 분명한 그를 위해 기도했다.
파앗!
그녀의 신실한 기도는 카르마가 되어 허공에 퍼져나갔다.
신의 영역에 발 담그고 있는 로리아나만이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 모두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이끌고 있는 선봉장이나 진배없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신들의 전쟁은 수 세기를 지났음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쟁이 가져온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 세계에서 패배한 자들의 조상은 후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침묵하며 후손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인고의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누구도 아닌 야훼가 그랬다.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긴 세월 동안 세상에서 다른 조상신들과 후손들에게 멸시당했다.
이제야 힘을 되찾았지만 언제 다시 패배자의 신세가 될지 몰랐다.
얼마 전 겪었던 아사신의 일격도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신전이 무너질 뻔했다.
그래서 더욱 동료가 필요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서 공격해 오는 적을 맞이할 용기와 힘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로리아나에게 다니엘은 그런 존재였다.
“야훼시여……. 부족한 종이 간절히 바라오니 그에게 힘을 더해주소서.”
로리아나의 기도는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그 순간 야훼가 묵묵히 로리아나의 그 기도를 듣고 있었다.
“크크크크크. 싸워라! 싸워! 너희들이 피 터지게 싸울 때 내 사랑하는 자식들이 과거처럼 그 땅을 빼앗고 피로 제사를 지낼 것이다!”
뭉클뭉클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공간.
두 마리 뱀이 각인된 향로 앞에서 신에 빙의된 자가 광기 젖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자의 눈앞에도 한 장면이 펼쳐졌다.
중국을 수호하는 조상신의 가피를 받은 황제들과 싸우고 있는 뿔난 도깨비 한 마리.
오랜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환웅의 명을 받아 사나운 짐승과 독충을 다스렸던 치우(蚩尤)가 재림했다.
인간이 되지 못했던 호랑이의 기운까지 같이 품었다.
중국의 신들과 심심치 않게 싸우던 도깨비의 재림.
퍼어어어엉! 퍼버벙!
거침이 없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이 적의 목을 베고 심장에 칼날을 쑤셔넣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교활한 뱀의 눈을 가진 자의 목구멍에서 광소가 터졌다.
그의 말처럼 본격적으로 시작된 끝나지 않는 전쟁.
적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자금성에서 도깨비 한 마리가 외롭게 무정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 지박신의 병사를 참하였습니다.
- 이 땅의 조상신이 분노합니다!
- 카르마 포인트가 축적됐습니다.
귓가에서 연신 울리는 알림음.
쿠웅!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 죽엇!!!
- 타아아앗!
명과 청의 황조를 수호하는 호위무사들이 한 줄기 영혼을 불사르며 돌격해왔다.
용감하다.
그 용기가 가상했으나 무식했다.
소멸을 기꺼이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다만.
- 뭐, 뭐죠? 왜 웃는 거죠? 미친놈들인가요?
뒤에 찰싹 붙어 매달려 있던 귀신이 묻는다.
귀신의 말처럼 호위무사들은 소멸의 길로 들어서면서 웃었다.
어찌 보면 개운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 엄청난 양의 과제를 끝낸 학생의 얼굴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자유를 찾은 출소자의 모습도 보였다.
진작 소멸돼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의 세계로 돌아갔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맺은 맹세와 어떤 법칙에 의해 자금성에 갇힌 혼 신세가 되었다.
오랜 세월 끝에 얻게 된 천재일우의 기회.
- 기회요? 그럼…….
너도 갈래?
- 으아아아아! 싫어요! 전 형님 곁에서 평생 붙어살 겁니다!
거머리 같은 귀신의 답변이다.
호위무사들은 죽어보고 나서야 후회했을 것이다.
살아서 맹세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서 한 번 뱉은 맹약은 영계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계약과 같다.
이치를 아는 누군가가 깨트려주지 않는 한 혼자서는 절대 맹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야훼가……. 당신에게 쥐꼬리만 한 카르마 포인트 격려금을 하사했습니다.
하아…….
이 와중에도 야훼의 쪼잔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신의 딸 로리아나가 나에게 넉넉하게 보냈을 포인트를 대부분 떼어먹었다.
신들과 인간계에 통하는 격언은 비슷비슷했다.
