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0장. 황제와의 산책
‘역시 이 수는 예상 못 했군.’
완진바오는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의 장립을 지켜보며 마음이 흐뭇했다.
중국 공산당에서 꾀주머니로 통하는 장본인이었음에도 장립 앞에서는 번번이 한 수 밀렸다.
처음 만남부터 그랬다.
베이다이허에서 이미 허를 찔렸다.
북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준비한 회심의 일격.
장립의 당황하는 모습에 막힌 속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대학원 얘기가 겉보기엔 그저 툭 던진 말 같지만 아주 중요한 의중이 담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경대와 청화대 출신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다.
혈연, 지연 다음으로 학연은 중요한 꽌시를 연결하는 줄이다.
적잖이 똑똑한 장립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한마디로 완진바오가 직접 끌어주겠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그 말씀은…….”
장립이 당황한 속내를 수습하며 물어왔다.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야.’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진짜 의도를 물어오는 장립.
“립. 배움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네. 이미 미국 명문대를 졸업했다지만 대국인은 대국에서 배워야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네. 앞으로 미국과 대국이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가 될 것이야. 그때를 대비하고 또 자네 자식을 위해서라도 대국에서 힘을 키워 놓는 게 중요하네.”
완진바오가 자못 어른 티를 냈다.
나름 속내를 포장한 의도는 훌륭했다.
“…….”
조용히 입을 다무는 장립.
“유럽과 미국에서 생활해봐서 잘 알겠지만 그들의 인종차별은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야. 특히 우리 같은 동양인은 흑인이나 아랍계보다 더 멸시받을 수밖에 없네.”
완진바오의 음성에 힘이 실리며 잔잔하게 울렸다.
청년의 앞날을 위해 진심으로 훈육하는 어른 같았다.
“대국의 위세가 강해질수록 질투도 강해질 걸세. 그러다 보면 미국에서 쭉 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수 있을게야. 미리 이곳에서 기틀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래서 대학원을 추천하네. 생각보다 대국의 대학원도 미국에 뒤처지지 않을 걸세.”
북경대와 청화대는 이미 세계적인 명문대로 인정받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 조금 밀릴 뿐 다른 분야는 거의 선진국을 따라잡았다고 할 만한 수준이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유수의 대학에 파견했던 인재들이 자국으로 돌아와 강단에 섰다.
넘치는 인구만큼 그 속에 섞여 있는 천재들이 끊이지 않고 배움을 이어갔다.
당연히 학문적 성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 공과대학이나 실리콘밸리 출신 중국인들은 머리까지 뛰어나 중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음껏 배워 중국으로 돌아와 국가에 환원하고 봉사했다.
다른 어떤 국가보다 빨리 역량을 키웠다.
대국의 굴기.
이제는 천하를 향해 포효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 써 주심에 감사합니다.”
장립은 반듯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완진바오의 제안에 확답은 없었다.
어차피 바로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우선 운을 띄워놓고 장립에게 호의를 베푼 것만으로도 역할은 충분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되네. 자네가 원하면 입학은 언제든지 가능하네.”
중국 명문대도 입학 절차가 모두 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고위 공산당 가문 자제들은 알게 모르게 특혜로 대학교나 대학원에 입학했다.
현 주석인 슈건핑도 그랬다.
류미 또한 실력보다 높은 대학교에 진학했다.
공산당 원로들에 대한 대우가 남다른 중국.
모두가 꽌시로 시작해 꽌시로 끝이 났다.
“립……이 온다면 나도 같이 공부할 거야.”
류미가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반드시 함께할 거야.’
같이하지 못할 이유는 아무리 따져봐도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장립이 결혼했고 부인과 아이가 있다는 것뿐.
그 사실을 제외하고 장립이 갖고 있는 장점이 너무 많았다.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본 후에 답해도 되겠는지요?”
장립이 정중하게 현장에서의 답을 피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예법에 절대 어긋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자네에게 누가 강요하겠나.”
완진바오는 던져 놓은 그물만으로도 만족했다.
립이 어리석은 자가 아닌 이상 완진바오의 성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립이 미소로 화답했다.
“립! 한 잔 더 받게. 어제 못다 마신 술에 대한 미련은 싹 끊어버리도록 말이야.”
류평이 술병을 들고 화제를 돌렸다.
“기꺼이 받겠습니다.”
장립이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때.
띠리리리리리.
담백하게 울리는 장립의 스마트폰 벨소리.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장립이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각하!”
장립의 입에서 각하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의 시선이 장립의 입술에 집중됐다.
***
- 대학원요? 형님이요? 푸하하하하.
귀신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내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귀신.
- 이번 기회에 회장님 공부 좀 시켜드리시죠. 크크크.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
미국에서 수십 년 젊은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임성철 회장이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지금의 임성철 회장 능력으로는 단 하루 만에 가짜 신분이 들통날 것이다.
중난하이에 모인 고위 공산당원들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온 정치 노장들이다.
아무리 천하의 임성철 회장이라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기업가와 정치인은 살아온 방법과 생리가 다르다.
특히 나와 달리 임성철 회장은 마법이나 무공 능력이 전무하다.
- 그런데 왜 놀라는 척하십니까? 설마 이것도 연기입니까?
기껏 상대가 애써서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다.
적당히 놀라는 척해줘도 나쁠 건 없다.
문제는 지금 연락 온 상대다.
- 날세.
대뜸 약속도 없이 전화를 걸어온 남자.
중국에서 오직 한 명만이 사용 가능한 오만한 말투다.
“하명하십시오. 각하.”
최대한 정중하게 그의 전화를 받았다.
중난하이를 다스리는 주인의 전화였다.
- 술은 다 마셨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는 상대방.
“그런 것 같습니다.”
“…….”
스마트폰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전화 상대의 정체를 직감한 완진바오와 그 일가.
쥐 죽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그럼 산책이나 하지.
갑작스러운 산책 제안이었다.
중난하이의 밤은 예상했던 대로 심히 복잡스러웠다.
악신 요리사들을 만나지를 않나 야밤에 중국의 황제가 직접 전화를 넣어 산책을 제안하지 않나…….
“아직 자리가…….”
“다녀오게.”
완진바오가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 밖에 사람을 준비시켰네.
황제는 역시 오만했다.
어제 원로들을 향해 보였던 예의를 차리던 모습은 없었다.
진정한 황제의 권위를 내보였다.
“알겠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거절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술은 더 마셔봐야 의미가 없다.
띠릭.
통화가 끝났다.
“립……. 자네는 복도 많아. 끌끌.”
완진바오가 복잡한 시선으로 날 보며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가 처량해지는 순간일 수도 있었다.
권력이란 것이 이렇게 잔인하고 무서웠다.
남들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서면 그 힘은 몇 배 더 강한 힘으로 농축됐다.
“다녀오겠습니다.”
“……립.”
자리에서 일어나자 류미가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산책하고 올게.”
“기다릴게.”
“응.”
황제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게.”
류평이 조심하라는 말을 힘주어 말했다.
중난하이에서 황제는 누가 뭐라 해도 무소불위의 권위자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류미가 따라 나왔다.
“잘하겠지만 진짜 조심해……. 그는 무서운 남자야.”
류미가 목소리에 경계심을 잔뜩 담고 경고했다.
“류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바라보는 근심 가득한 눈동자가 안타깝다.
“그 반대는 생각 안 해 봤지?”
“???”
류미의 눈동자가 의혹으로 가득 찬다.
씨익.
차갑게 식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밖으로 나왔다.
대문 앞에 블랙 슈트를 착용한 건장한 남자가 중국 국기를 단 홍치 옆에 서 있었다.
“타십시오.”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
스윽.
차에 올랐다.
- 앗싸! 산책이다!
어느새 날아들어 와 옆좌석에 앉는 귀신.
부우우우우웅.
대형 자가용이 부드럽게 중난하이 심처를 향해 이동했다.
***
“어서 오게.”
듬직한 덩치의 사내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늦은 밤이다.
황제는 어제 날을 새며 술을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환단 영향도 있겠지만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미안하네. 아직 술자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로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전화 한 통으로 완진바오가 준비한 술자리를 파투나게 만든 황제.
“아닙니다. 마침 걷고 싶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답변이 만족스러운 듯 남자가 웃는다.
저벅.
그 말을 끝으로 앞장을 서는 남자.
- 와아아……. 이 밤에 자금성 산책이라니! 이거 특혜죠?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낮에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지만 밤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중국 권력의 심처.
사방을 둘러봐도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멀리서 황제를 경호하는 이들이 조용히 따라오는 것만 흐릿하게 보였다.
“어떤가?”
활짝 열린 자금성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두툼한 성문은 그 자체로 위용이 대단했다.
수없이 많이 밝혀진 가로등 사이로 보이는 웅장한 금색 건물들.
“대단합니다.”
솔직한 말이다.
낮의 자금성과 밤의 자금성은 사뭇 달랐다.
그곳을 황제와 단둘이 걸었다.
자박자박.
단단한 느낌이 전해지는 돌바닥을 걸었다.
많은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그때.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말없이 걷던 황제가 갑자기 툭 한마디를 뱉었다.
회귀의 전설 3부