속 좁은 신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쉐에에에에엣.
그 와중에도 나의 검은 쉴 틈이 없었다.
처음부터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백 년 묵혔다 해도 귀신은 귀신일 뿐이다.
지박신이 된 황제 곁에 아무리 오래 붙어 있어도 신은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새끼 무당들에게나 통하는 작은 무신에 불과했다.
콰아아아아앙!
상급신에 육박하는 카르마를 소유한 나의 검을 받아낼 재간이 없었다.
한 번의 휘둘림에 하나씩 깔끔하게 저승으로 사라졌다.
- 저승의 각 영계에서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했습니다.
정체돼 있던 귀신들의 윤회가 시작되자 카르마가 즉시 계산되어 입금됐다.
짭짤하다.
월급 말고 특별 보너스를 받는 기분과 비슷하다.
속도 후련하다.
음흉하고 복잡한 중국 공산당원들과 어울리다 보면 덩달아 속물이 되는 것 같다.
중국몽을 위한다지만 결국은 자신과 주변인들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
지금은 억지로 융합되어 있지만 큰일이 터지면 중국은 사분오열될 것이다.
섞여 있는 조상들의 피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뇌로 교육될 수 없는 영역이다.
게다가 인류애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인간성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기를 가르치는 중국 가정과 학교 교육.
당장은 이득이 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독이 될 뿐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깨어나 빛이 되어야만 한다.
나눌수록 행복해진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사회가 발전하는 법이다.
그러나 중국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를 위해 손해를 보는 것 자체를 수치라고 여겼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민족의 조합이 불러온 불협화음인 것이다.
그들의 동맹은 어느 날 유리알처럼 산산이 깨진다.
그날이 눈에 선했다.
공산당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인민들을 억압하고 끊임없이 눌렀다.
중국이 분열되는 순간 그들이 꿈꾸는 영원한 제국의 재림은 사라진다.
퍼어엉!
불나방처럼 공격하던 황실 호위무사들이 모두 사라졌다.
대략 그 수가 수백을 넘었다.
더 이상 공격하는 자가 없다.
하단에 대기 중인 고관대작 귀신들도 입을 다물었다.
압도적인 카르마 포인트 차이.
저벅.
한 발자국씩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감히 앞을 막는 자가 없다.
쏴아아아아아앗.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통에 의해 방금 전까지 맑았던 자금성의 하늘에 먹구름이 꼈다.
신들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에게 닥친 위난에 황제들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놈의 용 새끼들 실하기도 하지.”
태화전으로 오르는 길에 각인된 용 석상들이 꿈틀거렸다.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긴 세월 동한 놈들도 인간들에게 추앙을 받아 왔다.
자신이 진짜 용이라도 된 듯 착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렁이처럼 뭘 꿈틀거려! 콱! 밝아 버릴라!”
치졸하지만 가볍게 협박을 날렸다.
“…….”
꿈틀거리던 용이 그대로 돌로 굳었다.
인간이나 영적 세계나 말 안 듣는 것들은 패고 시작하는 게 답이다.
굳이 좋은 주먹 놔두고 입 아프게 대화를 시도할 필요 없다.
어차피 평생 친구가 될 일이 없는 족속들이다.
쿵!
마지막 계단에 발자국이 찍혔다.
어느새 다 올라온 태화전 상단.
뒷짐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무식하게 넓기만 하고……. 여백의 미를 몰라. 쯧쯧.”
자금성은 경복궁과 많이 달랐다.
여백과 자연의 미가 가미되어 있는 한국식 궁전과도 아주 달랐다.
무조건 그냥 크고 무식하게 늘어뜨린 처마와 기둥만 그럴싸하게 뽐내는 건물이 전부인 자금성.
중국이 가진 허세의 표본 같았다.
- 넌…… 누구냐…….
두 황제가 또 동시에 묻는다.
바로 앞 황좌에 앉아있는 영락제와 강희제.
그그그득.
그들 뒤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중앙에 놓고 자리잡고 앉았다.
스륵.
다리도 그럴싸하게 꼬아 올렸다.
이제야 대등해졌다.
스윽.
나의 입가에 만족스럽게 번지는 사람 좋은 미소.
“다시 소개하지……. 대한제국의 사신 장태산이라고 하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